신앙촌 운동의 원동력 놀라워

신앙신보 1963년 8월 19일
발행일 발행호수 2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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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소신앙촌 건설 기념 인터뷰 한양대학 변시민 교수

전혁림 화백이 그린 덕소신앙촌 전경

신앙신보는 1963년 8월 19일자 제317호에 덕소신앙촌 건설 제1주년 기념 순회 인터뷰로 한양대학 변시민 교수 기사를 실었다.

한국 사회학계의 제1인자인 변시민 교수가 전도관 신앙 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자유당 때 문교부 문화국장 직에 있을 때부터였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온 세상이 들고 일어나 전도관 운동을 이단시하고 백안시할 때였다.

신앙촌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신앙촌 건설 기록영화를 보았다는 변 교수는 자못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선두에서 이끄는 박 장로를 중심으로 그 일치된 정신이며 강철 같은 단결력과 비상한 건설의 힘은 위대한 것이라 했다.

“참 좋습니다. 훌륭하더군요. 그 원동력이 어디서 오는지 모르겠소만…” 변 교수는 연방 찬탄하면서 그렇게 일해야만 이 나라가 빈곤을 타파하리라 하였다.

친구의 아들이 전도관 가서
거친 성품이 완전히 달라지고
새사람이 되었다는 말에
깊은 감명을 받고 관심 생겨

사회학자인 변 교수에게 무릇 선구적 운동이 기성 사회의 반발과 배척을 받는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에 의하면 기성 사회란 언제나 현상 유지를 하려 하는데 그 수준을 능가하는 새 운동이 일어나면 이를 반발하고 미워한다 하였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모두 남 잘되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기 때문이지요.” 변 교수는 새 운동을 배척하고 꺾으려 하는 사회적 심리의 밑바닥은 시기와 질투라고 갈파하였다.

변 교수는 또한 전도관에 깊은 감명을 갖게 된 개인적인 동기를 다음과 같이 들려주었다.

“모 저명한 인텔리요 대학교수인 벗이 찾아와 하는 말이, 나는 전도관에 내 생명이라도 바칠 만큼 감격했소 하길래 그 원인을 물었더니 그 교수의 아들이 깡패로서 어떻게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버린 자식이었는데 전도관에 가서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종교에는 문외한이라고 자처하는 변 교수도 살아 있는 ‘인간 개조’의 실례에는 전폭적인 공감이 가는 모양이었다.

전도관의 생산 활동에 대하여 변 교수는 비단 가난을 극복한다는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신앙을 행동화 하는 것이므로 타 종교보다 진일보한 것이며 신앙운동이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은근한 선망을 표하였다.

“도대체 박 장로 그분의 설득력과 영도력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변 교수는 거듭 말하면서 “그분이 설교하는 것을 직접 듣지는 못하였으나 무성영화로 보기만 해도 열렬한 설교의 말이 귀에 들리는 듯 했다.”고 하였다.

덕소신앙촌 공장지대 모습(1962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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