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 <다시 보는 미제 사건> 바티칸 소녀의 실종이 알려주는 것은?

이슈추적 <다시 보는 미제 사건>
발행일 발행호수 2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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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차례로) 기도하는 에마누엘라. 플룻 연주 중인 에마누엘라 오를란디 (출처: 넷플릭스 바티칸걸), 교황청을 향해 에마누엘라 오를란디 사건 해결을 촉구하는 이탈리아 시민들 (출처: 데일리 텔레그래프)

범죄 수사는 진실을 파헤치려는 자와 진실을 덮으려는 자들의 싸움이다. 셜록 홈즈, 명탐정 코난 같은 범죄 추리 소설이나 만화, 영화 속에서 완전 범죄는 없다. 범인은 반드시 단서를 남기고, 수사관들은 그 단서와 증언 등을 토대로 사건을 분석하여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다. 수사 과정의 긴박감과 스릴도 흥미진진하지만, 결국 범인이 잡히고 마는 권선징악의 결말은 보는 이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추리 소설의 묘미이다. 그렇다면 현실의 범죄 수사에서도 언제나 정의가 승리하며 진실이 시원하게 밝혀지는 결말만 있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세상에는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미제사건들이 다수 존재한다. 시간이 지나 새로운 사건들에 밀려 관심이 줄어들거나, 관련자들이 남아있지 않게 되면 수사는 종결되고,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잊혀지게 되기도 한다. 범인이 바라는 결말이다. 하지만 장기 미제 사건이라도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늦게나마 범인이 밝혀지는 경우도 있다. 이번 기획기사에서는 약 40년간 해결되지 않은 이탈리아의 한 미제 사건의 수사 과정을 따라가 볼 것이다. 수많은 증언과 증거들 속에서 범인이 남긴 단서는 무엇이며, 이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들은 무엇일까?

▣ 사건의 시작: 바티칸 소녀의 실종

1983년 6월 22일, 바티칸에 살던 15세 소녀 에마누엘라 오를란디는 로마 도심의 음악 학원에서 플룻 레슨을 받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날 저녁, 에마누엘라는 언니에게 전화해 한 남자가 자신에게 화장품 전단지를 나눠주는 일거리를 제안했다는 얘기를 했고, 그 통화를 끝으로 에마누엘라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오를란디 가족은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고, 로마 전역에 에마누엘라를 찾는 실종 전단지를 붙였다. 제보 전화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실종 장소 근처에서 플룻 가방을 멘 소녀가 화장품을 파는 것을 보았다는 제보를 받는다. 며칠 뒤에도 비슷한 내용의 제보를 받았고, 경찰은 사춘기 소녀의 자의적 가출 사건으로 수사를 진행했다. 가족들은 에마누엘라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제보들 말고는 별다른 단서가 없었다. 그런데 에마누엘라가 실종된 지 13일째 되던 날, 의혹의 시발점이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 의혹의 시작: 교황은 알고 있다

바티칸의 교황은 매주 일요일 베드로 광장에서 연설을 한다. 그리고 이 연설에서 교황은 의도 없이 아무말이나 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실종 13일째인 1983년 7월 3일 일요일, 당시 교황 바오로 2세는 주일 연설에서 돌연 에마누엘라의 실종에 대해 언급했다.

<자료1> 1983년 7월 3일, 베드로 광장에서 연설하는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요한 바오로 2세는 공개석상에서 돌연 에마누엘라 오를란디 실종 사건을 언급한다.
그의 발언에는 수상한 점이 있었다. 아무도 에마누엘라의 실종 원인과 생사 여부를 모르는 중에, ‘이 사건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 ‘무사히 돌아가길 바란다’는 등의 언급을 하여, 에마누엘라가 납치되었으며 아직 살아있다는 단서를 내비친다. 이로써 에마누엘라 실종 사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닌 납치 범죄 사건임이 드러나게 되었다.
(출처: 넷플릭스 <바티칸 걸: 에마누엘라 오를란디 실종 사건> 캡처)

“이 자리를 빌려 오를란디 가족에 심심한 위로를 보냅니다. 15세 소녀 에마누엘라 오를란디는 6월 22일 수요일에 실종된 후 아직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소녀의 부모님이 얼마나 괴로우실지 짐작이 갑니다. 이 사건에 책임이 있는 자들에게 아직 일말의 인간성이 남아 있기를 희망합니다.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길 바랍니다”<자료1>

