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성신 은혜로 변함없이 함께해 주심에 감사 드려
<다시 보는 신앙체험기> 이교선 권사님 (2)태평양전쟁과 6·25전쟁으로 막연한 두려움과 근심 싸였지만
하나님을 뵙고 따르며 일생을 기쁘게 지내
유교적인 부모님 반대 심했지만, 은혜의 가치를 알고 굳건히 나아가
신앙촌의 생활상을 들으신 후에 아버지께서 모든 것 후원해 주셔
진실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귀한 터전을
일구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려
1958년 저는 소사신앙촌에서 처음으로 안찰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안찰을 받는 가운데, 저는 긴장되는 마음으로 앞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눈과 배에 살짝 손을 대실 뿐이었지만 어떤 사람은 아프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어떤 사람은 발버둥을 치기도 했습니다. 특히 제 앞의 여자분이 안찰을 받을 때는 “왜 이런 더러운 죄를 지었나요?” 하시며 죄를 지적하시는 것을 보면서, 모든 죄가 백일하에 드러난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떨리고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안찰을 받고 나자 기쁨과 즐거움이 연속으로 샘솟는데,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와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자제해야 했습니다. 또 영화 포스터처럼 난잡한 그림에는 눈길도 주기가 싫어져서 복잡한 번화가를 지날 때면 시선을 돌리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걸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말이나 행실에나 장차 자유율법대로 심판받을 자로 알고 행하라” 하는 성경 구절(야고보 2장 12절)을 풀어 주시며 “자유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눈으로도 마음으로도 생각으로도 죄를 짓지 않는 것”이라고 깨우쳐 주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대로 일생을 맑고 깨끗하게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유교적인 가풍이 몸에 배신 분들로, 처음부터 제가 전도관에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시간이 흘러 제가 전도관에 열심히 다닐수록 반대도 점점 심해졌습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존경하며 그 뜻을 거역해 본 적이 없었지만, 전도관에 가지 말라는 말씀만은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불같이 화를 내실 때마다 속으로 수없이 되뇌었습니다. ‘아버지, 제가 받은 은혜를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길임을 알았는데, 어떻게 이 길을 떠날 수 있겠습니까?’ 부모님과 동생들까지 전도관에 가지 못하게 막았지만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길을 따라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굳건해졌으며, 마음속에는 불안이나 괴로움 없이 항상 잔잔한 평안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 후 저는 소사신앙촌에 입주하여 숨진 아기의 몸이 예쁘게 핀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아기는 우 장로님의 한 살배기 아들로, 숨을 거둔 후에 생명물로 씻어 유리관에 눕혀 놓았는데, 마치 따끈따끈한 아랫목에 누워서 곤하게 잠이 든 것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맑고 뽀얀 피부에 발그스름하게 물든 볼, 천사처럼 천진한 미소를 보니 ‘저렇게 예쁜 아이를 어떻게 땅에다 묻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제가 소사신앙촌에 들어갔을 당시는 하나님께서 영어의 몸으로 계실 때였습니다. 전도관과 신앙촌이 세워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몰려오자, 다급해진 특정 종교계와 일부 정치인들이 결탁하여 아무런 죄도 없이 옥고를 치르시게 한 것이었습니다. 1960년 3월 26일은 하나님께서 옥고를 마치시고 돌아오시던 날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뵙는다는 기쁨에 소사신앙촌 정문에서부터 도열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댁에도 들르시지 않고 곧바로 노구산으로 향하셔서 오만제단의 단에 서셨습니다. 단상의 이쪽저쪽으로 다니시면서 오랫동안 떨어졌던 자식을 다시 만난 것처럼 자상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시던 하나님. 크나큰 고통을 당하셨건만 부드러우신 음성으로 여러분들의 죄를 씻어 주겠다고 하실 때 많이 흐느껴 울었습니다. 