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종교 탐구 <58>가톨릭이 축복한 죽음의 항해, 악마의 노역, 그리고 교황의 사과 선언②
▣ 교황들의 칙서로 노예제를 축복하다
아프리카 흑인들에 대한 이러한 잔혹 행위와 대학살의 가해자는 지금까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가톨릭 왕과 군주들(Catholic kings and princes), 그리고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웨덴, 덴마크 등 다른 주요 유럽 기독교 국가 정부로만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도덕적 권위를 지녔어야 할 교회와 교황이 오히려 이러한 잔혹 행위를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축복하고 승인하며 노예제의 확산과 유지를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00년 4월호 뉴 아메리카 매거진은 대서양 노예무역에 교회의 역할을 보도하면서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아프리카 최초의 유럽 노예 상인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1455년에 교황의 축복을 구하고 받았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윌런 연구원의 오케레 교수도 “유럽이 아프리카에 가한 중대한 불의를 시작하고, 조장하고, 축복하는 데 있어 교회와 성직자들의 역할은 이보다 더 명확할 수 없다.”며 교회가 노예무역을 조장하고 아프리카 흑인 노예 제도의 오랜 악행에 축복을 내렸다고 지적했다.
12세기 십자군 원정을 비롯해 가톨릭 국가들이 이교도의 땅을 정복했을 때, 이를 정당화하고 축복한 교황 칙서들은 여러 차례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이며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칙서로는 1452년과 1455년 교황 니콜라스 5세가 발행한「둠 디베르사스(Dum Diversas)」와「로마누스 폰티펙스(Romanus Pontifex)」, 1493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발행한「인테르 카에테라(Inter Caetera,)」가 꼽힌다. 1452년「둠 디베르사스」가 이교도를 침략하고 정복해 영구 노예로 삼을 수 있다는 원칙적 허가를 내린 문서였다면, 1455년「로마누스 폰티펙스」는 그 권한을 더 구체화한 문서였고, 1493년「인테르 카에테라」는 새로 발견된 땅에 대한 스페인의 권리를 인정하는 문서였다. 이러한 칙서들로 인해, 유럽 기독교 국가들이 이교도의 땅을 빼앗고 사람을 노예로 삼는 행위가 교황의 권위로 정당화되었고, 그들은 오히려 이교도를 벌하고 기독교를 선교하는 공로로 죄의 사면과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다.
다음은 1452년 교황 니콜라스 5세가 발행한「둠 디베르사스」의 주요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여기에는 이교도 침략과 노예화의 권한을 부여하고, 그 폭력을 신앙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이를 거역하는 자에게는 신의 진노를 내세워 위협하는 구조를 관찰할 수 있으며, 이 구조는 이후 발행된 비슷한 유형의 정복·노예화 문서들의 원형이 되었다.
“우리는 사도적 권위를 부여받아 이 문서를 통해 귀하에게 사라센인(무슬림)과 이교도, 그리고 그리스도의 원수인 모든 불신자들을 그들이 어디에 있든 침략하고 수색하며 사로잡고 정복할 수 있는 완전하고 자유로운 권한을 부여한다. 또한 그들의 왕국과 공국, 토지와 도시, 그 밖의 모든 재산을 차지하고, 그들을 영구적인 노예로 삼을 수 있도록 허가한다. 나아가 그들의 모든 통치권과 소유물, 모든 재산을 귀하와 귀하의 후계자, 곧 포르투갈 왕위에 영구히 귀속시킬 수 있도록 허가한다. (…) 우리는 귀하에게 죄 사함을 위한 완전한 사면을 허락하며, 또 이 신앙의 싸움에서 당신 편에 서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적들을 공격하는 데 힘쓰는 지휘관과 군인들, 그리고 다른 그리스도인 신자들에게도 같은 사면을 허락한다. (…) 누구도 이 칙령을 무모하게 거역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만일 누군가 감히 이를 시도한다면, 그는 전능하신 하느님과 복된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진노를 사게 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tibi Saracenos, et Paganos, aliosque infideles, et Christi inimicos quoscunque … Regna, Ducatus, Comitatus, Principatus, aliaque Dominia, Terras, Loca, Villas, Castra… invadendi, conquerendi, expugnandi, et subjugandi, illorumque personas in perpetuam servitutem redigendi … plenam, et liberam, auctoritate Apostolica, tenore praesentium concedimus facultatem (…) Duces, Principes, Barones, Milites, aliquique Christi fideles … in hac fidei pugna concomitants … plenariam remissionem omnium, et singulorum peccatorum, criminum, delictorum, et excessuum … devotionis tuae eadem auctoritate indulgemus. (…) Nulli ergo omnino hominum liceat hanc paginam nostrae concessionis, restitutionis, voluntatis, indulti, et decreti infringer, vel ei ausu temerario contraire. Siquis autem hoc attentare praesumpserit, indignationem Omnipotentis Dei, ac Beatorum Petri et Pauli Apostolorum se noverit incursurum.)”