에마누엘라의 가족들은 충격에 빠졌다. 교황청 행정부에서 일하며 교황과 매일 이야기를 나누던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에게는 일언반구도 없다가 갑자기 공개 석상에서 이 사건을 언급한 것 때문이 아니다. 충격적인 것은 교황의 발언 속 ‘책임이 있는 자들’이라는 말과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길 바란다’는 말이었다. 지금까지 오를란디의 실종 이유와 생사 여부는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교황은 오를란디가 납치당했으며 아직 살아있음을 확실히 아는 듯이 말한 것이다. 수많은 대중 앞에서 벌어진 교황의 공개 발언은 이 사건이 언론에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 가족들은 모르는 인질극

교황의 발언 이후 이틀째 되는 날, 정말로 책임이 있는 자가 나타난다. 자신을 범인이라 밝힌 한 남성은 에마누엘라의 집에 전화해 녹음된 오를란디의 목소리를 증거로 들려주며 에마누엘라를 살리고 싶으면 7월 20일까지 메흐메트 알리 아자를 석방하라는 조건을 내건다.

알리 아자는 사건 발생 2년 전인 1981년, 교황 바오로 2세를 총기로 암살하려 한 인물이다. 그런데 알리 아자는 오히려 자신은 이 납치 범죄에 반대한다며 납치범들을 비난했다. 자신과의 관련성을 부인한 것이다.

1983년 7월 17일 교황 바오로 2세는 또 한 번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다. 주일 연설 시간에 공개적으로 납치범을 향한 메시지를 발표한 것이다. 교황은 이전에 이렇게 범죄 사건에 대해 언급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저는 이 가슴 아픈 일이 좋게 마무리되도록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여러분께 약속합니다.”

교황의 발언 다음 날, 범인은 가족들에게 끔찍한 내용의 녹음 테이프를 보낸다. 고통스러워하며 신음 소리를 내는 오를란디의 목소리가 들렸다.

“피가 나요. 오 하느님, 너무 아파요. 왜 이래요?

이유가 뭐에요? 너무 아파요. 제발. 이제 자도 되나요?”

이탈리아의 한 첩보 기관이 입수한 녹음의 원본을 분석한 결과, 한 명의 여성이 세 명의 남성에게 차례로 성폭행을 당하는 상황으로 보인다고 했다.

녹음 공개 후, 곧 범인으로부터 협상을 원한다는 전화가 왔다. 그런데 경찰이나 가족이 아니라 바티칸과 직접 대화하기를 요구했다. 바티칸 공보실(대언론 담당 부서)은 이를 수락했고, 범인은 바티칸이 언론에 공개한 전화번호를 통해 당시 바티칸 국무장관인 아고스티노 카사롤리 추기경과 비밀리에 통화했다. 하지만 교황청은 왜 카사롤리 추기경이 납치범과 통화했는지, 그리고 무슨 대화를 했는지 누구에게도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결국 알리 아자의 석방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7월 20일 마지막 협상 요구를 끝으로 범인의 연락은 끊기게 되었다. 그럼에도 범인이 협박 내용을 실행했다는 단서는 나오지 않았고, 에마누엘라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한 채 시간이 흘러갔다. 약 6개월 뒤인 12월 24일, 교황 바오로 2세는 오를란디 가족의 집에 방문해 에마누엘라의 실종은 국제 테러라고 단언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해 에마누엘라가 돌아오게 하겠다고 가족들에게 약속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가족들은 교황에게 감사해 했다.

그런데 에마누엘라 실종 사건을 집중 취재하던 이탈리아 최대 일간지 코리에 델라 세라 기자 안드레아 푸르가토리는 이 사건의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보통 납치 사건이 일어나면 범인은 처음부터 가족들에게 요구 사항을 전달하는데, 교황의 발언 이후에 요구 사항을 얘기한 점, 배후가 불분명한 점, 들키지 말아야 할 범죄자가 지나치게 막무가내로 움직인 점 등이다. 모든 정황을 종합한 결과, 그는 이 사건은 사실 국제 테러가 아니라 ‘바티칸 내부의 다른 비밀로부터 시선을 돌리기 위한 미끼’라고 결론 내렸다. 이러한 내용을 실은 그의 기사가 신문에 보도되자 바티칸은 다음날 즉시 이를 부인하는 공식 발표를 했고, 발표 당일 신문사 편집장은 기사를 쓴 푸르가토리를 불러 취재를 그만하고 손을 떼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덕분에 그는 자신이 진실에 다가갔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20일 이후로 범인은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으며, 에마누엘라를 찾아주겠다던 교황청에선 아무 소식이 없었다. 결국 이 인질극은 교황청도 사악한 적대 세력에게 협박당한 피해자이며, 가족들의 편에서 성심성의껏 에마누엘라를 찾고 있다는 인상을 남긴 채, 새로운 단서 없이 20여 년의 시간이 흐르게 된다.

