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전도관 개관집회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게 돼

<신앙체험기 514회> 노량진교회 황현순 권사 1편
발행일 발행호수 2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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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난 저는 10살 무렵 6.25 전쟁을 겪었습니다. 제가 사는 마을은 접전지역이 아니어서 피난을 가지는 않았지만, 전쟁의 긴장감 속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귀가 터질 듯한 포격 소리와 총성이 들리는 날에는 마을 전체가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면 저는 덜덜 떨며 화장실에 들어가 몸을 한껏 웅크린 채 “하나님, 제발 살려주세요”하고 울며 기도 했습니다.

그때의 간절한 마음을 계기로 하나님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동네에 있는 교회에도 가보았지만 몇 번 가다가 흥미를 잃었습니다.

제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저희 가족은 목포로 이사를 갔습니다. 하루는 고향인 나주에서 친하게 지냈던 영숙이가 저희 집에 찾아와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님 집회에 가보자고 하였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찾고 싶다는 마음을 늘 간직하고 있었기에 영숙이와 함께 목포전도관 개관집회(1957.2.25.)에 참석하였습니다.

목포전도관에 도착하니 예배는 이미 시작된 상태였고, 저와 영숙이는 빼곡하게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가까스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찬송가를 잘 몰랐던 저는 박 장로님께서 인도하시는 찬송을 어설프게 따라 부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마음 깊은 곳에서 기쁨이 솟아나더니 말할 수 없이 즐거운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몸이 가벼워지면서 마치 앉은 자리에서 하늘로 붕붕 떠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너무 신기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떤 반응인지 궁금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다들 찬송을 부르는 데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은혜인 줄도 몰랐지만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기쁨에 저는 박태선 장로님이 무척 대단하신 분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집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시내 곳곳의 벽과 전봇대에 붙어있는 박태선 장로님 포스터가 달리 보이면서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날 이후로 전도관에 꾸준히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목포전도관 개관집회에서 찬송을 부르던 중
마음에 기쁨이 솟아나더니 몸이 가벼워지면서 하늘로 떠오르는 느낌 들어

집회에 다녀온 다음 날부터 전도관에 가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날 느꼈던 기쁨을 친구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어서 친구 네 명을 초대해 함께 목포전도관으로 향했습니다. 친구들과 같이 교회에 간다고 생각하니 어찌나 기쁘던지 찬송이 입에서 절로 흘러나왔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너무나 향기로운 냄새가 코앞을 스치면서, 점점 더 진하게 풍겨와 주변 가득히 퍼지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저는 친구들에게 “얘들아, 어디서 좋은 향기 안 나니?” 하고 물었지만, 친구들은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분명 제 코에서는 진한 꽃향기가 확확 맡아졌습니다. 저는 그날의 경험이 향취 은혜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 목포전도관에 오셔서 예배를 인도해 주셨을 때의 일입니다. 저는 그날 단에 서신 하나님께서 설교하실 때 하나님 입에서 하얀 안개 같은 것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예배를 마치신 하나님께서 생명물 축복을 해주시려고 물이 가득 담긴 커다란 드럼통 앞에서 축복하시는데, ‘쉭쉭’하고 축복해 주시는 하나님 손끝에서 아까처럼 하얀 안개 같은 것이 나와 드럼통 위에 뽀얗게 내렸습니다. 교회 건물 안에서, 그것도 드럼통 위에만 안개가 내리니 저는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그 광경을 직접 본 저는 앞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우선 예배실부터 깨끗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친구들과 함께 매주 예배실 청소를 하기로 했습니다. 친구들과 예배실 구석구석을 쓸고 닦던 시간은 무척 즐겁고 보람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친구들과 전도관에 가는 길에
너무나 향기로운 냄새가 점점 주변 가득히 퍼져

