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가장 큰 위로를 주신 하나님

박근성 권사(2)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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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저는 영주 장로교회 계창주 목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전도관에 갔더니 구원을 얻으려면 은혜를 받아 죄를 씻어야 된다고 합니다.”라고 했더니, 계 목사가 벌컥 화를 내면서 “그런 말 듣지 말아요. 교회 문 안에 들어오면 누구든지 다 천국에 가는 거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 생각에 ‘서울에서 부산을 가려고 해도 기차표를 사고 기차를 타고 목적지까지 가야 하는데, 어떻게 막연히 교회에만 들어온다고 해서 천국에 갈 수 있겠나.’ 하는 의구심이 생겨났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갈급하던 저는 덮어놓고 교회만 나오라는 목사의 대답이 참으로 허탈하고 실망스러웠고, 박 장로님께서 강조하시는 대로 “구원을 얻으려면 죄와 상관없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시는 말씀이 훨씬 설득력 있게 느껴졌습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시원한 물이
쏴 하며 끝없이 흐르는 것을 느껴 생수의 은혜를 받고 나니
마음의 고통은 사라지고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만 같아

전도관에서 철야 기도를 한 지 9일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하나님, 저는 꼭 천국에 가고 싶습니다. 이곳에 정말 하나님이 계시다면 저에게 답을 주세요.’ 하며 안타까이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온몸이 후끈후끈해지면서 머리카락이 타는 것 같은 고약한 냄새가 나기에 ‘이상하네. 어디서 이런 냄새가 나지?’ 하면서 사방을 둘러봐도 그런 냄새가 날 만한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다시 머리를 수그리고 기도를 하는데 한참 후에 그 지독한 냄새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더니 아주 향긋하고 좋은 냄새가 진동을 했습니다. 주변에 화장한 사람이 있는가 싶어서 눈을 뜨고 살펴봤지만 철야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화장을 할 리가 만무한 일이었습니다. 어디서도 맡아 보지 못한 좋은 향기 속에서 마음이 포근하고 평안해지는 순간, 한 집사님이 죄 타는 냄새와 향취 은혜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신의 불로 우리의 죄를 태우실 때 죄가 타는 지독한 냄새를 맡을 수 있으며, 하늘의 은혜를 내려 주시면 형언할 수 없이 좋은 냄새가 난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 은혜를 분명하게 체험하면서 ‘이것이 은혜구나!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구나!’ 하며 쏟아지는 눈물을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속으로 계속 기도를 드리며 기쁨에 벅차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전도관 교인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남편의 친구인 계기복 씨가 집에 찾아와서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저는 영주교회 교인이자 신학생인 그분에게 “전도관에 다녀 보니 감람나무라고 이야기하던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분이 감람나무란 신·구약 성경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기에, 제가 성경을 보면 ‘감람나무는 이슬 같은 은혜를 내리는 자’라는 것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당황하여 손사래를 치면서 “나는 몰라요, 몰라.” 하며 자리를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제가 친구를 곤란하게 했다며 무척 화를 내었고 그때부터 전도관에 다니는 것을 반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계창주 목사가 영주교회 교인들에게 전도관이 이단이라며 절대 가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당시 영주교회에서는 목사를 물심양면으로 받드는 장로님을 비롯해 12명이 전도관과 영주교회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는데, 목사가 그렇게 말한 뒤부터는 그분들 모두 영주교회를 완전히 끊어 버리고 전도관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후 남편이 늑막염으로 병석에 앓아눕고 저는 쌍둥이 딸까지 출산하게 되면서 저희 집 형편이 말로 다 할 수 없이 어려워졌습니다. 옛말에 “아이를 낳고 나면 소가 눈만 흘겨도 쓰러진다.”라고 하는데, 저는 출산 후에 끼니를 잇기도 어려우니 도저히 기운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배고픔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그때 절절히 겪었습니다. 눈앞이 깜깜하여 목을 놓아 울면서 하나님께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이제 어떻게 합니까. 가장은 저렇게 아프고 저는 일어날 수가 없으니 어린것들 데리고 어떻게 살아갑니까.’ 몸부림치며 기도하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시원한 물이 쏴 하면서 끝없이 흐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배고픔과 고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온몸이 가뿐하여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이전에 전도관 식구들에게 이야기를 들었기에 그것이 생수의 은혜가 연결되는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이 어려움을 이기라고 은혜를 주십니까. 이렇게 저의 기도를 듣고 계십니까.’ 눈물은 더욱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때부터 24시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시원하며 모든 근심과 괴로움이 사라지고 평안과 기쁨만이 마음속을 가득히 채웠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가장 큰 위로를 주신 하나님. 그 은혜는 제 평생에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 저는 쌍둥이 딸들에게 입힐 것이 여의치 않아서 육촌 언니에게 부탁해 보았지만 모두 살기가 어려운 시절이라 언니도 저를 외면했습니다. 그 후 안수를 받고자 쌍둥이를 안고 원효로 하나님 댁에 갔을 때, 사모님과 할머님이 아이들을 받아 안으시면서 “이 어려운 때에 한 명도 아니고 둘씩이나 키우려니 얼마나 힘들겠나.” 하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곧바로 방에 들어가신 사모님이 보자기에다 깨끗한 옷을 한아름 싸서 주시는데, 제 손을 꼭 잡으시며 아이들을 잘 키우라고 하시던 그 따뜻한 음성이 지금도 마음에 울립니다.

1957년 4월에는 용산구 청암동에 이만제단이 완공되어 빈자리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 전에 제가 영주교회 계창주 목사에게 “박 장로님이 이만 명을 수용하는 이만제단을 지으신다고 합니다.”라고 했을 때, 목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니, 박 장로가 무슨 수로 이만 명을 모아 오나?” 하며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런 목사의 생각과는 달리, 한강이 굽이치는 언덕에 우뚝 세워진 이만제단에는 날이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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