▣ 잊혀질 위기에 놓인 납치 사건

교황 바오로 2세와 사진 찍은 오를란디 가족들. 안경 낀 소녀가 에마누엘라 오를란디이다.

에마누엘라의 아버지는 바티칸 행정부에서 일하며 20년 이상 바오로 6세부터 요한 바오로 2세까지 세 명의 교황을 섬겼다. 평생을 바티칸에 바쳤던 아버지는 딸의 실종 이후에도 여전히 교황을 위해 봉사했다. 하지만 교황에게 에마누엘라에 대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런 질문은 교황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해치는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도 결국 가톨릭교회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게 된다. 2004년, 아버지는 임종 직전 “나는 내가 섬겼던 모든 사람에게 사기당했다.”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교황도 끝내 에마누엘라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나는 처리했어야 할 그 어떤 것도 남기지 않고 간다. 나의 개인적인 메모는 소각해주길 바란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뜬다. 그는 결국 자신의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간 것이다.

에마누엘라의 아버지와 교황이 모두 세상을 떠나며 사건의 비밀은 영원히 묻혀지게 될 위기에 직면한 듯했다. 그러나 교황이 죽자 5개월만인 2005년 9월, 새로운 제보가 나타난다.

▣ 의혹의 재점화: 성당에 묻힌 마피아 두목

2005년 9월 12일, 이탈리아의 공영 방송 Rai 방송국의 자동응답기에 발신자를 알 수 없는 음성 메시지가 녹음됐다.

“에마누엘라 오를란디 실종 사건의 진실을 알고 싶다면 누가 산타폴리나레 성당 지하묘지에 묻혀 있는지, 폴레티 추기경이 엔리코 데 페디스에게 어떤 부탁을 했는지 알아보세요.”

<자료2> 말리아나 갱단의 두목 엔리코 데 페디스의 무덤
2005년 9월, 이탈리아의 공영 방송 Rai 방송국의 자동응답기에 녹음된 익명의 제보에 따라 산타폴리나레 성당의 지하묘지를 확인해본 결과, 한때 로마를 공포 속에 몰아넣었던 악명 높은 갱단 말리아나 두목 엔리코 데 페디스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1990년 폴레티 추기경이 거금을 받고 이를 허락한 것이다. 엔리코 데 페디스는 교황청과 돈 거래를 하는 사이였다고 그의 옛 연인 사브리나 미나르디가 증언했다.
(출처: 독일 ZDF <바티칸 납치: 에마누엘라 오를란디 사건> 캡처)

이 익명의 제보에 따라 산타폴리나레 성당의 지하묘지를 확인해보니 한때 로마를 공포 속에 몰아넣었던 악명 높은 갱단 말리아나 두목 엔리코 데 페디스의 무덤이 발견되었다.<자료2> 산타폴리나레 성당은 바티칸 소유의 성당으로, 교황과 추기경급 성직자나 묻힐 수 있는 묘지였다. 그곳에 살인 범죄자가 묻혔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일에 대해 교황청은 데 페디스가 과거의 많은 잘못을 뉘우쳤고 선행도 많이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ANSA통신에 의하면 1990년, 폴레티 추기경이 엔리코 데 페디스의 부인에게 당시 돈으로 10억리라(약 7억5000만원)를 받고 성당 묘지에 매장하는 것을 허락한 것이라고 한다.

2012년 대중들의 반발이 심해지자 결국 바티칸은 엔리코 데 페디스의 무덤을 공개했는데, 관 옆에 신원을 알 수 없는 뼈들이 가득 들은 수상한 상자 수십 개가 발견되며 논란이 가중되었다. 분석 결과, 그중에 오를란디의 유골은 없었다.

