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천막집회의 현장을 가다(8) 인천 동산운동장집회

인천집회(1955.9.16~9.22.)
발행일 발행호수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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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8월의 폭서에 잠시 중단되었던 박태선장로의 야외집회가 재개되는 첫 집회로 모인 인천시민 심령 대부흥회는 그간 세간에서 받은 비난과 폐풍을 일소하기 위하여 일체 안찰로서의 치병(治病)을 중지하고 다만 환자와 시선을 마주침으로 약 3백명의 쾌유자가 나타났다.”(신앙신보 1955.9.28.)
 
1955년 3월말 4월초에 시작한 남산집회를 필두로 하나님의 집회는 전국각지에서 구름같이 사람들을 모으며 서울 영등포집회, 안동집회, 부산공설운동장집회, 대구집회, 용산군인교회집회, 7월 초의 한강 모래사장집회까지 숨가쁘게 달려왔다. 노천에서 천막을 치고 열었던 집회였던 만큼 한강집회 이후 약 두 달간 한여름의 더위를 피해 잠시 집회가 중단되었었다. 그리고 9월 16일 하나님의 집회는 인천에서 재개된다. 16일 저녁집회를 시작으로 닷새간 예정되었던 집회는 몰려드는 사람들로 이틀을 더 연장하였다.
 
넓디 넓은 집회장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바다에 물들어 온 것 같았어요.” 당시에 집회장을 찾았던 이인순권사(86.인천교회)는 그때의 모습을 그렇게 표현했다.
 
집회가 열렸던 동산중학교 운동장을 지금은 동산중학교와 동산고등학교가 같이 쓰고 있다. 집회가 열렸던 기간중 하루인 20일 당시의 자리를 찾았다. 올해는 짧은 추석연휴로 인해 20일까지 쉬어 학생들은 등교를 하지 않았다. 다만 야구부 학생들이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운동장이 어찌나 큰지 두 팀이 각각 연습을 하고 있었다.
 
동산중학교는 1957년 5월에 운동장 확장공사를 마쳤는데 당시에 정비된 운동장의 크기가 10,760평이다. 이 운동장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가늠이 안되는 분들을 위해 참고로 동대문 야구장의 경기장 면적이 5,449평, 잠실 야구장 경기장 면적은 7,965평이다.
 
불기 시작하는 바람  하나님의 집회에 몰리는 사람들을 보고 놀란 기성교계에선 하나님께서 내리는 이슬성신의 은혜와 향취의 은혜를 놓고 은혜를 오감으로 체험케하는 것은 이단이라며 치기 시작하는 것이 그해 7월부터였다.
 
그러나 인천집회 당시의 사진을 보면 목사들은 단상 위에 앉아있고 교회 목사가 하나님의 집회에 갈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당시에 인천 내리감리교회에 다녔던 고 오병예권사는 222회 체험기에서 “어느 일요일 예배시간에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박태선장로님의 집회에 은혜가 참 많이 내린다고 하며 그 분이 인천 동산중학교에서 집회를 하시니 참석해 보라고 광고를 하셨습니다. 올케언니가 와서 여러번 말 할 때는 예사로 생각했는데 교회 목사님까지 광고를 하시니 교회 교인 여러명과 함께 참석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환자들이 몰려오다  하나님의 집회에서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수많은 환자들을 하나님의 집회로 이끌었고 또 그자리에서 안수를 받거나 예배를 드리는 중 은혜를 받고 병이 낫는 경우가 허다했다.
 
당시의 분위기를 의식한 듯한 신앙신보의 보도(그간 세간에서 받은 비난과 폐풍을 일소하기 위하여 일체 안찰로서의 치병을 중지하고 다만 환자와 시선을 마주침으로 약 3백명의 쾌유자가 나타났다.)도 있었지만 인천집회에선 “하나님께서 찬송을 인도하신 후 ‘병자들은 일어나라’ 하고 외치시니 옆에 있던 여자아이가 갑자기 다리를 잡고 울면서 오그라졌던 다리가 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찬송을 부르실 때 전기오는 것처럼 후르르 떨리더니 곧 다리가 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바로 옆자리에 있던 여자아이의 다리가 펴진 것을 직접 본 이인순권사의 말이다.  
 
채은주권사(79.인천교회)는 “그때 하나나님께서는 ‘환자들이 여기서 다 나으니 의사들한테 큰일 났는데요.’ 하시며 우스운 말씀도 하셨어요.”라고 했다.
 
집회를 알리는 포스터를 보고 집회에 참석한 채권사는 은혜를 받고나니 집에 계신 어머니와 자녀들도 참석시켜 은혜를 받게 하겠다는 생각에 소래까지 달려갔다고 한다. “30리 길인 소래에 도착해보니 채 1시간 30분이 안 걸렸었어요. 지금도 차로 가면 한 시간정도 걸리는데 그 때 아마 날라간 것 같아요.”
 
집에 와보니 어머니와 자녀들은 집회장소로 떠난 뒤여서 어쩔수 없이 집에 남게 되었다는 채권사는 집회에 다 참석치 못해 안타까웠는데 일주일 뒤에 대구에서 집회
(1955.9.30.~10.6.)를 하신다기에 밤기차를 타고 대구에 내려가 1주일을 꼬박 참석했다고 한다. “집회기간 내내 안 먹어도 배도 안 고프고 잠은 기도하다가 엎드려 잠깐 조는 정도였는데도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어요.”라고 했다.
송혜영기자news-song@theweek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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