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시복(諡福)
천주교가 ‘살인자’로 매도했던 안중근 의사를 ‘시복’ 하겠다고 나섰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사살했을 때 당시 조선 천주교 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는 “안중근은 가톨릭 신자가 아니다”라고 부정을 하는가 하면 안중근이 가톨릭 신자라고 보도한 언론 기관에 항의까지 하였다. 그는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종부성사’를 거절했을 뿐 아니라 끊임없이 안중근 의사에게 고해성사를 하여 살인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라고 압박을 가하여 동양 평화를 위해 이토를 제거했다는 안중근 의사에게 이중의 고통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그러던 천주교가 슬그머니 “‘살인’ 에 대한 해석도 바뀌었고 성경에 이방인 장수의 목을 벤 기록도 있고 시성된 프랑스의 잔 다르크 사례도 있다”고 하면서 안중근을 복권시키자고 한 것인데 일부에서는 천주교가 일제 치하의 친일 행위에 대한 사과 한마디 없이 일제의 원흉을 처단한 안 의사 복권 운운 하는 것은 몰염치한 행동이라고 규탄하는 의견도 나왔다고 한다.
일제 치하에서의 천주교의 역사를 보면 천주교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3.1운동 당시 천주교 지도부는 3.1운동을 한결같이 단죄했고 3.1운동에 가톨릭이 참여하지 않은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자랑스러워했다. 또 1936년 로마 교황청은 대표적인 우상 숭배로 지탄되는 신사참배에 대해 천주교 신자들에게 허가하는 훈령을 내렸고 적극적으로 권장하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당시 조선 천주교를 대표하던 노기남 주교는 매월 1일마다 남산에 있는 조선신궁으로 참배하러 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노기남은 천주교를 대표하여 ‘황국신민’으로서 황실의 안녕을 빌고 일제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는가 하면 일제의 창씨개명, 조선청년 징병 옹호, 내선일체 방침의 적극 지지에 앞장섰다. 그러다가 8.15해방이 되자 친미 반공주의자로 발빠른 변신을 하여 과연 변신의 귀재라는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