▣ 마피아 두목 연인의 증언: 바티칸과 마피아의 검은 거래

엔리코 데 페디스는 바티칸과 무슨 관련이 있던 것일까? 2008년, 엔리코 데 페디스의 연인이었던 사브리나 미나르디는 실종 당일, 데 페디스의 부탁으로 자신이 에마누엘라를 차로 옮겼으며, 데 페디스는 바티칸과 돈거래를 하는 사이였라고 증언했다.

미나르디에 따르면 에마누엘라를 차에 태웠는데 정신이 나간 것으로 보였다고 한다. 자기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울고 웃기를 반복하는 모습이 마약을 잔뜩 먹인 것 같았다고 했다. 에마누엘라는 처음에 미나르디 집 침실에 감금된 채 지냈는데 방에서는 항상 아파하는 신음 소리가 들렸고, 에마누엘라를 돌봐주는 한 여자는 정기적으로 향정신성 약물을 먹였다고 한다.

미나르디 집에서 열흘 정도 보낸 후, 에마누엘라는 바티칸에 넘겨진다. 미나르디는 에마누엘라를 차에 태워 바티칸 주유소로 데려갔고, 바티칸 번호를 단 차에서 사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나와 에마누엘라를 데려갔다고 한다. 포스터를 보고 에마누엘라가 실종 소녀임을 알게 된 미나르디는 데 페디스에게 나를 무슨 일에 끌어들인 것이냐며 물었고, 데 페디스는 이것이 권력 다툼이라 대답한다. 말리아나 조직의 거대한 돈이 바티칸에 들어갔는데 돌려받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바티칸 은행은 아탈리아의 치외법권 지역으로 외환 관리법의 통제를 받지 않기 때문에 검은 돈 세탁에 용이했다. 바티칸과 마피아는 암브로시아노 은행을 매개로 돈이 오갔었는데, 암브로시아노 은행이 파산하면서 바티칸에 들어간 마피아의 돈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이에 마피아 조직이 바티칸에 들어간 거액의 돈을 돌려받기 위해 에마누엘라를 납치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그런 목적이라면 왜 굳이 평신도의 딸인 에마누엘라를 납치했는지, 에마누엘라와의 연관성은 찾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 갔다.

▣ 프란치스코 교황의 증언: 에마누엘라는 천국에 있다.

2013년, 현재 로마 가톨릭교회 교황인 프란치스코가 선출됐다. 선출 후 2주 뒤, 프란치스코는 성 안나 교구에서 미사를 집전했다. 성 안나 교구는 에마누엘라가 속했던 교구였고, 오를란디 가족들도 참석했다. 교황과 대화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화는 단칼에 거절된다. 가족들이 다가가자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얘기한다.

“에마누엘라는 천국에 있습니다.

(Emanuela èin Paradiso)”

이 얘기를 들은 에마누엘라의 오빠 피에트로 오를란디는 피가 얼어붙는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이에 피에트로는 교황에게 “아직 동생이 살아있으면 좋겠네요”라고 얘기한다. 그러자 교황은 다시 한번 얘기했다.

“에마누엘라는 천국에 있습니다.”<자료3>

<자료3> 프란치스코 교황과 에마누엘라의 오빠 피에트로 오를란디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오를란디 가족에게 “에마누엘라는 천국에 있습니다.”라고 얘기한다. 폭탄 발언이었다. 에마누엘라의 생사 여부는 아무도 모르는 중에, 교황이 에마누엘라가 죽었다고 증언한 것이다. 또한 가족들도 모르는 정보를 교황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증언한 것었다. 하지만 교황청은 현재까지도 에마누엘라의 생사나 행방에 대해 침묵을 이어가고 있으며 2020년에는 공식적으로 에마누엘라 관련 수사를 종결했다.(출처: 독일 ZDF <바티칸 납치: 에마누엘라 오를란디 사건> 캡처)

프란치스코의 발언은 곧 증언이 되었다. 교황은 오를란디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증언, 바티칸의 국가 원수로서 가족들도 모르는 정보를 알고 있다는 증언이다. 하지만 아직 오를란디의 시신을 찾지 못했고, 바티칸에서 공식적으로 에마누엘라의 죽음을 시인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에마누엘라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로 남아 있다.

▣ 바티칸 내부자의 증언: 교황청 섹스 파티에 끌려가다.

