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 감사의 신앙체험기

신앙체험기 추수감사절 특집
발행일 발행호수 2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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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안음전 승사, 김백덕 승사, 김금순 권사, 박양진 승사(왼쪽부터)

“이 길을 따르며 살아온 세월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저는 ‘기쁨’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천국을 향하는 길을 알았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평생토록 감사드리며 기쁨의 찬송을 불러도 한없이 부족할 뿐입니다.”(전삼록 승사 신앙체험기 中)
신앙체험기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기록이자 그 은혜 속에서 기쁘게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추수감사절을 보내며 수많은 체험담 중에서 기쁨과 감사의 이야기를 주제별로 간추려 보았습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살려 주셨습니다.”

제가 처음 하나님을 따라 나오게 된 동기는 6 · 25 전쟁 중에 잊을 수 없는 감사한 기억 때문입니다. 1·4 후퇴 때 피난을 떠난 저희 가족은 사람들이 화물 기차에 너나없이 오르는 모습을 봤습니다. 기차를 타고 부산에 가야 살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저희 가족도 기차 안에 억지로 짐과 리어카를 싣고 올라앉았습니다.

그때 키가 크고 귀하게 생기신 신사 분이 다가오시더니 “애기 어머니! 애기 어머니!” 하고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분은 “제 말을 들으세요. 기차에 있지 말고 내려오세요.” 하셨습니다. “누구신데 그러세요? 이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야 살 수 있다고 해서 탔어요. 이것도 싸움해 가면서 겨우 뚫고 들어왔어요.” 라고 했지만 그분은 “제 말을 좀 들으세요. 이 차 타면 안 됩니다. 안 돼요.” 하고 간곡히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그분은 기차 위로 올라오셔서 저희 아이들과 리어카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분과 헤어지고 걷다가 바로 뒤를 돌아다보았는데, 그새 어디로 가셨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부흥집회를 인도하시는 박 장로님을
뵙는 순간 전쟁 통에 우리 가족을
살려주셨던 분임을 깨닫고 크게 놀라

날이 금방 어두워져서 철로 옆의 빈 돼지우리 같은 곳에서 지친 몸을 쉬었는데 몇 시간 후 갑자기 폭격 소리가 들리더니 마을 방송이 나왔습니다. 저희가 타려고 했던 기차가 폭격을 맞아 기차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불에 타서 몰살됐다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밖에 나와 보니 멀리서 불타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순간 기차에서 내리라고 간곡하게 말씀하셨던 신사 분이 떠올라 ‘그분이 우리 식구를 살려 주셨구나!’ 하는 생각으로 얼마나 고맙고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 후 1955년 3월 남산에서 열린 부흥집회에 참여했을 때였습니다. 한 남자 분이 단상으로 걸어 나오셔서 그분을 쳐다보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쟁 통에 저희 가족 모두를 살려 주신 신사 분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집회를 인도하시는 박태선 장로님이셨습니다. 그분을 다시 뵙게 되니 얼마나 반가웠던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안음전 승사(신앙체험기 6집 수록)

“신앙촌 소비조합으로 기쁘게 살게 해 주셨습니다.”

제 나이 서른여섯 살 때 보증을 섰다가 집을 은행에 저당 잡히고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처지에 부딪혀 보지 않은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몹시 난감했습니다. 당시 소사신앙촌이 건설되어 각 공장에서 제품이 생산되고 있었는데, 고민 끝에 ‘신앙촌 제품을 판매해 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장사라고는 해 보지 않았지만 첫날 신앙촌 덧신을 들고 나갔을 때 몇 시간 만에 다 팔리는 것을 보니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고객이 늘어나면서 저는 1965년경 시내 중심가인 중앙동에 ‘시온센타’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다양하게 생산되는 신앙촌 제품을 여수까지 화물 열차에 싣고 왔으며, 특히 많은 사랑을 받았던 신앙촌 담요는 한 트럭씩 실어와 판매했습니다. 덕소신앙촌 시절에 소비조합에게 피아노를 상으로 주신 때가 있었는데, 저는 아홉 번 상을 받아 피아노를 여수의 각 제단에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신앙촌 소비조합을 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고 풍요롭게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원래 몸이 허약했던 저는 소비조합을 하며 하루 종일 바쁘게 다녀도 피곤한 줄 모르고 즐겁게 지냈습니다. 그런 저를 보고 손위 동서는 “자네가 원래 잘 웃지도 않고 말도 없던 사람인데, 전도관에 다니더니 웃기도 잘하고 말도 잘하네.”라고 했습니다. 또한 딸아이는 “엄마 사는 게 참 보기 좋아요.”라고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김백덕 승사(신앙체험기 376회 게재)

“병고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1959년 셋째 아들 개덕이가 네 살 때 일입니다. 애가 갑자기 열이 펄펄 끓고 온몸에 경련이 일어나서 영산포 중앙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뇌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뇌염 후유증으로 아이는 반신불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체를 전혀 움직이지 못해 대소변을 받아 내야 했고 팔이 덜덜 떨려 숟가락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가 평생 동안 반신불수로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저는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난 후 소사신앙촌으로 아이를 업고 가서 하나님께 안찰을 받게 되었습니다. 먼저 저에게 안수를 해 주셨는데 하나님의 손이 제 머리에 닿는 순간, 아이 때문에 슬프고 괴로웠던 마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음이 너무나 가벼워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이의 두 눈과 배를 안찰해 주셨고, 다음 날 한 번 더 안찰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안찰이 끝나자마자 아이가 “엄마 신발 사 주세요. 걸어갈래요.” 하더니 거짓말처럼 제 눈앞에서 걷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이를 붙잡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 광경을 옆에서 계속 봤던 박정일 장로님은 놀라워서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아들은 새 신을 신고는 방긋방긋 웃으며 걸어갔습니다.

