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종교 탐구 <58>가톨릭이 축복한 죽음의 항해, 악마의 노역, 그리고 교황의 사과 선언①
교황 레오 14세가 과거 노예제도에 직접 관여했던 가톨릭교회의 과오를 인정했다. 지난달 25일 발표한 새 회칙 ‘마니피카 후마니타스 (Magnifica Humanitas, 위대한 인간성)’에서 “고대와 중세 시대에는 교회 기관들조차 노예를 거느리고 있었다”, “로마 교황청이 여러 차례 개입하여 유럽 군주들의 인간 예속을 정당화해 주었고, 특정 시기에는 이교도들을 노예로 삼을 권한을 부여하기도 했다”며 교황청의 역사적 책임을 시인한 것이다. 외신들은 이를 두고 이례적이라 평가했다. 과거 다른 교황들도 노예제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 적은 있었으나, 그 책임을 교회가 아닌 신자들의 잘못으로 표현해왔다. 그러나 이번 회칙에서는 가톨릭 국가들의 영토 확장과 이교도 정복 과정에서 교황이 직접 노예화 승인 칙령을 내려 정당성을 부여했다는 구조적 본질을 인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교황의 이번 사과 선언으로 피해자들에게 충분한 위로와 보상이 되었으며, 가톨릭의 과오가 청산될 수 있는 것일까. 이번 『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노예무역이 인류사에 남긴 비인간적 만행과 그 참상의 기록을 통해, 가톨릭과 깊숙이 얽힌 노예무역의 역사를 재조명해 본다.
▣ 역사상 가장 악랄하고 잔혹했던 노예무역
오늘날 노예제의 역사를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대개 근세 이후 대서양을 건넌 흑인 노예무역일 것이다. 그러나 노예제는 근세 대항해 시대 때 갑자기 생겨난 제도가 아니다. 인류 역사 초기부터 전쟁 포로와 채무자, 정복당한 민족, 낮은 신분을 노예로 삼는 관습은 여러 문명권에 존재했다.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에도 노예제가 있었고, 중동과 아프리카, 아시아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예속과 강제 노동이 존재했다. 그런데 왜 수많은 노예제의 역사 가운데, 대항해 시대의 흑인 노예무역이 유독 강하게 기억되고 사과의 대상으로 소환되는 것일까?
아프리카 출신 독일의 교회사학자 피우스 아디엘레는 대서양 노예무역을 이전까지와 차원이 다른 악행으로 분류하며 그 이유를 ‘유례없는 규모와 잔혹함, 인종차별, 종교의 승인과 축복’으로 들었다. 유럽 대륙 전체가 수백 년에 걸쳐 가담한 그 전례 없는 규모와 잔혹함도 다른 노예제와 구별되는 특징이었지만, 피부색을 기준으로 아프리카 흑인들을 인간이 아닌 상품으로 취급하고, 그들의 생명과 자유, 가족과 존엄을 송두리째 빼앗았다는 점, 종교가 이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축복하고 주도했다는 점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아디엘레는 이 시기를 “아프리카인의 인간성을 부정하는 끝없는 구덩이가 인종·종교의 우월주의라는 삽으로 파헤쳐진 시대”라 표현했고, 나이지리아의 종교·문화 연구기관 윌런 연구원의 테오필루스 오케레 교수는 “유럽 기독교의 잔혹 행위, 교황과 신학이 승인한 비인간적 악행이 아프리카에 인명 손실과 행복, 자유, 존엄성의 상실을 안겨준 400년”이라 표현한 바 있다. 이들이 표현한 당시의 참상은 실제 역사 속에서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 그 비극은 노역을 시작하기도 전, 해변으로 끌려와 노예선에 승선하는 순간 이미 시작되었다. 그 노예들에게 ‘승선’이란 표현은 적절치 않을 것이다. 그들은 배에 오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존엄을 빼앗긴 채 화물처럼 그저 실려 갔기 때문이다.
