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으로 끝까지 구원의 길 가길 소망해”
<신앙체험기 520회> 기장신앙촌 이영선 권사
이영선 권사/기장신앙촌
저는 1952년 부산 동대신동에서 2남 6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습니다. 저희 집은 메리야스와 여성복, 군복 등을 만드는 의류 공장 세 곳을 운영하며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너무 어릴 때의 일이라 직접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어머니(故 김용달 권사)로부터 여러 차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왔습니다.
제가 3~4살 무렵, 어머니는 물도 제대로 삼키지 못할 만큼 몸이 쇠약해져 부산도립병원에 검사를 받으러 가셨는데, 위와 갈비뼈 쪽에 암덩어리가 보인다며 석 달밖에 살 수 없다는 말을 들으셨습니다.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다 먹고, 가보고 싶은 곳이 있으면 다 가보라는 의사의 말에, 어머니는 둘째 언니와 함께 장로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께서는 잠결에 무척 아름다운 찬송가 음악종 소리를 들으셨다고 하셨습니다. 평소 장로교회에서 듣던 종소리와는 전혀 달랐고, 스무 날이 넘도록 계속 반복해서 들리니 이상하게 생각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새벽, 장로교회로 가는 길에 꿈에서만 듣던 바로 그 음악종 소리가 실제로 들려왔고, 그 소리를 따라가 보니 그곳이 바로 동대신동 전도관이었다는 것입니다.
처음 전도관에서 새벽 기도를 드리던 날, 어머니는 무릎을 꿇자마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고 하셨습니다. 어릴 때 남의 밭에서 오이를 따 먹었던 일부터 미처 죄라고 여기지 못했던 일들까지 하나하나 떠올랐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장로교회에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경험이었기에 어머니는 그날 이후 장로교회에는 발길을 끊고 전도관으로 예배를 드리러 다니게 되셨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서울에 출장을 간 친척에게서 전화를 받으셨습니다.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님께서 한강모래사장에서 집회를 여셨는데,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꼽추의 등이 펴지는 등 병자들의 병이 낫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곧 부산에서도 집회가 열리니 꼭 가보라는 말에 어머니는 부산 집회에 참석하셨고, 그곳에서 안찰도 받게 되셨습니다.
줄을 서서 안찰을 기다리다가 어머니 차례가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다 나았습니까?” 하고 물으셨다고 합니다. 어머니께서 ‘아픈 곳을 말씀드리지도 않았는데 어찌 아셨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순간 몸이 가뿐해지며 날아갈 듯한 기분이 들어 본인도 모르게 “네, 다 나았습니다”하고 대답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방긋 웃으셨다고 합니다.
그날 이후 물 한 모금 넘기기 힘들었던 어머니는 밥 한 그릇을 드실 수 있을 만큼 건강이 눈에 띄게 좋아지셨습니다. 무언가 이상하다 싶어 병원을 다시 찾아 검사를 받았더니, 의사는 암덩어리가 사라졌다며 깜짝 놀라더랍니다.
어머니는 이 일을 계기로 하나님의 권능을 깨닫고 더욱 감사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에 힘쓰셨고, 저희 가족 모두 부산 전도관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어머니가
하나님께 안찰 받은 뒤 병이 깨끗이 나아
얼마 후 하나님께서 부산에 내려오셨을 때, 어머니는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식사를 대접하셨고, 가족 모두 안찰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저희가 운영하던 공장 세 곳도 직접 둘러보시며 축복해 주셨다고 합니다.
이후 저희 가족은 경북 김천으로 이사해 견사공업주식회사를 운영했습니다. 공장 한쪽에는 제단을 마련해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러 왔고, 종업원들은 아침마다 찬송을 부르며 하루 일을 시작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다 1958년 소사신앙촌 건설이 한창일 때, 저희 가족은 첫 입주자가 되었습니다. 아직 전쟁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던 시절이었지만, 신앙촌 안에는 양옥과 공장들이 반듯하게 줄지어 들어서 있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촌의 모습에 관심을 가진 장관이나 국회의원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신앙촌을 찾았고, 저는 하나님께서 직접 그분들을 안내하시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때론 하나님께서 지나가실 때 아이들이 졸졸 따라다니곤 했는데, 저 역시 그 중 하나였습니다. 학교가 세워지기 전 임시학교를 다닐 때는 등하굣길이나 오디나무 아래에서 오디를 따 먹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오셔서 귀엽다 하시며 코를 살짝 잡아 주시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지금도 제 코를 잡아 주셨던 그 기억이 생생합니다.
얼마 뒤 신앙촌 안에 학교를 짓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학교를 짓는다는 생각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어, 저도 어른들을 따라 조그만 돌을 옮겼습니다. 주먹만 한 돌을 들고 가 내려놓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안수해 주셨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기쁘고 신이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습니다.
소사신앙촌에서 초등학교 3학년 초까지 지내다가, 저희 가족은 다시 김천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가족들이 먼저 내려오고 외할머니께서 마지막으로 짐을 챙겨 오시게 되었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할머니를 특별히 부르셔서 유리병 하나를 축복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병에 물을 담으면 생명물이 된다고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외할머니는 그 병에 물을 담아 아침마다 저희에게 한 컵씩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열 번 정도 마신 뒤 문득 제 마음에 의심이 들었습니다. ‘물을 하나님께서 직접 축복해 주신 것도 아닌데, 이 물이 정말 생명물일까?’
