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종교 탐구 <8> 고고학적인 발견과 성경에 대하여
세계 종교 탐구 <8>흔히 고고학자라고 하면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주인공처럼 흥미진진한 모험과 고대 세계의 탐험에 몸을 던지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자료1>
전설적인 유물을 찾아내고 미지의 문자를 해독하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영화 스토리는 고고학이 가진 매력과 맞아떨어지기도 한다. 고고학 태동기라 할 수 있는 1800년대 유럽에서는 모험심에 불타는 고고학자들이 성경에 등장하는 값진 유물을 찾아내면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고 이것은 학자들 간의 불꽃 튀는 경쟁을 가져왔다. 그 발굴과 경쟁의 무대는 다름 아닌 메소포타미아 지역이었다.
메소포타미아(Μεσοποταμία, 두 강 사이에 있는 도시라는 뜻)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오늘날의 이라크 지역을 가리키던 이름으로,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땅을 의미한다. 이곳은 기독교 국가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녔는데, 성경의 유명한 도시들이 위치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받는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우르라는 도시에서 태어났으며, 성경에 20회 이상 등장하는 도시 니느웨(니네베)는 메소포타미아 북부에 있었다. 니느웨는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로 화려한 문명을 꽃피운 도시였으며 선지자 요나가 전도 활동을 펼친 곳이었다. 또 성경에서 300회 가까이 언급되며 퇴폐와 타락의 대명사로 묘사되는 도시 바빌론은 메소포타미아 중부에 있었다. 한마디로 메소포타미아는 성경의 도시들이 세워지고 멸망했던 역사의 무대라고 할 만한 곳이었다.<자료2> 그런 땅에 유럽의 기독교인 고고학자들이 발을 디딘 것은 180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당시만 해도 메소포타미아는 접근하기 힘든 지역이었다. 유럽에서 메소포타미아에 가려면 시리아 사막을 가로지르거나 티그리스 강에서 배를 타고 가야 했는데, 사막과 강은 둘 다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위험한 경로였다. 과거 메소포타미아는 비옥한 토지와 발달한 문명을 가진 곳이었지만 수천 년의 시간 동안 토지는 황폐해지고 문명의 흔적은 흙먼지와 모래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기독교인 고고학자들은 이 황무지에 성경의 보물이 묻혀 있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메소포타미아에 도착했다. 고고학이 태동하던 초기에는 상인과 의사, 군인 등 여러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정열적으로 고고학 발굴에 뛰어들었는데, 그중 프랑스인 외교관 폴 에밀 보타(1802~1870)가 있었다.<자료3>
1840년 이라크 모술의 영사관에서 근무하게 된 보타는 일과 후 모술 근교를 혼자서 헤매고 다녔다. 토착민이 사는 동네에 가서 한 집 한 집 문을 두드리며 골동품과 옛날 도자기, 꽃병 등을 구입하던 그에게 기묘하게 솟아오른 둔덕이 눈길을 끌었다. 이집트에서 7년 동안 근무하며 여러 유적지와 발굴 현장을 봤던 그는 둔덕 아래 유물이 묻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구릉을 직접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1년을 파헤쳐도 깨진 지붕 조각이나 파손된 조각상만 보이자 아무리 열정이 넘치는 보타라 해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토착민이 찾아와 “제가 사는 코르사바드로 가십시다. 당신이 찾는 것이 널려 있습니다.” 하고 떠벌렸을 때 보타는 큰 기대 없이 인부들을 딸려 보냈다. 그런데 온갖 유물이 가득하다는 보고를 받고 보타가 급히 달려갔을 때 놀랍게도 거대한 황소 석상이 그를 맞이했다. 날개 달린 황소의 몸에 사람의 얼굴을 한 조각상은 그 기괴한 형태가 믿기지 않을 만큼 섬세한 솜씨로 표현된 작품이었다. 에밀 보타는 천신만고 끝에 수십 톤에 달하는 황소 석상을 프랑스 파리까지 운반하게 되었다.