한번은 광주에 하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들과 광주전도관을 찾아가 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학생들만 따로 안찰해 주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이 나서 하나님께 안찰을 받으러 갔습니다. 제 순서가 되어 하나님 앞으로 가니 하나님께서는 두 눈과 배를 안찰해주셨습니다. 그 순간 배 속으로 깨끗한 물이 내려가듯이 무척 시원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배에 생수가 강같이 흐른다는 말씀이 이런 것일까 싶었고, 마음에 기쁨이 물밀 듯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저는 광주까지 온 김에 나주에 계신 할머니를 뵙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주로 향했습니다. 할머니 집에 도착해서도 배 속에 물이 흐르듯 시원한 느낌은 계속되었고, 마음이 너무나 즐거워서 끊임없이 찬송을 흥얼거렸습니다. 다음 날, 저는 집으로 가는 버스표를 사기 위해 할머니 집 곳간에 들어가 한 바가지 가득 쌀을 퍼서 이웃 아주머니께 팔아 돈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배 속에 시원한 느낌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이상하다고 여기며 아쉬워하고 있는데 문득 내 것도 아닌 할머니 쌀을 허락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팔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할머니 집에는 언제나 쌀이 풍족했고, 우리 집 것이니까 당연히 팔아도 된다는 생각은 크나큰 잘못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너무나 죄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고, 저의 죄를 깊이 뉘우치게 되었습니다.

할머니 쌀을 허락 없이 팔았더니 하나님께 안찰 받고
배 속이 시원하던 느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1958년 12월에는 외숙모와 함께 그토록 꿈꿔왔던 신앙촌에 입주하였습니다. 목포에서 밤 기차를 타고 올라와 새벽에 소사신앙촌에 도착해 정문 아치를 통과하니 이제 막 새벽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의 찬송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듣기 좋던지 꼭 천사들의 음성 같았고, 신앙촌이 세상에 없는 천국같이 느껴졌습니다.

입주 후 소사신앙촌 농장에서 일하게 된 저는 채소도 심고, 고구마도 심으며 하루하루 보람차게 생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농장 식구들을 부르셔서 안찰해 주신 적도 있었는데, 이전과 같이 배 속이 시원해지고 마음이 즐거워져서 더욱 기쁘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1960년 12월 동아일보 사건이 터졌습니다. 오랫동안 전도관과 신앙촌을 악의적으로 비방해 온 동아일보에서 이슬성신이 내리는 사진까지 조작된 것이라 보도하자 교인들이 항의 차 동아일보 본사를 찾아간 일이었습니다. 동아일보 사옥 앞으로 교인들이 모이자 미리 배치되어 있던 경찰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진압을 시작했습니다. 그 바람에 아수라장이 된 현장에서 많은 교인들이 다치고, 경찰서로 연행되기까지 했습니다.

저도 연행된 사람 중 한 명이었는데, 억울한 마음에 저를 취조하던 형사에게
“형사님, 지금 동아일보는 스스로의 명성에 먹칠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동아일보를 우리나라의 대표 언론이라 생각해 왔지만, 전도관과 신앙촌에 대한 거짓 보도를 보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피해자인데, 왜 오히려 저희에게 곤봉을 휘두르시는 겁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형사는 “이 계집애 보통이 아니네” 하고 화를 내더니 저를 경찰 버스에 태워 서울 구치소로 보냈습니다. 결국 저는 열흘이 지나서야 구치소에서 풀려나 신앙촌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저는 동아일보 사건을 회상하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직접 보고 체험한 은혜를 어떻게 거짓이라 중상모략할 수 있었을까?’하며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지금도 저희에게 허락해 주시는 은혜의 권능을 떠올리며 거짓은 결코 진실을 이길 수 없음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황현순 권사/노량진교회소사신앙촌에 돌아온 저는 제과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담당하게 된 일은 카스텔라 반죽이 담긴 틀을 불가마에 넣어 구워내는 일이었습니다. 불이 너무 세면 빵 겉면이 타버리고, 너무 약하면 제대로 부풀지 않기 때문에 적절한 불 조절이 가장 중요했는데, 저는 적당한 온도를 잘 맞춰 카스텔라를 구워냈다며 공장장님께 칭찬받기도 했습니다.

1962년 제과 공장은 덕소신앙촌으로 이전되었고, 저를 비롯한 공장 직원들도 대부분 함께 덕소로 이동하였습니다. 덕소에 제과 공장 설비가 완전히 갖춰질 때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고 하여 제과 공장 직원들은 그동안 건설일을 도왔습니다. 저희는 덕소신앙촌 맞은편 강가에서 모래를 퍼 올려 배에 실어 나르는 작업을 맡았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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