찬송가 253장 “멀리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 또 외로워 정처 없이 다니니~” 하는 찬송을 밤새도록 인도하시던 그 모습이 지금도 가슴을 저리게 합니다. 그토록 모진 옥고를 치르신 후에도 오로지 가지들을 위하셨던 사랑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1962년 9월 11일 덕소신앙촌에 입주한 저는 제과 공장의 인사 서무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과 공장에서 생산하던 카스텔라, 캐러멜, 사탕 등이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를 끌었는데, 저는 그것들을 커다란 상자에 한가득 넣어서 안성 집으로 부쳐 드렸습니다. 아버지도 맛이 있으셨던지 매일매일 카스텔라 반 개씩을 드셨다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용건이 있어 집에 다니러 갔을 때 아버지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너의 나이 27세이다. 이제 네 인생을 챙기거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 세상에서 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죽는 것을 끝으로 알고 살아가지만, 저는 인생의 참된 소망을 찾았습니다. 감람나무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생명물은 아무리 오래 놔두어도 썩지 않고, 악한 마음도 은혜로 씻으시면 백합꽃같이 아름답게 피어납니다. 아버지도 이 길을 아셨다면 누구보다 더 열심을 내셨을 겁니다” 하고 말씀드리자, 아버지도 너털웃음을 터뜨리셨습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전도관에 다니는 것을 심하게 반대하셨는데, 그날은 온화하게 미소 지으시며 잠시도 자리를 뜨지 않으시고 제 이야기를 들어주셨습니다. 저는 어디서 그렇게 적합한 말이 떠오르는지 며칠을 계속해도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습니다. 은혜받은 이야기며 신앙촌의 근면한 생활상을 말씀드리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보고 환하게 웃으시면서 “내가 신앙촌에 있는 집을 사 주지” 하시며 그때부터 저의 모든 것을 후원해 주셨습니다. 제가 신앙촌 제품을 보내 드리면 아주 좋아하시며 친구분들에게 자랑하셨고, 특히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옷과 내복을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셔서 장례식 때 입혀 달라고 당부를 하셨습니다.
저는 신앙촌에서 생활하면서 하나님께서 친히 저희와 같이하시는 것을 자주 보게 되었습니다. 덕소신앙촌 제단을 건설할 때 사람들과 함께 한강을 건너셔서 자갈 모으는 작업을 진두지휘하셨고, 공사를 할 때면 수백 명의 물지게에 물을 대주는 힘든 일을 도맡아 하셨습니다. 구원을 주시고자 그토록 희생하시고 고생하신 하나님. 교인들이 스스로 의식주를 해결하며 진실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귀한 터전을 일구어 주셨습니다. 누구도 도와주는 사람 없이 무수히 가로막는 방해 속에서 하나님 홀로 이 역사를 이끄셨음을 이제야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1999년 저는 기장신앙촌에서 샘솟는 생명물을 물통에 받아 잘 보관하려고 장롱 속에 넣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후로 그 장롱을 잘 사용하지 않게 되어 생명물이 있는 것을 잊어버린 채 지내다가 얼마 전에 생각이 나서 꺼내 보게 되었습니다.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처음 생명물을 받았을 때와 같이 맑고 깨끗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낙원에 계신 지금도 생명물로 씻긴 시신이 아름답게 피어나고 이슬성신이 내리는 것을 보면서, 변함없이 저희와 함께해 주심에 무슨 말로도 감사를 다 드리지 못할 뿐입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10대에 접어들어 태평양전쟁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앞으로 험한 세월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막연한 두려움과 근심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을 뵙고 이 길을 따르면서 모든 두려움과 근심이 간곳없이 사라져 버리고, 일생을 기쁘게 지내왔습니다. 한결같이 인내하시고 부드러우시며 겸손하셨던 하나님. ‘어쩌면 모든 권능을 가지시고도 그토록 겸손하실까!’ 이 땅에서 함께해 주셨던 시간이 떠오를 때마다 제가 어찌 하나님을 뵙고, 지금까지 따라올 수 있었는지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또 드려도 부끄러울 뿐입니다. 천지는 변하여도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은 변치 않으시기에, 그 말씀대로 아름답게 살아서 그날에 멀리서라도 뵐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교선 권사
(2007. 5. 20. 신앙신보 게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