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쾌한 말씀에 답답했던 마음이 확 풀리며 숨통이 트이는 듯 해”

<신앙체험기 500회> 천안교회 김순모 권사
발행일 발행호수 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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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였던 1932년 전라북도 임실군에서 태어난 저는 7살이 되던 해 부모님을 따라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티니안이란 섬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제국주의 국가였던 일본이 사이판 남쪽에 위치한 티니안섬을 점령하게 되면서 설탕 공장, 면화 공장 등을 설립하며 노동력 수급을 위해 한국인들을 강제노역에 동원한 것이었습니다. 부모님은 일본이 설립한 설탕공장에서 일하게 되셨고, 저는 낯선 타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 후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일본령이던 티니안이 1944년 미군의 공격을 받고 함락되어 저희 가족은 1946년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고국에 돌아온 기쁨도 잠시 1950년에는 6.25전쟁으로 온 나라가 포화에 휩싸였습니다. 그사이 전주에서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은 저는 또다시 전쟁의 공포를 겪어야만 했고, 연이은 전쟁으로 불안하고 피폐해진 마음을 달래기 위해 제가 택한 방법은 신을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 집에서 가까운 장로교회에 다녔던 저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목사님의 권유로 열여섯 어린 나이에 결혼을 결심했을 정도로 교회를 많이 의지했습니다. 결혼 후에는 시어머니의 도움으로 전주 고등성경학교에 다니며 여러 부흥 집회에 참석할 정도로 열심이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성경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는 내용을 질문할 때마다 목사님이 “그렇게 믿어서는 안 된다,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목사를 찾아가 질문해 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비슷했습니다.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믿음을 지키려 했던 저는 1956년 3월 전신주에 붙은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 집회’ 포스터를 보고 집회 장소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저는 감람나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집회 장소에 도착해보니 커다란 천막 아래 가마니를 깔고 앉은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집회장에는 전주에서 모인 사람 외에도 박 장로님께 은혜를 받았던 다른 지역 사람들까지 찾아와 그 수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앉아있으니 잠시 후 박 장로님이 단에 서시며 예배가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손뼉을 치며 힘차게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설교 시간, 박 장로님께서는 절대예정의 오류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박 장로님께서는 “천국에 갈 자는 창세 전에 택하여 정해져 있다고 하는데, 그러면 지옥에 가는 사람도 하나님이 정한 것이냐”고 하시며, “천국과 지옥 갈 자가 미리 정해져 있다는 말은 구원을 위한 노력조차 하지 않게 만드는 잘못된 것이며, 구원을 얻으려면 은혜를 받아 죄를 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무나 새롭고 놀라운 하나님 말씀을 들으니 저는 그간 답답했던 마음이 확 풀리며 숨통이 트이는 듯했습니다. 교회에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명쾌한 설교에 감명 받은 저는 앞으로는 박 장로님을 따르며 제대로 신앙생활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56년 전주 집회를 마치고 참석자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한 사진. 맨 앞줄 가운데에 가방을 든 사람이 김순모 권사다.

1956년 4월 23일, 대전에서도 박 장로님 집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 한 명을 전도하여 함께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집회 중에 박 장로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고는 잠시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철없는 행동이었지만, 그때 저는 박 장로님께 안찰을 받고 싶다는 생각으로 전도한 친구와 함께 장로님을 따라나섰습니다. 발걸음이 워낙에 빠르셨기에 저와 친구는 중간에 박 장로님을 놓쳤지만, 근처에서 장로님 차를 운전하시던 집사님을 발견하면서 운 좋게 박 장로님을 만나 안찰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눈 안찰을 위해 엄지손가락을 제 눈에 갖다 대셨는데 어찌나 아픈지 눈알이 뽑히는 것 같았고, 배 안찰 받을 때는 누가 배를 송곳으로 쑤시는 것처럼 아파서 소리를 지를 뻔 했습니다. 고통이 점차 사그라들 때쯤 몸이 가뿐해지는 것이 느껴져서 ‘안찰을 받으면 죄가 씻어진다는데 그래서 몸이 이렇게 가벼운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후로는 눈이나 생각으로도 죄를 짓고 싶지 않아서 길에 걸린 간판도 함부로 쳐다보지 않을 정도로 행동을 조심하며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성경내용도 무조건 믿으라던 목사에게 답답한 마음이 생겼는데
하나님 집회에 참석해서 놀라운 말씀과 많은 은혜를 직접 깨닫고 체험하니
기성교회의 온갖 방해에도 흔들림 없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게 돼

저는 그 후에 서울 제2운동장집회에도 참석하여 병자들이 일어나는 기사이적을 보았습니다. 찬송을 마치신 하나님께서 ‘병자들은 일어나라’고 외치시자 집회장 여기저기에서 병이 나았다는 사람들이 일어나 기뻐 환호하였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너무나 신기하여 자세히 보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그 순간 제 몸이 하늘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가볍게 느껴져서 깜짝 놀랐습니다. 참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저는 이리(익산) 집회, 군산 집회 등 다른 집회에도 많이 참석했었는데 정확히 어떤 집회였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예배를 드리던 중 왼쪽 팔에 시원한 물방울이 계속 떨어져 촉촉한 감촉을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천막에서 물이 새는 줄로만 알았는데 나중에 왼팔을 만져보니 옷이 하나도 젖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너무 신기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더니 사람들은 그것이 이슬 은혜를 받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하나님 집회에서는 기가 막힌 향기도 맡아졌는데, 그 향기는 향취 은혜로 세상 향기와는 비할 수 없이 좋은 것이었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도 그 은혜는 계속 되어 어디를 가든지 향기에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향취가 맡아질 때 마다 은혜로 함께해 주시는 하나님을 떠올리며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를 포함해 하나님께 은혜받은 사람들은 더 이상 기성교회에 나가지 않고,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가정집에 모여 예배를 드렸고, 나중에는 허름한 창고를 빌려서 예배를 드리다가 마침내 땅을 사서 전주 전도관을 짓게 되었습니다. 저는 전도관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고자 돌을 나르고, 흙도 파내며 일손을 보태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전국 곳곳에 전도관이 지어지기 시작하자 기성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이단으로 몰며 온갖 방해를 일삼기에 이르렀습니다.

김순모 권사/천안교회

저는 전주에서 열린 두 번째 하나님 집회에서 기성교회 목사와 청년들이 난동을 부렸던 사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가 1956년 6월이었습니다. 집회가 시작되어 하나님께서 예배를 인도하시던 중에 갑자기 장내가 소란스러워 주위를 둘러보니 기성교회 목사와 젊은 청년 무리가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 앉아있는 사람들을 밟아가며 단상에 계신 하나님 쪽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를 비롯해 단상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급히 단상으로 올라가 하나님을 에워싸서 보호했는데, 기성교회 청년 무리 중 한 명이 단상 위에 있던 마이크 대를 집어 들고 하나님을 향해 휘둘렀습니다. 그 순간 청년이 휘두른 마이크 대가 허공에서 두 동강으로 부러져 땅에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해를 입지 않으셨지만 저희는 너무 놀라 괜찮으신지 여쭤보았고, 하나님께서는 괜찮다고 하시며 오히려 저희를 안심시켜주셨습니다. 그 후로도 몇 시간 동안 계속되던 기성교인들의 난동은 경찰이 출동해서야 잠잠해졌고, 엉망이 된 집회장을 수습한 후에야 가까스로 집회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기성교회의 난동과 갖은 행패를 겪으시고도 온화한 얼굴로 예배를 인도해주셨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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