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눈물로 기도하며 애타게 찾았던 하나님을 뵙게 돼”

<신앙체험기 512회> 화곡교회 이선구 권사 1편
발행일 발행호수 2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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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937년 경기도 이천에서 6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습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저희 집은 지독하게 가난했습니다. 힘겹게 농작물을 수확해도 대부분을 공출(일제강점기 시절 농민들이 생산한 농작물의 일정량을 국가에 의무적으로 납부하는 제도)로 바쳐야 했기에 가족들이 먹을 양식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남들처럼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는 처지가 슬퍼서 어린 나이에도 혼자서 자주 울었습니다. 마음이 너무 괴로울 때면 개울가에 가서 떨어진 낙엽에 부지깽이로 제 이름 세 글자를 써서 물 위에 흘려보냈습니다. 차라리 나도 저 낙엽처럼 세상에서 사라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하나님, 제발 저를 데려가 주세요’하고 기도하는 날이 늘어만 가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북에서 피난 왔다는 가족이 이웃집으로 이사 왔습니다. 이웃집에서는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강산” 하는 노랫소리가 자주 흘러나왔는데 그 노래가 퍽 듣기 좋았습니다. 이웃집 아주머니는 기성교회에 다니는 권사님이었는데 저는 그분과 친해져서 그 집 아이를 자주 돌봐주며 가깝게 지냈습니다. 권사님은 그런 제가 맘에 들었는지 제가 18살쯤 되었을 때 이제 곧 서울로 이사를 가는데 함께 가지 않겠냐고 권유하셨고, 안 그래도 어려운 집안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저는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권사님을 따라 서울에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서울 노량진으로 이사 간 저는 권사님 댁에서 가사 일을 도우며 생활했고, 장로교회에도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권사님께서 남산에서 열린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님의 부흥집회(1955.3)에 다녀온 후 큰 은혜를 받았다며 무척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권사님은 가족들을 데리고 박태선 장로님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때는 거리 곳곳에서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 포스터를 볼 수 있었고, 버스에도 박 장로님의 집회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을 정도로 세간의 큰 관심을 모았습니다. 저도 그즈음 을지로를 걸어가는데 어느 순간 사람들이 몰려 들어서 길이 무척 붐비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박태선 장로님의 서울운동장 집회에 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박 장로님은 대체 어떤 분이실까?’하고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뒤 권사님은 다니던 장로교회에 발길 완전히 끊으시고, 제게도 박태선 장로님의 교회로 가자고 하셔서 흔쾌히 알겠다고 답했습니다. 권사님의 권유도 있었지만 얼마 전에 권사님의 아들이 박태선 장로님께 안수를 받고 병이 씻은 듯 나은 것에 놀라움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권사님의 아들은 손에 옴(옴진드기에 의하여 발생하는 피부 질환)이 생겨 가려움증에 시달렸고 손등에 빨갛고 우둘투둘한 발진이 올라와 보기에도 안타까운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박 장로님 집회에 갔다 오더니 밝은 얼굴로 “누나! 나 좀 봐! 안수를 받고 손이 싹 나았어!” 하며 손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손등은 정말로 말끔해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박 장로님 집회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서울중앙전도관, 일명 이만제단

권사님을 따라간 곳은 이만제단터였는데, 아직 교회가 완공되기 전이어서 천막을 쳐놓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잠시 후 박 장로님께서 환하게 미소 지으시며 걸어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마음 문 여세요”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마음 문을 연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지만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유도 모른 채 한참을 울고 나서야 찬송을 부를 수 있었고, 찬송을 부르니 기분이 무척 좋아졌습니다.

그날 하나님께서는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모두 안수해 주시고 ‘병이 나은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벙어리가 입이 트였다며, 꼽추는 등이 펴졌다며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일어나 자신의 병이 나았다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제 옆에 있던 젊은 처녀가 훌쩍이며 우는 것이었습니다. 왜 우냐고 물으니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눈을 뜰 수 없는 장님이었는데 방금 눈이 떠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고개를 든 처녀의 눈을 살펴보니 눈동자가 아직 뿌옇긴 하지만 분명히 눈을 뜨고 있었습니다. 그때 박 장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장님이 눈을 뜨면 일주일이 지나야 제대로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처녀는 감격에 겨워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고 저 또한 경이로움에 입을 다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박태선 장로님께서 설교 중에 “시골 흙집에 살면서 맨날 가랑잎에 이름을 써서 나를 찾던 아가씨가 여기에 와 있어요”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웠던 시절, 괴로운 마음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채 간절히 부르짖었던 절박한 기도를 박 장로님께서 모두 알고 계신다는 사실에 저는 너무나 놀라서 ‘저분이 하나님이시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힘들었던 시절 제가 매일같이 눈물로 기도하며 애타게 찾았던 분은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박 장로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발표하셨을 때에도 저는 이 일화를 가장 먼저 떠올렸습니다.

이만제단터에서 예배드린 이후로 저는 다니던 장로교회를 그만두고 하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만제단을 짓는 공사를 도왔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공사에 참여해 벽돌을 나르고 물을 길어오며 기쁜 마음으로 일손을 거들었습니다. 어느 날은 벽돌을 들고 언덕 위를 올라가니 하나님께서 벽돌을 가져온 사람에게 안수를 해주고 계셨습니다. 저도 줄을 서서 하나님께 안수를 받았는데 마음에 기쁨이 샘솟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는 장 집사라는 분이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생명물을 한 컵씩 떠서 나눠줬습니다. 저는 미리 조그만 유리병을 준비해 뒀다가 거기에 생명물을 받았습니다.

생명물을 소중히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머리 위에 크고 시원한 물방울이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왜 물방울이 떨어지지?’ 하고 머리를 만져보니 하나도 젖지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기분이 무척 좋아지면서 몸이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발이 공중에 있는지 땅에 있는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가볍게 길을 가는데 권사님 한 분을 만났습니다. 권사님은 저를 보고 깜짝 놀라시더니 “얼굴이 왜 이리 예뻐졌니? 은혜를 받았구나!” 하며 흐뭇하게 웃으셨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얼굴이 환하게 핀다는 것을 저는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이선구 권사/화곡교회

이만제단의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마침내 1957년 4월 개관집회가 열렸습니다. 지금도 신앙촌 사진관에서 이만제단 개관집회 때 내렸던 폭포수 같은 이슬성신 사진을 볼 수 있는데, 저는 그때 그렇게 많은 은혜가 내렸는지 몰랐습니다. 그날 예배를 드리던 중 예배실 안에 어느 순간 뽀얀 안개가 끼어 사람들이 보일 듯 말 듯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도 그저 ‘새로 지은 예배실에 왜 안개가 끼는 걸까?’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야 제가 본 뽀얀 안개가 이슬 같은 은혜였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신기하고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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