바티칸 내부자의 증언도 있었다. 2012년 5월, 요한 바오로 2세가 바티칸 수석 구마사제로 임명했던 가브리엘레 아모스 신부는 에마누엘라 오를란디의 납치는 성범죄이며, 교황청 섹스 파티를 위한 것이라고 언론사에 폭로했다. 바티칸 경찰들 중에는 섹스 파티를 위해 소녀를 납치해 오는 팀이 있고, 에마누엘라는 강제로 파티에 끌려가게 된 희생자라는 것이다. 바티칸 경찰의 도움을 받아 섹스 파티에 참가시킬 소녀들을 모집하라는 지시를 받은 사실은 바티칸 문서 보관 담당자였던 몬시뇰 시메오네 두카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또한 아모스 신부는 알리 아자 석방 요구 사건은 ‘에마누엘라 성폭행 사건을 은폐하려는 바티칸의 음모’였고, 에마누엘라는 바티칸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살해당한 것이라고 확고하게 증언했다. 한편, 바티칸은 아모스 신부의 폭로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 오를란디 친구의 증언: 교황청 정원에서의 성추행

넷플릭스 <바티칸 걸> 포스터와 스틸컷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라우라 스그로 변호사, 기자 푸르가토리, 에마누엘라의 친구, 마피아 두목 연인 사브리나 미나르디가 증언하는 모습니다.

지난 10월 20일, 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 플랫폼 넷플릭스에서 〈바티칸 걸: 에마누엘라 오를란디 실종 사건〉이라는 4부작 범죄 실화 다큐멘터리가 공개되었다. 에마누엘라 오를란디 실종 사건은 넷플릭스 이전에도 2016년 영화 〈진실은 하늘에(La veritàsta in cielo)〉, 2018년 독일 다큐멘터리 〈바티칸 납치: 에마누엘라 오를란디 사건(Entführung aus dem Vatikan: Der Fall Emanuela Orlandi)〉 등으로 제작된 바 있는데, 〈바티칸 걸〉에서는 이전의 의혹과 증언들을 총망라함과 동시에 새로운 증인이 등장한다. 에마누엘라의 친구였다.

〈바티칸 걸〉은 증인들이 먼저 본인의 신원을 밝힌 후 증언을 시작하는 형식의 다큐멘터리다. 그러나 친구는 신원을 밝히고 싶지 않다며 그래야 안심이 된다고 하여, 영상에서 검은 실루엣과 모자이크 처리를 한 채 인터뷰에 응했다. 그녀의 증언에 따르면, 사건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 에마누엘라는 친구에게 전화하여 너에게 얘기해야 할 비밀이 있다며 만나자고 했다. 약속 장소에 나온 에마누엘라는 경직되어 있었고, 교황청 정원을 산책하는 중에 성추행 당한 사실을 얘기한다. 교황과 가까운 사람이 자신을 귀찮게 했다고 표현했지만, 수치스러워하는 에마누엘라를 보면 성적으로 유혹했다는 것을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에마누엘라와 친구는 어디에도 얘기할 수 없었다. 그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며 여자애 둘이 지어낸 얘기라고 매도당할 것이 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친구는 진작 나서지 못한 것을 미안해하며 흐느꼈다.

인터뷰어는 마지막으로 교황청에서 복수할까봐 두렵냐고 물어봤다. 성추행으로 고통받던 에마누엘라의 잔인한 최후를 가까이서 지켜본 친구는 물론 두려웠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언제나 걱정이 됐다고 한다.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무서운 세상에서 살기 때문이라고. 그녀 역시 바티칸의 영향력 아래 사는 소녀였다.

친구의 증언은 ‘왜 굳이 평신도의 딸인 에마누엘라를 납치했는가’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었다. 가톨릭교회의 조직적인 아동성범죄 사건은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지만, 바티칸 내에서의 아동 섬범죄는 아직까지 언론에 발각된 적이 없다. 최고위 성직자들이 모인 바티칸에서의 범죄 사실이 알려지면 큰 스캔들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종교 단체라면 더욱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일 것이다. ‘바티칸의 성범죄 사실을 알고 있는 바티칸 소녀’의 존재는 종교로서의 권위를 무너트릴 또는 무너질 위기의 위협이 되었던 것이다.

