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받고나니 마음속엔 기쁨과 즐거움만 샘솟아
<다시 보는 신앙체험기> 이교선 권사님 (1)
서울 청암동 이만제단에서 설교하시는 모습(1957년경)
저는 1936년 경기도 안성군 보개면에서 1남 3녀 중 맏딸로 태어났습니다. 대로변에서 큰 약방과 잡화점을 운영했던 저희 집은 해마다 농토를 늘려가면서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자수성가하신 아버지는 근면하게 일하시며 모든 면에 존절하고 깨끗하게 생활하셨고, 저는 그런 아버지를 존경하면서 세상을 바르고 가치 있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서울 지역의 학생들이 안성으로 피난을 내려와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안성여중에서 배화여중 학생들이 같이 수업을 받았는데, 감리교인인 그 학생들은 성경과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했습니다. 저는 교회에 다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이야기가 무척이나 새롭고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전도관에 다녀온 후 변화된 친구의 모습에
호기심 생겨 전도관에 가겠다고 마음먹어
그 후 안성여고를 졸업한 이듬해인 1957년 5월이었습니다. 하루는 가게를 보고 있는데 문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나가 봤더니, 한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 금순이가 외출복 차림으로 서 있었습니다. 금순이는 어찌 된 일인지 얼굴이 해님같이 환하게 피어서 못 알아볼 정도로 예뻐진 것이었습니다. 원래 통통했던 아이가 살이 빠져 날씬해진 모습에 연신 생글생글 웃고 있는데, 그 모습이 아주 좋은 일이 있거나 귀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금순아 웬일이니? 우리 가게에 들어가자”라고 했더니 “아니야, 서울에 다녀오는 길이라 집에 빨리 가야 돼” 하며 인사만 나누고 집으로 가려 했습니다. 저는 평소와 너무나 다른 금순이의 모습에 호기심이 생겨서, 가게가 비어 있다는 걱정을 잠시 접은 채 금순이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습니다.
금순이는 서울 언니네 집에 갔었다고 하면서, 언니를 따라 박태선 장로님의 집회에 참석했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세우신 서울중앙전도관(이만제단)에서 집회가 열렸는데, 금순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것을 보면서도 별다른 감흥 없이 구경꾼처럼 앉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던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기쁨과 즐거움이 샘솟아나는데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안성에도 금년 내로 전도관이 세워질 가능성이 있다고 하기에, 저는 그때를 기다리며 전도관에 꼭 나가 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6월 27일, 안성읍에 생긴 전도관에 처음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일 깨끗하고 좋은 옷을 입고 양산을 든 차림으로 금순이와 함께 집을 나섰습니다. 안성전도관은 제과 공장 건물의 2층에 마련된 예배실로,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옳은 길 따르라 생명의 길~” 하는 찬송가를 어찌나 잘 부르던지, 손뼉을 치며 귀엽게 찬송하는 모습을 마냥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매일 새벽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면서 전도관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만제단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은 후 아무리
화려한 곳을 가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좋은 것을 봐도 가지고 싶지 않아
그해 10월 서울 이만제단에서 집회가 열렸을 때 저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일주일 되는 집회 기간 동안 밤새워 찬송을 부르면서,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생각도 없을 만큼 배고픈 줄을 몰랐으며, 잠시라도 그 자리를 떠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박 장로님의 인도에 따라 수만 군중들이 우렁차게 찬송을 부를 때면 웅장한 제단이 다 흔들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진심을 다해 찬송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치 메말라 있던 산천초목들이 단비를 흠뻑 맞아 기쁨에 차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매일 새벽마다 박 장로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일이 안수하시고 “병 나은 사람 일어나라!” 하시면, 놀랍게도 벙어리가 말문이 트여 더듬더듬 말을 하고 앉은뱅이가 일어서는 등 놀라운 기적이 수없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저기서 무슨 병이 나았다, 무슨 은혜를 받았다 하며 이야기하는데, 저는 며칠이 지나도록 받아지는 것이 없어서 몹시 안타까울 뿐이었습니다. 단상에서 찬송을 인도하시는 박 장로님을 바라보다가, 순간적으로 ‘저분을 뵈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차라리 오지 말 걸 그랬다’ 하는 실망스러운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박 장로님께서 찬송을 멈추시고 “나는 일개 부흥강사가 아니다. 동방의 일인, 감람나무다!” 하고 외치시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그 놀라움을 다 표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곧바로 기도를 하라 하시니 군중들의 기도 소리로 제단은 금세 떠들썩해졌습니다. 저도 자리에 엎드려서 “잘못 생각했습니다. 잘못 생각했습니다” 하고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뜨거운 불이 심장 쪽으로 들어오더니 뱃속에 있는 모든 것이 입으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느낌이 너무나 분명하고 생생해서 얼른 입에 손을 대 보았지만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었고, 그때부터 속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지며 온몸이 날아갈 듯이 가볍고 시원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나는 동방의 일인이요 감람나무다!”라고 외치셨던 그 순간의 놀라움과 경외감이 제 마음에 선명하게 새겨졌습니다.
그렇게 은혜를 받은 후부터는 아무리 화려한 곳에 가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고, 아무리 좋은 것을 봐도 가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마치 바람을 부는 기계로 풍풍 바람을 넣어 주듯이, 제 마음속에 기쁨과 즐거움이 ‘풍풍’하며 샘솟아 나는데 그 기쁨을 세상의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았습니다. 문헌에서도 보지 못했고 상상할 수도 없었던 기쁨과 즐거움이 나날이 새롭게 채워졌습니다.
기온이 뚝 떨어진 날 우물물을 담은 유리병은 깨졌으나
생명물을 담은 유리병은 얼지 않고 오히려 잔잔한 물방울이 맺혀
이만제단 집회에서 저는 박 장로님께서 축복하신 생명물을 받아 오게 되었습니다. 약방을 운영하는 저희 집에는 크고 작은 예쁜 유리병들이 많아서 그 병에 생명물을 옮겨 담고 싶었는데, 그러기 전에 병을 깨끗하게 우려내려고 먼저 우물물을 담아 두었습니다. 쓰지 않는 빈방에 생명물을 받아 온 유리병과 우물물을 담은 유리병을 나란히 놓아두고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여다보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던 1957년 12월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더니 밤사이에 갑자기 눈이 쏟아지고 기온이 뚝 떨어져서 전날과는 비교할 수 없이 추운 것이었습니다. 저는 생명물이 어떻게 되지는 않았나 걱정되어 그 방에 뛰어갔다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물물을 담은 유리병들은 모두 깨져서 유리가 조각조각 잘게 부서져 있고 병 모양의 얼음덩어리만 꽁꽁 얼어붙어 있는데, 생명물을 담은 유리병은 전혀 얼지 않은 상태로 오히려 따뜻한 물을 담은 것처럼 잔잔한 물방울이 맺혀 있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수십 일이 지난 1958년 1월 중순에 생명물이 꽁꽁 얼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가족들에게 물어봐도 생명물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하니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주 일요일에 제단에 가서 신앙신보를 받아 들자 첫눈에 보이는 것이 ‘이제부터 생명물에 은혜를 끊으니 일절 사용하지 말라’ 하신 말씀이었습니다.(1958년 1월 20일자 신앙신보) 설교하신 날짜가 1월 12일이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즉시로 그 말씀이 전국에 있는 생명물에 그대로 응해진 것이었습니다. 순간 ‘아!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시면 무용지물이 되는구나’ 하고 무릎을 치면서 그 말씀과 권능에 놀라고 또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2007. 5. 13. 신앙신보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