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빈치 코드와 유다복음의 출현으로 ‘교회의 몰락’?

`기독교 구원관에 '곤란한 의문'을 제기`
발행일 발행호수 2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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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Los Angeles Times 보도
 
2006년 5월 7일자 Los Angeles Times지는 최근 개봉된 댄 브라운 원작 영화 ‘다빈치 코드’와 얼마 전 복원된 ‘유다복음’에 관해 교황을 비롯한 캔터베리 대주교 등 가톨릭 지도자들이 과민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Susan Jacoby 기자의 기고문을 싣고 그 이유는 ‘다빈치 코드’와 ‘유다복음’이 2000년 동안 전해 내려오는 기독교 구원관에 중대한 도전장을 던졌고 기독교의 전통 신앙에 ‘곤란한 의문’을 제기하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Los Angeles Times지의 보도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독교의 신앙은 지속적인 힘을 가지고 인간의 상상력 위에 군림해 왔다. 그렇다면 왜 교황과 캔터베리 대주교를 포함한 세계의 유수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일개 소설에 근거한 영화의 개봉과, 2세기경에 쓰여졌으며 내용이 (전통 복음서와) 상이한 복음의 3세기 복사판의 복원에 대하여 그렇게 거품을 물고 흥분하는 것인가?
지하 공간에 갇혀져 있던 사람들에게 나타난 영화는 댄 브라운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근거로 한 ‘다빈치 코드’이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예수가 못 박힐 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는 것, 예수는 십자가상에서 죽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가톨릭교회 내부의 악의 세력이 이러한 사실들을 비밀에 부치기 위해 여러 세기에 걸쳐 살인을 해왔다는 것 등이다.
서양 종교의 역사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는 지난 달 워싱턴에서 ‘내셔널 지오그래픽 소사이어티’에 의해 복원되고 발표된 바 있는 파피루스 위에 쓰여 진 고대의 복음서이다. ‘유다복음’이라고 불리는 이 문서는 기독교 초기에 활발히 움직였던 영지주의자에게 속한 것으로,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영감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 교파는 결국 가톨릭교회에 의하여 억압되고 말았다. 이 복원된 ‘유다복음’에 의하면 유다는 만고의 역적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 예수를 위한 자발적인 도구로 역할을 한 자가 된다. 
내가 만일 교황이라면 ‘다빈치 코드’에 대하여 당당한 침묵으로 대응하였을 것이다. 아니면 바티칸의 공보관을 통해서 “우리는 기분이 좋지 않다”는 정도의 성명을 발표했을 것이다. ‘유다복음’에 대해서는 초대 교회에서 영지주의자들을 이단으로 배척한 것이 옳았다는 부드러운 분석을 내놓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 세계의 수많은 (언론의) 편집자들이 나의 보도 자료를 그들의 이메일에서 뉴스거리가 안 된다고 지워버리게 될 것이고, 나는 감사의 기도를 올렸을 것이다. 그런데 바티칸은 기독교의 절기 중에 가장 거룩한 기간인 성 주간(부활절 전의 1주일간)에 아주 공격적인 반응을 보였다. 
헨리 8세가 안느 볼린과 결혼하기 위하여 바티칸과 결별한 이후 바티칸 당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영국 성공회의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번에 ‘음모설에 사로잡힌 대중의 강박관념’을 비난함으로써 교황보다 더 가톨릭교회다운 반응을 보였다. 성 목요일에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유다를 욕심에 가득 찬 거짓말쟁이이며 진리와는 동떨어진 배반자에 불과하다고 매도하였다. 그리고 지난주에 바티칸은 영화 ‘다빈치 코드’가 불경(不敬)스러우니 관람하지 말라고 신자들에게 촉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잉반응은 멜 깁슨 감독의 2004년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 대해서는 교회측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과 대조가 된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예수의 죽음에 대하여 유대인을 비난하는 성경적인 문구를 강조한 것과 외설스러운 폭력으로 뒤덮인 내용 때문에 많은 유대인과 진보적인 기독교인을 격분시켰었지만, 항상 그랬듯이 신성모독이란 누가 피해 대상이냐에 따라서 정의가 달라지는 것이다.
부활절 날 런던에서 켄터베리 대주교 로안 윌리암스는 다음과 같이 단정하여 말했다.“대중은 음모와 은폐가 있다는 이야기에 너무 매료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가 부활했다는 성명에 대한 오늘날의 반응은 아마도 ‘너도 그렇게 말 하겠니? 아니지, 그럼 진실은 무엇인가?’ 라고 할 것이다.”
영국성공회 대주교는 교황보다 말투는 온건했지만, 교회의 몰락이라는 진짜 의제(議題)에 대하여 무의식중에 설명하는 결과가 되었는데, 교회 지도자들이 당면하고 있는 오늘의 문제는, 웃기는 암호이야기인 댄 브라운의 소설과 유다복음에 나타난 고대 신앙이 과거 1700년 동안 기독교가 가르쳐 온 정설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위대한 예언자인 인간일 뿐이라는 것이 전 세계의 수백만 비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견해인 것이다. 사실 초대 교회에서도 예수의 신성이 그대로 받아드려진 것은 아니었으며, 서기 325년 니케아 공회에서 처음으로 선포되었던 것이다. 
‘유다복음’은 기독교인들에게 배신자를 재조명하는 문제를 제기하였을 뿐 아니라, 예수가 전지전능한 신적인 존재였다면 왜 유다의 의중을 미리 알아차릴 수 없었는가 하는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하였다. 많은 학자들은 2세기에 쓰여진 유다복음이 서기 30년경 예수가 죽을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가치 있는 자료를 제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하여 왔고, 사실 그러하였다.
그러나 서기 70년과 100년 사이에 쓰여 진 것으로 알려진 정경(正經)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에 대해서도 사정은 동일하다. 후에 쓰여 진 영지주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성경상의 복음도 ‘신앙의 기록’일 뿐이지 ‘사실(事實)’을 기록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비 신앙인으로서, 새로이 상영되는 영화도, 고대 복음서도 예수의 생과 사에 대한 성경 해설을 믿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아직 흔들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기독교인이 어울리지 않게 격분하는 진짜 배경은,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든 기독교 초창기의 무명의 복음이든 간에 기독교의 구원관에 중대한 도전을 하였고 또 그러한 도전 때문에 어떤 종교적인 구원관이 허구가 아닌 ‘사실’이라고 합리적으로 설명되는 데 대하여 곤란한 의심이 제기되는데, 이것을 교회지도자들이 싫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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