▣ 축복받은 죽음의 노예선에 실려가다
15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노예가 된 1,240만 명 중 산 채로 아메리카 대륙에 ‘배송’된 ‘검은 상품’은 약 1,000만 명에 불과했다. 바다를 건너는 운송 과정에서 약 6분의 1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토록 참혹한 사망률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노예를 인간이 아닌 팔아치워야 할 상품으로만 취급했던 당시 유럽인들의 인식 때문이었다. 서울대 서양사학과 주경철 교수의『문명과 바다』를 비롯해 여러 서적과 기록에는 이른바 ‘중간항해(Middle Passage)’라 불린 이 과정의 참상이 다음과 같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아프리카 해안에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까지 흑인 노예들을 강제 운송하는 단계를 ‘중간항해’라 한다. 이 항해는 대체로 50~80일 정도 걸리지만 길면 6개월까지 걸리는 수도 있었다. 이미 아프리카 내륙에서 해안까지 먼 거리를 끌려와서 몹시 쇠약해진 사람들이 다시 장기간 배를 타는 것은 극도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노예무역에 사용되는 배들은 대개 100~300톤 급의 소형 선박들이었는데, 오직 상업 이익만을 고려하는 상인들은 이 작은 배 안에 가능한 한 많은 노예들을 태우려고 했다. 심한 경우에는 배 밑바닥의 짐칸에 500명의 노예들이 꾸역꾸역 채워지기도 해서, 마치 통조림 속의 정어리처럼 빽빽하게 포개져서 바다를 건너야 했다.<자료1> 숨 막힐 듯 다닥다닥 겹쳐 누운 노예들은 관 속에 든 시체와 다름없었다. 선창의 공기는 너무나 덥고 체취로 가득 차 있었다. 그곳의 공기는 너무 탁해서 촛불을 켜고 들어가면 산소 부족으로 불이 꺼질 정도였다. 멀미로 인한 구토와 용변 문제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는데, 모두 사슬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이동이 쉽지 않았고, 많은 경우 자기 자신, 혹은 남의 용변과 토사물 위에 누운 상태로 항해했다.

<자료1> 노예선에 빽빽히 화물처럼 적재된 노예들
(출처: 줄리어스 레스터 著『노예선에서 자유의 길로』의 삽화, slaveryimages.org, 위키피디아)
노예선 생활을 견디다 못한 어떤 노예들은 음식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차라리 곡기를 끊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상품으로서의 가치 때문에 노예들의 건강관리에 민감했던 선장은 선원들을 시켜 막대기, 깔때기 등을 이용해 노예들의 목구멍에 강제로 음식을 쑤셔 넣었다. 바다로 뛰어들려는 노예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선장들은 그런 행위를 시도한 노예들의 손발을 잘라 다른 노예들에게 겁을 주기도, 흑인들끼리 서로 감시하게 만들기도 했고, 갑판을 벗어날 수 없도록 아예 사슬로 묶어놓기도 했다. 다만 이러한 단속도 상품 가치가 있는 노예들에 한한 것이었다.
열악한 상황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질병과 전염병에 시달렸고, 노예들을 검사하러 온 사람들은 때때로 죽은 노예들을 찾아내 시체를 사슬에서 풀어내야 했다. 죽거나 질병에 걸려 상품 가치가 없어진 노예들은 가차 없이 바다에 던져졌다. 식량과 물이 부족할 때도 노예부터 바다에 던져졌다.<자료2> 리버풀의 노예무역 책임을 다룬 책『리버풀과 노예제도』에서는 한 영국 노예선 선장이 병든 노예들을 살펴본 뒤 선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고 생생히 전한다. “내 생각엔 이 검둥이들은 바다에 던져버리는 게 낫겠어. 그러면 우리에게 공간도 더 생기고 상어 먹이도 되겠지. 보니 상어들이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군.” 던져진 노예들은 대서양 바다를 따라다니던 상어들에게 순식간에 뜯어먹혔다.

<자료2> 노예선에서 바다로 던져지는 흑인 노예들
(출처: 위키미디어)
이렇게 인간적 연민이 완전히 결여된 처우 속에서, 영양실조, 탈수, 전염병, 트라우마, 적절한 의료 처치의 부재 등으로 인해 노예들 사이에서 높은 사망률이 나타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 위험한 항해를 견뎌내야 했기에, 노예 상인들은 주로 젊고 건강한 남성들을 차출해갔다. 그 결과 아프리카의 미래가 될 인력이 대량으로 유출되었고, 지역 공동체의 생산 기반과 사회적 재생산 구조가 무너졌다. 노예무역은 아프리카가 장기간 발전의 기회를 잃고 저개발 상태에 머무르게 된 중요한 역사적 원인 중 하나였으며, 단순한 과거의 비극이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아프리카 대륙에 깊은 상흔으로 남아 있는 역사적 범죄였다.
