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복 입은 돼지’
돼지 한 마리가 사제복을 닮은 옷을 입고 촛불을 든 채 서 있다. 벽산 아트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최현자 작가의 사실주의 전시 작품이다. 작가는 “진정으로 세계를 사실적으로 파악하려면 겉만 묘사하는 사실주의로는 부족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잡아내는 환상적 사실주의를 통해 접근해야 한다. 환상은 세계의 숨겨진 이면의 신비를 포착할 수 있는 상상력”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물에 대한 사실, 즉 진실을 포착하려면 눈에 보이는 것 이외의 이면도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사실주의(寫實主義, Realism) 화풍은 실재하는 현실을 주관적으로 변형 왜곡하지 않고 현실을 객관적으로 충실하게 반영하고자 하는 예술인들의 노력 속에서 나왔다. 더 나아가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화풍을 만들어낸 일군의 네덜란드 화가들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충실하게 반영하는 것에만 머물지 않고 눈으로 본 것 이상의 무엇인가를 화폭에 담고자 했다.
최현자 화가는 “현실과 비현실이 서로 침투하고 섞이면서 타성적으로 생각해 온 이 세계와 인간에 대한 기존 관념을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 보는 전시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 사제복을 입은 사람을 보고 작가의 예리한 사실주의 감각은 그 내면의 세계까지 투시한 것이다. 사제복은 상식으로는 거룩함의 표상이지만, 사실주의 화가에게 그 내면적 진실은 돼지로 그려졌다. 사제복을 입은 신부들이 미군 철수 데모, 제주 해군 기지 건설 반대에 앞장 서는 바람에 “데모를 하려면 사제복을 벗으라”라고 비판의 대상이 된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돼지가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세계 곳곳에서 사제들의 성추문이 잇따르고 있으니 돼지 대신 다음에는 무엇이 등장할 지 관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