▣ 바티칸의 에마누엘라 관련 활동 비용 보고서

2017년, 새로운 증거의 발견으로 에마누엘라 사건 수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2015년, 교황청의 비리와 불투명한 재정 관리 관련 기밀문서, 1급 비밀정보 등이 이탈리아 언론에 대량 유출되었다. 일명 ‘2차 바티리크스(Vatileaks)’사건으로, 2012년 교황 베네딕토 16세 재임 당시 “교회의 모든 곳에서 악과 부패를 보았다”며 교황의 수행비서가 기밀문서를 빼돌렸던 1차 바티리크스에 이은 두 번째 사건이다. 그런데 이때 유출된 기밀문서 중에 에마누엘라 사건과 관련된 것이 있었다.

오랫동안 바티칸을 취재해왔던 탐사 보도 기자 에밀리아노 피티팔디는 수소문 끝에 그 자료의 일부를 받게 된다. 문서의 제목은 “시민 에마누엘라 오를란디 관련 활동에 대해 바티칸 시국이 지출한 비용”으로 197장 분량의 원본 문건을 정리한 5장짜리 요약 보고서의 사본이었다.<자료4> 교황청의 자산을 관리하는 사도좌재산관리처 처장 로렌초 안토네티 추기경이 작성하였으며, 자금 지출 내역은 1983년 1월부터 1997년 7월까지 이어져 있었다. 보고서에 의하면 에마누엘라는 이탈리아를 떠나 영국 런던의 가톨릭 수도회 운영 유스 호스텔에서 지냈으며, 지출 내역에는 수업료, 식비, 숙박비, 산부인과비, 고정 의료비 등이 포함됐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마지막 지출 내역이었다.

<자료4> 에마누엘라 관련 활동에 쓰인 바티칸 자금 내역 요약 보고서
첫째 장과 마지막 장이다. 197장 분량의 원본 문건을 정리한 5장짜리 요약 보고서로, 1983년 1월부터 1997년 7월까지 기록되었으며, 지출 내역으로 수업료, 식비, 숙박비, 산부인과비, 고정 의료비, 바티칸으로의 시신 이송비 등이 있었다. (출처: 라 레푸블리카)

‘바티칸 시국으로 이송 및 마지막 처리 관련 제반 비용’.

이것은 에마누엘라가 영국에서 생을 마감했고, 그 시신을 바티칸으로 가져온 것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바티칸은 그동안 내부 문건의 존재를 부정하며 오빠 피에트로의 문서 공개 요청을 묵살해왔다. 그러나 내부 문서는 존재했고 심지어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았던 것이다. 이는 2013년, 에마누엘라는 천국에 있다던 프란치스코의 증언을 뒷받침해 준다. 피에트로는 이 문건이 사실이라면 ‘교황청은 사악하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줄 모르는 집단’이라며 분노했다.

▣ 사라진 시신, 사라진 증거

<자료5> 천사상이 있는 묘비 사진이 동봉된 편지
수·발신인이 없는 이 편지에는 천사상이 있는 묘비 사진과 함께 “에마누엘라를 찾고 싶다면 천사가 보는 곳을 살펴 보라”는 문장이 적혀있었다. 변호사는 바티칸 안에 있는 독일인의 묘지에서 사진 속 묘비를 찾았고, 바티칸에 무덤 공개 요청을 한다. 수개월 후 바티칸은 이를 수락했으나 무덤은 텅 비어 있었다. 오를란디의 시신이 없는 것은 물론 원래 주인의 시신까지 사라져 있었다. (출처: 넷플릭스 <바티칸 걸: 에마누엘라 오를란디 실종 사건> 캡처)

2018년, 피에트로가 선임한 변호사 라우라 스그로의 사무실 우편함에 누군가 흰 봉투를 넣어놓았다. 수신인도 발신인도 없는 편지에는 천사상이 있는 묘비 사진과 함께 한 문장이 적혀있었다.<자료5>

“에마누엘라를 찾고 싶다면 천사가 보는 곳을 살펴 봐라”

라우라 스그로는 5장 짜리 보고서의 마지막 내역을 진실이라 가정하고 바티칸 내의 묘지를 찾아간다. 바티칸의 묘지는 두 곳뿐이었고 독일 공주의 묘지에서 천사상이 있는 묘비를 찾아낸다. 변호사와 피에트로는 바티칸 국무장관에게 무덤 개방을 요청했다.

라우라 스그로는 바티칸이 수락할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 살펴보는 데 6개월이 걸릴 정도로 막대한 양의 이 사건 자료를 검토했는데, 자료를 보면서 굉장히 불쾌해졌다고 한다. 수사 과정에서 교황청의 협조를 전혀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관련자를 불러 조사한 적도 없고, 사실상 이 문제에서 손을 뗀 수준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번에는 수락했다. 단, 몇 개월의 시간이 흐른 후에.