1847년 5월 이 황소상이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됐을 때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관람객을 내려다보는 반인반수의 모습은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고,<자료4> 이 모습을 보고 성경의 ‘그룹들(히브리어로 케루빔)’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창세기의 ‘생명나무를 지키는 그룹들’을 비롯해 성경에 그룹에 대한 구절이 70회 이상 등장하는데 유럽인들은 그룹들이 날개 달린 수호천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날개 달린 괴이한 모습으로 두려움을 안겨주는 황소 석상을 보자 그것이 그룹들이라 여겼던 것이다.(볼프강 코른, 『과거를 추적하는 수사관, 고고학자』, 주니어 김영사, 2008.,p.60.)
황소 석상이 진짜 수호천사인지, 성경 상의 그룹들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성경 속의 보물을 찾아냈다는 소문이 퍼지자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화제가 되었고 발굴자에게 드높은 명성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불꽃 튀는 발굴 경쟁으로 이어졌다.
에밀 보타의 성공에 자극받은 고고학자들이 발굴에 뛰어들면서 수십 개의 황소 석상뿐 아니라 니느웨의 궁전과 엄청난 양의 점토판을 찾아내게 되었다. 그들은 오스틴 헨리 레이어드를 비롯한 영국의 발굴팀이었다.
그들이 발굴한 점토판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정치와 경제, 종교와 생활을 쐐기 문자로 상세히 기록한 것이었고, 영국의 발굴팀은 2만 5천 점에 달하는 점토판을 영국 국립 박물관으로 운반했다. 이로써 영국 국립 박물관은 메소포타미아 연구의 보고(寶庫)라는 명성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점토판 중에는 성경 상의 노아 홍수와 똑같은 대홍수 이야기가 기록된 ‘길가메시 서사시’도 있었다. 홍수 이야기가 쓰인 길가메시 점토판이 해독되자 유럽인들은 열광하게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점토판의 홍수 이야기가 당연히 성경의 노아 홍수 이야기라고 확신했다. 성경이 유일한 신의 계시라고 믿었기 때문에 홍수 이야기가 오직 성경에만 있으며, 길가메시 점토판은 당연히 노아 홍수를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사고방식은 일대 반전(反轉)을 맞게 되었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서기전 2100년대에 기록되어 서기전 400년대에 쓰인 성경보다 1,700년 앞섰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길가메시 서사시는 대홍수를 포함해 다채로운 모험을 묘사한 인류 최초의 서사시라는 것도 밝혀지게 되었다. 말하자면 성경의 노아 홍수 이야기가 점토판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먼저 기록돼 있던 길가메시 서사시 중에 일부가 성경에 들어간 것이었다. 이러한 반전은 점토판이 해독될 때마다 일어났는데, 길가메시 서사시를 처음 해독했던 조지 스미스가 또다른 점토판을 찾아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조지 스미스는 길가메시 서사시를 해독하면서 직접 니느웨를 방문해 추가적인 발굴 작업을 이어갔는데, 뜻밖에도 성경 창세기와 유사한 점토판을 발견하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점토판을 영국으로 가지고 돌아와 연구하면서 언론을 통해
“제 연구가 마무리되면 창조 이야기에 대한 전체 설명과 번역을 출간하겠습니다.”라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데일리 텔레그래프 1875년 3월 4일자)
<자료5> 그러나 그는 니느웨 원정에서 열병에 걸려 연구를 마무리하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사후에도 점토판 해독은 계속되었고 마침내 그것이 ‘에누마 엘리쉬’라는 창조 서사시임이 밝혀졌다. 그리고 이것이 성경보다 700년 이상 앞서서 기록됐으며 바빌로니아의 최고 신이었던
‘마르둑’이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하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먼저 기록된 ‘에누마 엘리쉬’가 변형되어 성경 속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발굴이 계속되면서 에누마 엘리쉬 외에도 쐐기 문자로 기록된 다양한 점토판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창조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는 작품을 몇 가지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수메르의 창세 이야기’라 불리는 점토판이 있다. 서기전 2600년대에 기록된 이 점토판에서 눈에 띄는 것은 신이 창조를 시작할 때 먼저 빛을 창조해 하늘을 밝게 한다는 점이다. 이는 성경 창세기와 동일한 서술이라 할 수 있다.
