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눈부신 흰 옷을 입은 분이 저를 불러
이지수 집사(1) / 기장신앙촌저는 1922년 평안북도 용천군 내중면에서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저희 집은 농사를 크게 지어 살림살이가 넉넉한 편이었고, 어머니는 전형적인 양반집 자손으로 자식 교육에 엄격한 분이었습니다. 당시는 검불을 땔감으로 쓰던 때였는데, 간혹 남의 집 검불이 바람에 날려 우리 집 마당에 들어오면 어머니는 검불 하나도 남의 것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시며 문밖으로 내보내셨습니다. 어머니의 교육으로 형제들 모두 어릴 때부터 말과 행동을 반듯하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10년 사이에 두 번이나 꿈 속에서 생생하게
`내가 성신이야. 내가 주님이야. 내가 의인이야.` 하시던 분이
미소를 머금고 인자하게 바라보시는 박 장로님 바로 그 분이셨다
그 후 고향에서 30리 떨어진 용천군 북중면으로 시집간 저는 이웃의 할머니를 따라 장로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네 살배기 아들 영남이를 병으로 잃은 뒤로는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받고자 더욱 열심히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러던 1947년 어느 날, 영남이 생각에 눈시울을 적시다 잠이 든 저는 이런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꿈속에서 제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갑자기 하늘이 양쪽으로 열리더니 제 몸이 떠올라 열려진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밝고 환한 그곳에는 눈부시게 하얀 옷을 입으신 젊은 분이 편안히 앉으셔서, 거룩하고 아름다운 그 모습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제가 영남이를 잃고 슬퍼하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인자한 음성으로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으로 본인을 가리키시며 “내가 성신이야. 내가 주님이야.”라고 하셨습니다. 꿈이 하도 생생해서 그 일을 생시에 겪은 것처럼 느낄 정도였고, 세상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그 모습이 잠에서 깬 후에도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꿈속의 광경을 생각하면 할수록 놀랍고 신기할 뿐이었습니다.
그 후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 이남으로 피난을 내려왔는데, 부산에서 국군에 징집된 남편은 생사도 모르게 되었으며, 저는 어린 아들 둘과 함께 피난민 수용소를 전전해야 했습니다. 전쟁 통에 가산을 다 잃은 저는 전쟁이 끝난 후 경기도 평택군 서정리에 정착해 큰 농가에서 일하면서 생계를 꾸려 갔습니다. 빠듯한 생활이었지만 틈을 내어 집 근처의 서정리 감리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1956년 2월 어느 날, 잠을 자는데 전에 꿈속에서 뵈었던 그 젊은 분이 다시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이전과 같이 흰옷을 입으신 그분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시며 “내가 의인이야.” 하시고는 “네가 나를 찾아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인자한 음성과 동작 하나까지 10여 년 전 꿈에서 뵈었을 때와 완전히 똑같은 모습이셔서, 어떻게 같은 분을 두 번이나 꿈에서 뵐 수 있는지 참으로 신기했습니다. 저는 그분이 찾아오라고 하셨으니 꼭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피난 시절 서울에 잠시 살면서 영락교회에 다녔을 때 그 교회에서 유명한 목사들이 설교하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영락교회에 가면 그분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울행을 결심하고 일하는 농가에 열흘간 휴가를 내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서 내리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저는 영락교회 가는 길을 잘 몰랐기 때문에 그날 밤은 주변 교회에서 지내고 다음 날 찾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큰길을 따라 걷다가 어느 할머니에게 교회를 물었더니 근처에 있는 전도관이라는 곳에 가 보라고 했습니다. 그곳은 박태선 장로님이 세우신 교회로 날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온다고 했습니다.
전도관에 도착한 저는 안내하는 여자 분에게 제 사정을 설명하면서 여기서 밤을 지내고 다음 날 새벽예배를 드린 후 떠나겠다고 했더니, 여자 분은 그러라고 하면서 내일 새벽예배를 박태선 장로님께서 인도하신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저는 예배실을 가득 메우고 철야 기도를 하는 사람들 속에서 ‘꼭 그분을 찾게 해 주세요.’ 하는 기도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다음 날 새벽예배 때 단상 옆의 문이 열리며 어떤 남자 분이 들어오시기에 저는 ‘저분이 박 장로님인가 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제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시는 순간, 저는 “아이고 하나님!” 하며 그 자리에 엎드리고 말았습니다. 미소를 머금고 인자하게 바라보시는 박태선 장로님은 제가 꿈속에서 두 번이나 뵈었던 바로 그분이셨던 것입니다. 저는 바로 앉을 생각도 못하고 엎드린 채로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그때 찬송을 인도하시던 박 장로님께서 잠깐 멈추시고는 “엎드린 사람 이제 그만 일어나세요.” 하시더니 “내가 불러냈지요.”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눈물이 더욱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려 제 치마와 앉아 있던 마룻바닥까지 흥건하게 적셨습니다. 저는 놀라움과 감격으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고 오직 뜨거운 눈물만이 쉴 새 없이 흘렀습니다.
그날부터 남은 휴가 동안 계속 전도관에서 예배드리며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습니다. 휴가가 끝나면 서정리로 돌아가야 했기에 밥 먹는 시간, 쉬는 시간도 아까워 예배실에서 떠나지 않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내가 성신이야. 내가 주님이야. 내가 의인이야.” 하시던 음성이 자꾸 떠오르며, 제가 어떻게 이런 복을 받았는지 그 기쁨과 감사함을 형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배고픈 것도 모르고 꿇어앉은 다리가 아프다는 느낌도 없이 평안하고 즐거운 가운데, 그토록 소중한 시간이 하루하루 줄어드는 것만이 안타까울 뿐이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