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를 직접 듣고 보니 전도관은 이단이 아니라 참길이네

황순희 관장(3) / 삼천포 교회
발행일 발행호수 2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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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황순희 관장. 삼천포 교회

그때부터 이모님과 저는 감리교회에 가지 않고 매주 일요일 이모님 댁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감리교회에 발길을 끊어 버리자 목사와 교인들이 저희 집으로 몰려와 전도관에 대해 이단 운운하며 갖은 비방을 늘어놓았습니다. 가족들은 그 이야기만 듣고 전도관을 반대했지만 저는 은혜를 받고 참길을 깨달은 이상 뜻을 굽힐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저희 외갓집에서는 외삼촌이 폐결핵을 앓아서 온 가족이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도 낫지 않는 데다가 몇 년 전에 큰외삼촌이 폐결핵으로 돌아가셨기에 몹시 염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모님의 권유로 외삼촌이 생명물을 마시고 폐결핵이 깨끗이 나은 것이었습니다. 그때 온 가족이 기뻐했던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으며 외삼촌뿐 아니라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외숙모까지 전도되어 외갓집 마당에 임시로 천막 제단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부지를 마련해 흙벽돌을 쌓아 올려서 삼천포전도관이 정식으로 지어졌습니다.

그렇게 외갓집 식구들이 전도관에 다니게 되었으나 유독 이모부는 이모님이 제단에 다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모님이 허리를 크게 다쳐서 꼼짝도 못 하고 앓아누웠을 때 이모님은 병원에 가라는 이모부의 권유를 마다하고 생명물과 축복 캐러멜만 먹으면서 깨끗이 낫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이모부도 무척 놀라워하셨습니다. 그 후 1958년에 이모부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고 서울에 가셨다가 뇌졸중으로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그때 언어장애가 와서 말을 거의 못 하시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셨는데, 이모부가 힘겹게 입술을 움직여서 아들(저의 이종사촌 동생)에게 이야기하기를 “박 목사한테 가자.”라고 하셨답니다. ‘박 목사’는 바로 ‘박태선 장로님’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모부는 이모가 생명물과 축복 캐러멜로 허리 병이 나았던 것을 기억하고는 하나님께 가면 병이 나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습니다. 마침 하나님께서 청계천의 어느 사무실에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종 동생이 이모부를 모셔 가서 안찰을 받았는데, 그때 있었던 일을 이종 동생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이모님이 허리를 다쳐 꼼짝없이 누웠는데
생명물과 축복 캐러멜을 먹고 깨끗이 낫자
전도관에 다니는 걸 반대하던 이모부가
크게 놀라 하나님을 믿게 돼

눈안찰을 받을 때 이모부는 하나님의 손이 채 닿기도 전에 고함을 치며 발버둥을 쳐서 옆에 있던 사람들이 팔다리를 붙들어야 했습니다. 이종 동생은 평소에 자기 아버지의 위엄 있는 모습만 보다가 안찰을 받을 때 안절부절못하는 아버지를 보고 굉장히 놀랐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종 동생도 안찰을 받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손이 눈에 닿는 순간 그만 까무러치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는 ‘나를 어떻게 까무러치게 했을까? 이건 분명히 마술을 부리는 것이다.’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안찰을 받고 나서 아버지가 정상적으로 말씀하시고 제대로 걷는 것을 보고 이종 동생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다음 날도 이모부와 이종 동생이 눈안찰을 받게 되었는데, 그때 이종 동생은 극심한 통증을 겨우겨우 참으며 안찰을 받고 나자 자신도 모르게 기도를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지금까지 마음대로 살아온 저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드리는 순간, 불덩어리가 확 하고 떨어진 것처럼 온몸이 뜨거워졌다면서 이종 동생은 몹시 신기해했습니다. 그렇게 안찰을 받고 건강을 되찾은 이모부는 삼천포전도관에 열심히 다니셨습니다. 전직 국회의원이자 삼천포 중 · 고등학교의 설립자인 이모부가 하나님께 안찰을 받고 병이 나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전도관에 대해 관심을 보이며 전도가 되기도 했습니다.

국회의원 낙선한 후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모부는 언어장애에 보행장애까지 와
하나님께 가서 안찰을 받은 후
정상적으로 말하고 제대로 걷게 돼

제가 삼천포제단에 계속 다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당시 삼천포 인근의 사천제단에 다니시는 권사님이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원래 권사님은 아들과 함께 사천에 있는 감리교회에 열심히 다니셨는데, 교회 목사가 “삼천포에서 이화여대를 다니고 고등교육까지 받은 사람이 전도관에 미혹되었다.” 하며 절대 전도관에 가지 말고 조심하라며 몇 번씩이나 당부했다고 했습니다. 그 설교를 들은 아들은 오히려 “전도관이 어떤 곳인지 알아봐야겠다.” 하며 사천전도관을 찾아가게 되었고, “직접 말씀을 듣고 보니 전도관은 이단이 아니라 참길”이라고 하여 권사님도 같이 사천전도관에 다니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전도사 수강을 받고 전도관의 전도사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스물세 살에 결혼하여 아이들을 키우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아이들의 병이 낫는 것을 종종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저희 작은딸이 두 살일 때 아이의 한쪽 눈이 어린애 주먹보다 조금 크게 부어오른 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민간요법으로 돼지 쓸개와 산초 기름을 발라 보라고 하셨지만, 그날 교인들 집에 심방을 가기로 했던 저는 심방예배에 아이를 데려가면 나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딸아이를 업고 갔습니다. 첫 번째 집에서 예배드릴 때 열이 오르고 자꾸만 보채던 딸아이는 두 번째 집에서 찬송을 부를 때는 제 옆에 앉아서 작은 손으로 손뼉을 치며 찬송을 부르는 시늉을 했습니다. 그렇게 40분 정도 예배를 드리는 동안 방 안 가득 향취가 진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아이의 눈을 보니 어느새 부기가 다 내려서 언제 부었던가 싶을 정도로 깨끗이 나아 있었습니다. 아이를 업고 집에 돌아오니 아버님께서 아이를 보시고는 “아니, 다 나았네!” 하며 무척 놀라워하셨습니다.

심방예배에 데리고 간 딸아이는
함께 손뼉을 치며 찬송을 하는데
예배시간 내내 방안 가득 향취가 진동하며
딸아이의 병은 깨끗하게 나아

그 후 저는 1963년에 소사신앙촌으로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활동적으로 일하고 싶었던 저는 ‘신앙촌 소비조합을 할까? 학교 선생님을 할까? 그렇지 않으면 오빠가 운영하는 회사에 취직을 할까?’ 하며 고민을 했습니다. 그때 신앙촌 제품을 전하는 소비조합이 되는 것이 좋겠다는 관장님의 권유를 받고 저는 ‘소비조합으로 일하는 것이 가장 보람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신앙촌 소비조합으로 활동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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