이 범죄의 현장을 목격한 자들은 노예선을 ‘떠다니는 지하 감옥’, ‘움직이는 관’ 등으로 불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악명 높은 노예선들의 이름은 유럽인들에게 더없이 성스럽고 거룩한 이름을 하고 있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휴 토머스의 책『노예무역』에 따르면, 서아프리카 대서양 연안에서 브라질과 스페인령 아메리카로 흑인 아프리카인들을 실어 나른 포르투갈의 모든 대서양 노예선은 가톨릭식 이름을 달고 있었다. 배의 이름이 로마 가톨릭교회 성인들의 이름을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많은 대서양 노예선들이 ‘자비의 성모호’와 같이 마리아의 이름을 달고 있거나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성 미카엘, 성 조지 같은 성인들의 이름을 달고 있었다. 성인을 넘어 ‘선한 예수호’처럼 기독교의 신인 예수의 이름을 단 배들도 있었다. 휴 토마스는 “한 노예무역 회사의 경우 노예선 43척 중 두 척을 제외하고는 모두 성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고 기록했다. 이 밖에도 영국 왕실의 대서양 노예선 ‘뤼베크의 예수호’는 일명 ‘좋은 배 예수’라 불렸으며,<자료3> 인도양 노예무역선 중에는 여러 명을 합친 ‘예수·마리아·요셉호’라는 이름의 배도 있었다.

<자료3> 16세기 노예선 ‘좋은 배 예수’ (출처: 내셔널지오그래픽)
노예선의 그 가톨릭적인 이름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일례로 수백 명의 흑인 노예들을 실어나른 ‘좋은 배 예수’의 선장 존 호킨스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선원들에게 ‘매일 하나님을 섬기고 서로 사랑하라’고 강조했으며, 배 안에서는 아침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씩 예배가 열렸다. 이렇듯 실제 노예무역을 자행한 국가들, 그 선장과 선원들의 종교는 대부분 가톨릭교회를 비롯한 기독교였던 것이다. 독일의 교회사학자 피우스 아디엘레는 “교회는 단순히 노예제를 방관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가해자”였다며, 한스 프라이어의 『유럽의 세계사』와 크레펠의 연구를 인용해 “가톨릭 성인의 이름을 단 노예선에는 수도사와 사제들도 타고 있었으며, 그들은 출항 전에 노예선에 성수를 뿌리며 축복했다.”고 지적했다.
성모와 성인, 예수의 이름을 한 수많은 노예선의 돛과 깃발에는 그리스도 기사단의 십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 십자가 깃발 아래에서 사제들이 성수를 뿌리며 축복하는 동안 배의 밑창에서는 아프리카 노예들이 쇠사슬에 묶인 채 죽음의 항해를 견디고 있던 것이다.
▣ 악마가 부리는 죽음의 노역
이 죽음의 항해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들을 기다린 것은 자유가 아니었다. 배 밑창을 벗어난 아프리카 흑인들은 이제 농장과 광산으로 끌려가, 채찍과 굶주림 속에서 또다시 죽음의 노역을 견뎌야 했다.<자료4,5>

<자료4> 17세기 포르투갈의 노예 처벌
나무에 매달아 채찍질하는 모습과 다리가 포박(좌), 절단된(우) 모습 (출처: slaveryimages)

<자료5> 채찍질 흉터투성이의 등
1863년 노예에서 탈출한 고든씨가 의료 검진 중
등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 미국 의회 도서관)
노예제 폐지론자 시어도어 드와이트 웰드의 책『미국 노예제의 실상: 천 명의 증언』에 따르면,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은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고, 영양실조에 걸렸으며, 비참한 옷차림과 거처에서 지내며 충분한 잠도 자지 못했다. 그들은 종종 목에 돌기가 달린 쇠목걸이를 차고, 발에는 무거운 쇠사슬과 추를 매달고 질질 끌며 밭에서 일해야 했다.” 작은 실수라도 눈에 띄면, 그들은 사악하고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방식으로 ‘정의’라는 이름의 처벌을 받았다. “그들은 끔찍할 정도로 매질을 당하고, 찢어진 살점에 붉은 고춧가루가 문질러졌으며, 고통을 가중시키기 위해 뜨거운 소금물과 기름이 상처 위에 부어졌다.” 조금이라도 주인에게 불복종하는 기색을 보이면 다른 종류의 가혹한 처벌과 신체 절단도 자행되었다. 남성 노예는 성기가 잘리는 것 외에도 “그들의 귀는 자주 잘려 나갔고, 사지는 잘리고, 눈은 뽑히고, 뼈는 부러지고, 살갗은 뜨거운 인두로 지져졌다.” 이러한 가혹한 노동과 학대로 서인도 제도와 북미의 플랜테이션 지역으로 끌려간 노예들의 평균 수명은 7년에 불과했다. 하지만 노예 소유주들은 노예들의 처우를 개선하기보다는 더 많은 노예들을 사들이며 노동력을 충당했다. 그들에게 노예는 인격을 지닌 인간이 아니라, 닳아 없어지면 새로 사 오면 되는 소모품에 불과했다. 그들이 자행한 행위는, 마치 악마의 지배를 받는 듯한 잔혹함 그 자체였다.