이러한 권한 부여는 니콜라스 5세 한 사람의 칙서로 끝나지 않았다. 이후 칼릭스투스 3세, 식스토 4세, 알렉산데르 6세, 레오 10세 등 후대 교황들도 가톨릭 군주국에 부여된 정복과 노예화의 권리를 확인하거나 강화하는 문서들을 잇달아 발행했다. 결국 이교도 침략과 흑인 아프리카인 노예화는 일회성 허가가 아니라, 여러 교황의 문서를 거치며 반복적으로 승인되고 제도화된 권한이었다.
1548년 교황 바오로 3세는 인신매매를 승인하는 자의교서를 내리기도 했다. 바오로 3세는 사도적 권위를 내세우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는 사목적 직무에 따라 하느님의 도움으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리스도인들이 노예 부족으로 겪는 어려움을 기꺼이 돕고자 하며, 노예가 많을수록 상속 재산이 풍족해지고, 농지가 더 잘 관리되며, 도시가 확장된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로마인이든 비로마인이든, 세속인이든 성직자든, 신분이나 지위, 계급,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남녀를 불문하고, 다른 곳에서 관례대로 노예를 자유롭고 합법적으로 매매하고, 노예에 관한 계약을 체결하고, 노예를 공개적으로 소유하고, 그들의 노동을 이용하고, 그들에게 맡겨진 일을 하도록 강요할 수 있도록 명합니다. 그리고 사도적 권위로, 이 문서들의 취지에 따라, 자유를 호소하는 노예들은 결코 그들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지 못할 것이라고 영구히 제정하고 선포합니다.(By reason of our Pastoral Office, we gladly attend to the troubles due to the lack of slaves of individual Christians as far as we can with God’s help, and having regard to the fact that the effect of a multitude of slaves is that inherited estates are enriched, agricultural property is better looked after and cities are extended, we decree that each and every person of either sex, whether Roman or non-Roman, whether secular or clerical, and no matter of what dignity, status, degree, order or condition they be, may freely and lawfully buy and sell publicly any slaves whatsoever of either sex, and make contracts about them as is accustomed to be done in other places, and publicly hold them as slaves and make use of their work, and compel them to do the work assigned to them. And with Apostolic authority, by the tenor of these present documents, we enact and decree in perpetuity that slaves who flee to the Capitol and appeal for their liberty shall in no wise be freed from the bondage of their servitude.)”
변증론자들은 이후 교황들이 노예제를 반대하는 문서를 냈다고 주장하지만 그 범위는 제한적이었다. 세례받은 카나리아 제도 주민이나 아메리카 원주민의 노예화를 문제 삼았을 뿐, 대서양 흑인 노예무역 전체를 정면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교황청은 노예제와 실제로도 단절하지 않았다. 1488년 교황 인노첸시오 8세는 스페인 왕 페르난도에게서 무어인 노예 100명을 선물로 받아 추기경들과 귀족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1629년 교황 우르바노 8세는 교황 함대 유지를 위해 노예 40명을 구매하도록 명령했다. 흑인 아프리카인 노예무역을 직접 거론한 문서는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나왔는데, 그마저도 이미 세속 사회에서 노예제 폐지 여론이 거세진 뒤였으며, 위반자에 대한 파문 처벌도 담지 않았다. 결국 교황청의 태도는 일관된 반노예 선언이라기보다, 시대적 압력과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뒤늦게 나온 제한적 반응에 가까웠다.