『하늘 신이 하늘을 밝게 하였으며』- 수메르의 창세 이야기 점토판 1행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거늘』- 성경 창세기 1장 3절
창조의 과정 중에 빛을 가장 먼저 창조하는 것은 앞서 소개한 ‘에누마 엘리쉬’도 마찬가지였다. 뿐만 아니라 에누마 엘리쉬에서 가장 마지막에 인간을 창조하는 것도 성경과 같은 순서이다.
특히 에누마 엘리쉬는 명명(命名)하는 행위를 중요시하여 신이 이름을 붙이고 부르는 행위가 곧 창조라고 한다. 신이 사물의 이름을 부르면 그 사물이 창조되었다는 것인데, 이는 성경에서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거늘” 하는 구절처럼 신이 빛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명령을 내리면 바로 창조가 되었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자료6>
성경 창세기는 신이 인간을 창조한 후 에덴동산에 살게 했으며, 세상에 대홍수를 내리고 그 홍수에서 살아남은 노아의 이야기로 이어지는데, 이러한 구조는 메소포타미아의 또 다른 이야기인 ‘지우수드라 홍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
서기전 2600년대에 기록된 ‘지우수드라 홍수 이야기’는 고대 바빌로니아의 학교에서 가르쳤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었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노아 홍수와 동일한 대홍수 이야기가 포함된 것이 특징이라면, ‘지우수드라 홍수 이야기’는 인간을 창조하는 단계부터 대홍수까지 성경의 이야기 순서와 동일한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중에서 창조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면, 인간 창조를 설명하는 부분에 에덴이라는 단어가 눈길을 끈다. 지우수드라 이야기에서 인간이 창조된 후 뱀들이 나타나고 들짐승과 동물들이 에덴에서 서로 즐겁게 놀았다고 하는데(지우수드라 홍수 이야기 점토판 47행~51행), 이는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들짐승과 동물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고 뱀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과 연결된다.(성경 창세기 2장~3장) 두 이야기에서 ‘에덴’이 태초에 인간이 살았던 곳이자 온갖 동물들이 평화롭게 지냈던 장소로 묘사된다는 공통점이 있다.<자료7>
또 눈에 띄는 것은 숨과 생명이라는 단어이다. 수메르어로 쓰여진 지우수드라 이야기에서 신이 사람에게 ‘숨을 주고 생명을 주었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다른 수메르 문학에서도 여러 번 등장하는 표현으로 수메르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숙어라고 할 수 있다.(지우수드라 홍수 이야기 점토판 257행) ‘숨을 주고 생명을 주었다.’는 숙어가 성경 창세기에 똑같이 나타나는데 신이 아담을 창조할 때 숨을 주고 생명을 주었다고 하는 것이다.