20세에 노예에서 탈출한 노예제 폐지론자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자서전『미국 노예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삶에 대한 이야기(Narrative of the Life of Frederick Douglass, an American Slave)』의 부록에서 “부패하고, 노예 소유주이며, 여성을 채찍질하고, 아기를 유린하고, 편파적이고 위선적인 기독교를 증오한다”며 기독교는 “악마를 섬기기 위해 하늘 궁정의 제복을 훔쳐 입은 분명한 사례”라고 비난했다. 이어서 자신이 경험한 기독교의 모순적인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발했다.
“나를 둘러싸고 도처에 존재하는 종교적 허식과 과시, 그리고 끔찍한 모순들을 생각하면, 나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혐오감에 휩싸인다. 우리에게는 목사인 인간 납치범들이 있고, 선교사인 여성 채찍질꾼들이 있으며, 교회 신자인 영아 약탈자들이 있다. 평일에는 피로 얼룩진 소가죽 채찍을 휘두르는 사람이 일요일에는 설교단에 오른다. 매주 내 노동의 대가를 빼앗아 가는 사람이 일요일 아침에는 생명의 길과 구원의 길을 보여 주는 지도자가 된다. 내 누이를 매춘으로 팔아넘긴 사람이 경건하게 순결을 옹호하는 자로 나선다.
우리는 도둑이 도둑질을 반대해 설교하고, 간음자가 간음을 반대해 설교하는 모습을 본다. 교회를 짓기 위해 남자들이 팔리고, 복음을 지원하기 위해 여자들이 팔리며, 가난한 이교도들에게 줄 성경을 사기 위해 아기들이 팔린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라고 한다. 노예 경매인의 종소리와 교회 종소리가 뒤섞여 울려 퍼지고, 상심한 노예의 애통한 울부짖음은 경건한 주인의 종교적 외침에 묻혀버린다 (…) 거래상은 피 묻은 금을 바쳐 설교단을 지원하고, 설교단은 그 대가로 그의 지옥 같은 사업을 기독교의 옷으로 덮어 준다. 여기서 종교와 강도질은 서로의 동맹이 된다. 천사의 옷을 입은 악마들이 있고, 지옥이 천국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I therefore hate the corrupt, slaveholding, women-whipping, cradle-plundering, partial and hypocritical Christianity of this land. […] Never was there a clearer case of “stealing the livery of the court of heaven to serve the devil in.” I am filled with unutterable loathing when I contemplate the religious pomp and show, together with the horrible inconsistencies, which every where surround me. We have men-stealers for ministers, women-whippers for missionaries, and cradle-plunderers for church members. The man who wields the blood-clotted cowskin during the week fills the pulpit on Sunday, and claims to be a minister of the meek and lowly Jesus. The man who robs me of my earnings at the end of each week meets me as a class-leader on Sunday morning, to show me the way of life, and the path of salvation. He who sells my sister, for purposes of prostitution, stands forth as the pious advocate of purity. […] We see the thief preaching against theft, and the adulterer against adultery. We have men sold to build churches, women sold to support the gospel, and babes sold to purchase Bibles for the poor heathen! all for the glory of God and the good of souls! The slave auctioneer’s bell and the church-going bell chime in with each other, and the bitter cries of the heart-broken slave are drowned in the religious shouts of his pious master. Revivals of religion and revivals in the slave-trade go hand in hand together. The slave prison and the church stand near each other. The clanking of fetters and the rattling of chains in the prison, and the pious psalm and solemn prayer in the church, may be heard at the same time. The dealers in the bodies and souls of men erect their stand in the presence of the pulpit, and they mutually help each other. The dealer gives his blood-stained gold to support the pulpit, and the pulpit, in return, covers his infernal business with the garb of Christianity. Here we have religion and robbery the allies of each other —devils dressed in angels’ robes, and hell presenting the semblance of paradise.)”
당시 유럽인들은 어떻게 같은 인간에게 이런 끔찍한 만행들을 어떠한 죄책감도 없이 저지를 수 있던 것일까? 대서양 흑인 노예무역을 가능하게 한 교황과 가톨릭교회의 제도적 책임을 추적한 학술서『교황들, 가톨릭교회와 흑인 아프리카인의 대서양 노예화 1418-1839』에서는 그러한 만행을 주도하고 실행한 것은 기독교 국가들이며, 이를 가능하게 한 원흉으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 교황들의 칙서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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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종교 탐구 <58>가톨릭이 축복한 죽음의 항해, 악마의 노역, 그리고 교황의 사과 선언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