▣ 망각의 문화 조장이 아닌 진실한 사과와 보상 요구돼
『교황들, 가톨릭교회와 흑인 아프리카인의 대서양 노예화 1418-1839』의 저자 아디엘레는 이 주제를 연구한 동기를 대서양 노예무역의 책임 소재를 정확히 하기 위함임을 밝히며 다음의 문제를 지적했다.
“대서양 노예무역이 종식된 지 150년이 지났지만, 그 기간 동안 가톨릭교회의 행적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중요한 핵심은 가톨릭교회와 그 지도부가 노예무역이 끝난 지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 아프리카인 노예화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계속 유지해왔다는 점이다. 교회의 지도부는 흑인 아프리카인 노예화에 대한 교회의 공모의 심각성을 축소했고, 결과적으로 ‘망각의 문화’를 조장하고 노예화 국가 정부들과 한통속이 되어, 아프리카 흑인들 스스로가 노예화의 장본인이며, 따라서 이 수치스럽고 악랄한 행위에 대한 책임은 그들에게 있다는 선전을 널리 퍼뜨리는 데 일조했다.(joining the governments of the enslaving nations of Europe and America in spreading widely the propaganda that Black Africans themselves are the architects of their enslavement and therefore are to be blamed for the shame and the evil of this slave trade.)
이 주제를 연구하는 사람들 중에도 이에 대한 심도 있는 학술 연구를 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독교를 옹호하는 변증적인 글을 쓰는 경향이 있어 왔다. 하지만 이들은 이전 교황들이 교황 칙서를 통해 흑인 아프리카인들의 대서양 노예무역을 시작하고, 축복하고, 지원함으로써 노예제도를 지속적으로 옹호해 왔다는 상당한 증거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저 교황청과 가톨릭교회 전체의 이미지에 입힌 수치를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쓴 것이었다.”
이번에 발표한 회칙에서 레오 14세는 이전 교황들이 사과문에 사용하던 ‘가담했다’, ‘연루됐다’, ‘방관했다’, ‘침묵했다’라는 표현 대신 교황청이 ‘직접 개입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미국 출신의 교황 레오 14세(본명 로버트 프레보스트)는 루이지애나 크리올 혈통으로, 노예였던 조상과 노예 소유주였던 조상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는 노예제를 비판했던 19세기 후반 교황 레오 13세를 기리기 위해 교황명을 선택했을 정도로, 이 역사를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이다. 레오 14세가 새 회칙에서 ‘가톨릭교회가 직접 노예를 부리고, 노예제 합법화를 주도했던 사실’을 직접적으로 인정하며 사과하자, 이제는 그 사과의 진정성에 대한 냉철한 평가가 시작되었다.
지난 6월 10일, 미국의 법률 뉴스·해설 매체 JURIST에는 “교황의 사과가 진실됨을 보이기 위해선 구체적인 보상과 기록 공개, 제도적 책임 인정 및 교육이 뒤따라야 한다”는 취지의 논평이 다음과 같이 실렸다.