뇌염으로 반신불수가 된 아이
하나님께 안찰을 받자마자
거짓말처럼 눈앞에서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저는 아이를 무릎 위에 앉혔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하나님께서 오셔서 아이 다리에 “쉭, 쉭” 하시며 축복해 주시고 안찰을 해 주시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렇게 영산포역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해서 영적으로 안찰해 주셨습니다.

영산포역에는 아이들의 큰고모와 큰어머니가 저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두 분은 전도관에 다니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제가 아들에게 안찰을 받게 한 것도 몹시 못마땅하셨고, 그래서 그날 저에게 큰소리를 내려고 단단히 벼르고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 손을 잡고 걸어오는 아들을 보고 두 분은 멍한 표정이 되어 할 말을 잃었습니다. 제가 “안찰 받고 나았어요.” 하고 말했더니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느냐며 놀라워했고 아이의 큰고모는 좋아서 덩실덩실 춤까지 추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천진난만하게 뛰어다녔습니다. 새 신을 신고 좋아하던 아들은 오십한 살인 지금까지도 건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은혜에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그저 눈물만 흐를 뿐입니다.
김금순 권사(신앙체험기 9집 수록)

“길을 잃은 저에게 참길을 다시 찾게 해 주셨습니다.”

저는 중학생 시절 한강모래사장 집회에 참석한 후 이만제단에 다니며 특별전도대원으로 활동했고 소사신앙촌 메리야스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해군에 입대하게 되었는데 제대 후 특별한 사유가 없이 신앙생활을 못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1984년도가 되기까지 25년간을 세상에 얽매여 살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이렇게 생활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는 광주에 살면서 전남 장성에 있는 한국 고로시멘트에 이사로 있으면서 기도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회사 안에 기도처까지 만들어 직장 동료와 함께 일요일에는 예배도 드렸습니다. 그렇게 3년을 지냈는데, 기도 끝 부분은 항상 ‘감람나무를 통해 이루어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전도관에 다닐 때 들었던 ‘박태선 장로님은 성경상의 감람나무’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저는 성경을 요한계시록부터 창세기까지 거꾸로 읽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창세기에 가인이 아벨을 돌멩이로 쳐 죽이고 많은 사람이 가인을 핍박한다는 내용에서 ‘당시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네 사람밖에는 없는데 가인을 핍박했다는 많은 사람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그러면 성경의 오류인가?’ 하는 의문이 생겨나 기성교인과 목사들에게 물어봤지만 합당한 대답이 없어 답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전도관에서는 그 해답을 얻겠다는 생각을 하고 광주전도관을 소개받아 찾아갔습니다.

25년 간 세상에 얽매어 살다가
성경 내용 궁금해 전도관 찾아가
하나님 말씀 읽으며 은혜 체험도

천부교 전도관의 역사에 대해 당시 광주 관장님께 들었습니다. 관장님은 1980년 하나님께서 예수의 정체를 밝히셨던 말씀도 전해 주었는데 저는 예수를 부인하는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 이후는 무슨 말을 나눴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고 머리가 띵하며 빙빙 도는 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론 괜히 전도관을 찾았구나 후회스럽고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도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밥도 못 먹고 직장에서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머리는 계속 빙빙 돌고 복잡하였으며, 몸은 야윌 대로 야위어 주위 사람들이 병들었냐고 걱정했습니다.

6일째 되던 날 토요일인데 전에 관장님이 주셨던 신앙신보가 보고 싶었습니다. 펼쳐 든 부분이 하나님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읽으면 읽을수록 초창기 때와 변함없이 “죄짓지 말라.”는 박태선 장로님 아니, 우리 하나님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고, 제가 그토록 뵙고 싶었던 제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감람나무가 여기 계시는데, 예수가 구세주가 아니든 그분께서 하나님이시든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순간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초창기 때와 같은 생수가 통하는 은혜가 연결되었습니다. 또 복잡했던 머리가 시원해지며 속이 뻥 뚫리는 체험을 했습니다. 저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전화벨 소리가 울려 받아 보니 관장님이었습니다. “내일 예배드리러 오시죠?” 하기에 저는 “예!” 하며 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알지 못해 방황하던 저를 붙들어 주시고 다시금 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신 은혜에 지금도 늘 감사 기도를 드립니다.
박양진 승사(신앙체험기 3집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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