(성경 창세기 2장 7절)
성경보다 1200년 앞서 서기전 1600년대에 기록된 점토판으로 ‘아트라하시스 서사시’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인간 창조를 서술하는 부분에서 흙이라는 단어에 주목하게 된다. 신이 흙덩어리를 떼어 사람을 만드는 장면이 등장하는데,(아트라하시스 첫 번째 점토판 255행~261행) 이는 성경과 동일하기 때문이다.(성경 창세기 2장 7절) 신이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원래 있는 재료로 인간을 만들었으며 흙이라는 재료까지 동일한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소개한 점토판 중에 ‘지우수드라 이야기’와 ‘아트라하시스 서사시’는 공통점이 있다. 점토판의 일부가 파손되어 사라졌다는 것이다. 점토판은 그 특성상 발견과 운반 과정에서 깨어지는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에 연구자들은 조각 난 점토판을 맞추어 가며 해독 작업을 했다. 그러나 두 이야기가 기록된 점토판은 중요한 부분이 부서져서 아예 읽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지우수드라 점토판은 3분의 2 정도가 파손되어 완전히 사라졌다. 지우수드라 이야기는 지금까지 발견된 메소포타미아의 모든 문학 작품 중에서 성경 창세기와 순서와 구조가 똑같은 유일한 작품인데 그 점토판이 부서지고 사라져서 세밀한 내용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아트라하시스 서사시 점토판도 58행이 파손되어 사라졌다. 메소포타미아 문헌 연구가인 헨리에타 맥컬의 표현을 빌리면 “아마도 성경과 비교하는 것이 매력적일 부분만” 공백이 되어 없어졌다고 한다.(헨리에타 맥컬,『메소포타미아 신화』, 범우사, 1999., p.109.) 독일의 신문 기자였던 C.W.쎄람은 “1800년대 후반 방대한 점토판이 발굴됐지만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내용 상당수가 최근까지도 출간되지 않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C.W.쎄람, 『몽상과 매혹의 고고학』, 랜덤하우스, 2008., p.244.) 두 이야기는 그나마 남은 점토판에서도 성경과 동일한 부분이 두드러지는데, 온전한 점토판이 있었다면 어떤 결론을 이끌어 냈을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수천 년 흙더미에 묻혀 있던 점토판은 기독교 고고학자들에 의해 세상에 나와 빛을 보게 됐지만, 정작 학자들이 발표하고 출간하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일례로, 1889년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도시인 니푸르에서는 23,000개에 이르는 점토판이 발굴됐지만 그중 대부분이 발표되지 않은 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니푸르 발굴을 진두지휘한 사람은 성경 전문가이자 철저한 기독교인 피터스 목사였는데, 이는 발굴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점토판을 발굴한 사람도, 점토판을 해독한 사람도 모두 성경의 내용을 증명하겠다는 열망을 가진 기독교인이었고, 점토판이 밝혀 주는 불편한 진실을 가장 처음 마주하게 된 사람도 기독교인이었다. 메소포타미아의 흙더미에서 나온 점토판들은 이제 미국과 영국, 프랑스와 독일 등 기독교 국가들의 수장고에 잠들어 있다.
흔히 고고학자를 일컬어 과거를 추적하는 수사관이라고 한다. 수사관이 현장에 남겨진 증거를 확보해 범행 과정을 추적하는 것처럼 고고학자는 수천 년 전에 남겨진 증거를 통해 아득한 과거의 진실을 추적하게 된다. 수사관과 고고학자에게는 증거를 찾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반대로 범인에게는 증거를 인멸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박하게 된다.
지금부터 200여 년 전, 고고학자들은 성경이 신의 유일한 계시라는 믿음으로 첫발을 내딛었지만 이는 반전을 맞았다. 성경이 지난 시대의 기록을 이어받은 인간의 책에 불과하다는 것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론이었다. 이제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점토판이 사라지거나 파괴되거나 더 이상 출간되지 않는다면 이 또한 새로운 반전이 될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유물의 발굴 장면
# 수십 개의 황소 석상이 발견되다.
에밀 보타의 성공에 자극받은 고고학자들이 메소포타미아 발굴에 뛰어들면서 수십개의 황소 석상이 발견 되었다. 사진은 코르사바드 사르곤II 궁전에서 발견된 황소 석상의 발굴 모습이다. (출처: http://trenka-dalton.info/work/2008-city-of-commerce-2/, https://www.uchicagoartsblog.art/)
# 거대한 석상을 마주치다.
1849년 영국의 오스틴 헨리 레이어드 발굴팀은 님루드 궁전에서 거대한 석상을 발견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이를 더 파헤치자 거대한 황소 석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헨리 레이어드는 이 장면을 자신의 저서
(『니네베와 그 유적들』, 1867., p.49.)에 삽화로 남겼다. (출처: https://biblicalarchaeology.org.uk/)
# 엄청난 양의 유물을 운반하다.
코르사바드에서 유물을 옮기는 모습과 1855년 티그리스 강에서 뗏목으로 유물을 운반하는 모습으로, 1867년
Place Victor著『니네베와 아시리아』中 43, 44페이지의 삽화이다. (출처: https://digitalcollections.nypl.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