“진심 어린 용서는 단순한 상징적 제스처에 그치지 않는다. 수 세기 동안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규범을 형성해 온 가톨릭교회는 인류 역사상 가장 심각한 불의 중 하나에 관여했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교황의 칙서들은 기독교 군주들이 비기독교 지역을 정복하고 그 주민들을 노예로 삼는 것을 허용했고, 이는 유럽의 식민지 확장과 대서양 노예무역에 대한 신학적 정당성을 제공했다. 사실상 교회는 아프리카인과 원주민의 대량 노예화를 초래한 관행을 신성시하고, 노예 제도를 기독교의 도덕적 틀 안에 자리 잡게 했다.(In effect, the Church sanctified practices that led to the mass enslavement of Africans and indigenous people, embedding slavery within the moral framework of Christendom.) 이에 대한 교회의 공식적인 비판은 너무 늦었다. 세속 사회에서 노예 제도 폐지 운동이 이미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후인 19세기에 들어서야 교회는 노예 제도에 대해 뒤늦은 비판 성명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교황 레오 14세가 이를 인정한 것은 교회가 가장 기본적인 인권 중 하나인 자유를 옹호하는 데 뒤처졌다는 도덕적 실패를 시인하는 것이다.(Pope Leo’s acknowledgement of the delay is an admission of moral failure as the Church lagged behind in defending one of the most fundamental human rights –freedom.) 과거를 부인하거나 축소하는 것은 오히려 대중의 교회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킨다. 죄를 직면하기를 거부하는 신앙 공동체는 위선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존재로 전락할 것이다. 레오 14세는 교회의 제도적 책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행동이 수반되지 않는 인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과는 필요하지만 구체적인 조치가 수반되지 않으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교회는 배상이 적절한지 고려해야 한다.(The Church must consider whether reparations are appropriate.) 배상은 노예제도로 인해 역사적으로 불이익을 당했던 공동체에 대한 재정 지원, 교육 투자 또는 구조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정책 등의 형태가 있을 수 있다. 구체적인 약속이 없다면, 사과는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기보다는 상징적인 의미에 그칠 것이다.”
6월 2일, 범아프리카 배상 운동 네트워크 ‘배상 치유 국제 연대(Global Circle for Reparations and Healing)’도 이번 회칙에 어떠한 배상도 언급되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이 단체는 2022년 바티칸을 방문하여 교회의 책임 인정과 사과, 노예제도와 관련된 교황령 폐지, 배상 위원회 설립, 그리고 수 세기 동안의 피해 복구를 위한 상당한 재정적 약속을 요구하는 공식 배상 청원서를 전달한 바 있었다.<참고자료1>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사과한다면서 정작 단체가 요구했던 배상에 대한 약속은 하지 않았고, 노예제도와 관련된 교황령을 완전히 폐지하지 않았으며, 노예무역으로 인한 지속적인 피해를 복구하기 위한 더 광범위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또 영국 로이터, 가디언지 등에 따르면 6월 17~19일 가나 아크라에서는 ‘Next Steps’ 컨퍼런스(정식명: 아프리카 노예 매매에 관한 유엔 결의안의 다음 스텝을 위한 고위급 협의 회의)가 열렸다. 지난 3월 유엔 결의안은 대서양 노예무역을 ‘인류에 대한 가장 심각한 범죄’로 규정하였으며, 이에 따른 배상 논의를 구체화하기 위해 이번 회의가 소집된 것이다. 회의에는 가나를 비롯해 나미비아, 라이베리아, 세네갈, 상투메 프린시페의 대통령과 베이도스 총리, 적도 기니의 부통령 등 80개국 이상에서 국가 원수, 정부 수반, 장관, 시민 사회 대표, 역사가, 연구원 및 법률 전문가들이 참석했으며, 19개 항의 국제 배상 정의 추진안이 논의 및 채택되었다. 이번 회의의 목적은 ‘단순한 인정’에서 ‘배상을 위한 구체적 조치’로 전환하는 것으로, 회의를 주최한 가나의 존 드라마니 마하마 대통령은 “역사는 죄책감을 물려받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물려받으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History does not ask us to inherit guilt, but it asks us to inherit responsibility.)”라고 연설했다.<자료6>