2019년, 독일 공주의 무덤을 개봉했다. 그러나 무덤은 텅 비어있었다. 에마누엘라의 유골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원래 있어야 할 독일인 공주의 유골마저 사라져 있던 것이다. 에마누엘라의 오빠는 애써 동생의 죽음이 확실해지지 않았으니 다행이라 스스로 위로했지만, 자신의 요청으로 무덤을 공개하는 바람에 동생의 시신마저 찾아볼 수 없도록 완전히 인멸되어 버린 결과에 망연자실했을 것이다.

사건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에마누엘라의 시신도 범인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2020년, 바티칸은 공식적으로 수사 종결을 선언했지만 피에트로 오를란디는 지금도 여전히 여동생의 행방을 찾고 있다. 라우라 스그로 변호사는 말한다. “침묵은 명확한 인정이다.” 그리고 교황청은 〈바티칸 걸〉 제작진의 인터뷰를 거부하는 등 소름 돋는 침묵을 이어가고 있다.

진실을 밝히려는 자들에게 시간은 적이지만, 숨기려는 자들에게는 아군이다. 사건과 연관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늙어가고 있다.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또 다른 범죄 실화 다큐멘터리 〈천사들의 증언〉도 화제가 되어 수사에 착수했지만, 대부분의 관련자들이 사망하여 수사에 힘을 잃었다.

지난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르쳤던 아르헨티나의 한 학교에서 성추행 사건이 폭로되었다. 피해자들은 언론과의 인터뷰에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교회의 목표는 우리가 지쳐서 모든 것을 잊어버릴 때까지 우리를 지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학대 사실을 계속 덮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할 수 있습니다. 교황이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해결되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에마누엘라의 가족들은 아직도 에마누엘라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연설대로, 범인에게 일말의 인간성이 남아 있다면 이제라도 에마누엘라를 가족에게 돌려주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시간은 범인의 편이고, 범인은 여전히 침묵할 것이다.


바티칸 시국(Vatican 市國)이란?

바티칸 주변 위성 지도
로마시 내의 바티칸 영역을 표시하고, 그 안에 에마누엘라 오를란디가 묻혀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던 독일인 공주의 묘지를 표시하였다. 강 밖의 영역은 에마누엘라의 마지막 행선지였던 음악 학원이다. (출처: 구글 어스)

바티칸 시국은 이탈리아의 로마 시내에 위치한 도시국가로, 0.44km2의 면적에 약 800명(2022년 12월 기준) 정도의 인구를 가진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다. 베드로 대성당, 베드로 광장, 교황의 거처
및 교황청 사무실이 있는 궁전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바티칸을 둘러싼 장벽이 국경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 시내의 경복궁(면적:0.43km2) 이 한 나라가 되는 셈이다. 바티칸 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로마에 거주하는 성직자들과 스위스 근위대, 바티칸 시국에 정주하는 교황청
봉사자와 그 가족들로 전원 가톨릭 신자들이며, 여성의 비율은 약 5.5%(2011년 기준)다.
바티칸 시국의 다른 이름은 교황청이다. 교황청은 전 세계 가톨릭교회를 총괄하며, 교황이 종교의 수장이자 국가의 수장으로서 교황청에 대한 전권을 가진다. 교황 아래로는 수상격인 국무장관 추기경이 있다. 교황청의 재정은 신자들의 기부금, 바티칸 소유의 부동산 임대, 바티칸 은행의 투자 사업, 관광 수입 등으로 충당한다.
바티칸은 이탈리아 안에 위치하지만 독립 국가로서 이탈리아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치외법권 지역이다. 바티칸이 지금과 같은 독립 국가의 지위를 갖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1870년 교황령은 이탈리아 왕국의 영토로 합병되며 모든 세속 영토와 권력, 그에 따르던 세금 수입을 상실했고, 나중에는 교황의 거처에 물이 새고 쥐가 돌아다닐 정도로 바티칸 전체가 폐허화 되었다. 이때 바티칸을 구원한 것은 1929년 파시즘 무솔리니 정부와 체결한 ‘라테란 조약’이다. 무솔리니 정권이 지급한 천문학적인 비자금과 특권적 지위 덕분에 지금의 교황청이 존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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