그래서 저는 집에 있던 두 개의 병에 각각 물을 담아 한 병에는 ‘생명물’, 다른 한 병에는 ‘물’이라고 적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약 1년쯤 지난 뒤 다시 확인해 보았습니다. 두 병의 상태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물’이라고 적은 병의 물 색은 누렇게 변하고 이끼가 낀 듯했으며, 뚜껑을 여는 순간 썩은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반면 ‘생명물’이라고 적은 병의 물은 처음 그대로 맑은 상태였습니다. 그제야 저는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병에 담긴 물이 정말 생명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병에 물을 담아 두었더니
생명물이 되었고 1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맑아
1년 후, 저희 가족은 다시 소사신앙촌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여러 차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오만제단에서 예배를 드릴 때면, 제단 한쪽에 이슬처럼 동글동글한 물방울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이곤 했습니다. 예배가 끝난 뒤 만져 보려 하면, 눈을 뜨는 순간 사라지는 일이 여러 번 반복되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제가 본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어머니께 보여 드렸더니, 그것이 바로 이슬성신이라고 하셔서 무척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또 한 번은 예배 중에 꽃향기 같은 향긋한 냄새가 계속 나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께 여쭤보니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향취 은혜라고 하셨고, 그때 저는 ‘아, 하나님의 은혜가 이런 것이구나’ 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 하나님께서는 전국을 다니시며 전도 집회를 여셨습니다. 학교를 쉬는 날이면 저도 그 길을 함께 따라나섰습니다. 집회 장소에 먼저 도착한 특전대 관악부가 찬송가 96장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를 연주하며 “지금 불의 사자 감람나무께서 오시니 모두 가십시다”라고 외치면,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습니다.
저는 어른들의 등을 밀어 드리며 언덕 위 교회까지 안내했는데, 그렇게 오르내리다 보면 어느새 예배실은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배가 시작되면 저희는 예배실 밖에 서서 창문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그 시간은 제게 무엇보다 기쁘고 가슴 벅찬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집회를 알리는 특전대원들의 모습
스무 살 무렵, 저는 소사신앙촌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기장신앙촌에 입사해 약 8년 동안 수출 봉제 부서에서 근무했습니다. 이후 신앙촌상회에서 잠시 일하다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도 LA 제단에 다니기는 했지만, 여러 사업을 운영하며 바쁘게 살아가다 보니 신앙에 온전히 집중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건강이 점점 나빠지면서 문득 삶이 부질없게 느껴졌고, 그럴수록 신앙촌이 더욱 그리워졌습니다. 결국 저는 15년간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귀국한 뒤에는 다시 기장교회를 다니며 소비조합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몸이 편찮으신 어머니와 함께 미국에 다녀올 일이 있었습니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는데, 신기하게도 제 귓가에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니’라는 찬송가가 계속 들려왔습니다. 그 찬송은 미국에 머무는 동안은 물론, 집으로 돌아오는 길까지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에 계시는 동안 어머니는 호흡기 장애로 숨 쉬기조차 힘든 상황이었는데, 그때 어머니 귀에 “걱정하지 마. 기장까지 내가 데려다줄게”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셨다고 합니다. 그 말씀 그대로 저희는 무사히 기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이어오시던 어머니께서는 1999년, 80세를 일기로 운명하셨습니다. 어머니의 장례는 기장신앙촌 장례반 권사님들께서 도와주셨습니다. 평소 간경화를 앓고 계셨지만, 입관할 때 생명물로 씻겨 드리고 입에도 넣어 드리자 얼굴이 환하게 피었고, 굳어 있던 몸도 부드럽게 움직여졌습니다. 많은 분들이 함께해 주신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어머니를 평안히 보내드릴 수 있어 감사한 마음뿐이었습니다. 30년 전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생명물로 온몸을 씻겨 드리자 얼굴이 환하게 피며 평안해 보이셨습니다. 두 분 모두 생명물로 환하게 피어 가신 모습을 직접 보며, 저는 하나님과 생명물의 권능을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후 저는 신앙촌 여러 부서를 거쳐 다시 기장신앙촌 소비조합원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한 번은 신앙촌 간장 선물세트 영업으로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이다가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누군가 제 등을 살짝 밀어 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고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이후 더욱 힘을 내어 일할 수 있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하나님께서 곁에 함께 계시는 듯 등을 살짝 밀어주셔
소비조합원으로 일하며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일들을 되새겨 보게 됩니다. 저희에게 기쁨을 주시고 일할 힘과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시면서도 더럽고 추한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해 그 모든 것을 희생하셨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닫게 됩니다.
건강을 허락해 주신 이 시간 동안, 기장신앙촌 소비조합원으로서 맡겨진 사명을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다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오늘도 은혜를 전하며, 죄 씻음 받아 천국에 이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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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로 기도드릴 때 맡아지던 향취 은혜, 지금도 잊을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