<자료6> 가나 ‘Next Steps’ 컨퍼런스에 참석한 아프리가 국가 지도자들
회의를 주최한 가나의 존 마하마 대통령(사진 왼쪽에서 네 번째)은 “역사는 죄책감을 물려받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물려받으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라고 연설했다 (출처: 가디언)
노예제 피해 배상 규모는 천문학적이다. 2023년 2월 미국 국제법 학회(ASIL)와 서인도제도대학(UWI)이 공동 주최한 ‘아프리카 노예자들에 대한 국제법상 배상’ 제2차 심포지엄에서 경제·금융 컨설팅 업체 브래틀 그룹(The Brattle Group)은「대서양 노예제 피해 배상액 산정(Quantification of Reparations for Transatlantic Chattel Slavery)」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미국,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네덜란드, 브라질 등 각 노예무역 가담국의 배상 책임을 산정해, 전체 배상 규모를 ‘약 131조 달러(2023년 기준 약 17경 1,186조 원)’로 최종 산정했다. 브래틀 그룹은 노예가 된 사람들이 평생 빼앗긴 임금이 당시 얼마였는지 계산하고, 수백 년 동안 받지 못한 손실을 이자로 반영해 오늘날 금액으로 환산했다. 여기에 생명 손실, 자유 박탈, 신체·정신 피해, 성폭력 피해 보상액을 더하고, 노예제 폐지 이후에도 계속된 차별로 세대를 이어 벌어진 부의 격차도 반영해 131조 달러라는 배상액을 산정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 산정 방식은 경제학적 손해 산정 모델에 따른 것으로, 돈으로 계산하기 어려운 가족 해체, 문화 상실, 정체성 파괴 등의 피해는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보수적 추정치다. 이에 보고서는 이 배상액도 실제 피해액에 비해 과소평가된 것임을 강조했다. 피해 산정 범위 자체도 15~19세기 대서양 노예무역에만 국한된 것으로, 원주민 집단 학살과 토지 약탈, 원주민 기숙학교 피해, 근대 이후의 노예 착취, 아시아 노예무역에 대한 배상은 포함되지 않은 금액이다.
이 거대한 배상 규모 앞에서, 바티칸은 책임을 축소하거나 회피할 것이 아니라, 과거 자신들이 축복하고 노예무역에 앞세웠던 포르투갈이나 스페인과 협력해서라도 배상기금을 조성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것은 천문학적 숫자로도 그 크기를 다 담아낼 수 없는 깊은 죄악에 대한 책임의 무게다. 교황의 권위와 그들 신의 축복을 등에 업은 유럽 제국들이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전역에서 벌인 노예화와 착취의 대가는 몇 마디 사과 표명으로 덮을 수 없다. 사과는 책임의 끝이 아니라, 배상의 시작이어야 한다.
사실 아프리카인들이 겪은 역사적 상처와 고통은 그 뿌리가 너무도 깊고 광범위하여, 그 어떤 형태의 배상으로도 온전히 치유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교회가 피해자들에게 진실된 사과를 할 의지가 있다면, 사과를 선언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금전적 배상에 한계가 있다면 빚을 내서라도 보상해야 하는 것이 예의다. 수백 년간 자행한 만행의 무게에 비하면 이는 마땅히 감수해야 할 최소한의 양심이다. 교황과 가톨릭교회는 자신들이 행한 죄악을 진정으로 직시하고 있는지 앞으로의 실질적인 행보를 통해 증명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번 회칙은 여론의 비판을 무마하기 위한 퍼포먼스적인 사과로 증명되는 것이며, 그 사과는 교회의 뿌리 깊은 위선만을 다시 한번 드러내는 결과로 남을 것이다.
한편, 가톨릭이 축복한 노예화의 영향은 대서양에만 머물지 않았다. 포르투갈 상인과 선교사들이 동아시아로 진출하면서, 이 폭력의 구조는 일본과 조선의 역사 속에서도 다른 모습으로 되풀이되었다. 다음 『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임진왜란과 조선인 인신매매, 그리고 그 배후에 얽힌 기리시탄 다이묘와 가톨릭 선교의 그림자를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