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광수 관장 편 ⑦ 운동하다 기절한 미국 병사를 일으키심
스포츠를 즐기시고 크게 장려하신 하나님7. 운동하다 기절한 미군 병사를 일으키심
이리전도관 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내복을 다 전해주고 가려고 하는데, 어느 집사님이 “그 사람은 어떡하나”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혹시 못 받은 교인이 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옆에 있던 집사님이 “그 사람은 우리 교인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교회 안 나온 지 오래 됐는데… 그리고 그 사람은 이번 폭발사고로 다리를 약간 다쳤대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리역 대폭발 사고로 사망자와 중경상자가 수없이 많은 가운데 하나님을 믿고 전도관에 나오는 우리 교인들은 단 한사람도 다치지 않고 무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쟁과 다름없는 참사 속에서 눈동자처럼 보호하심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에 저는 다시 한번 가슴 속 깊이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리전도관 교인들에게 내복을 다 나누어 준 뒤 저는 다시 기장신앙촌으로 가기 위해 이리역으로 향했습니다. 다시 본 폭발사고의 흔적은 대단했습니다. 기차역에서 반대편 플랫폼으로 가려면 지하계단으로 내려가 반대편 출구로 나와야 하는데 사람이 지나다니는 곳 지하 벽면에 붙여져 있던 타일은 뜨거운 열 폭풍으로 다 떨어져 나갔고 기차선로는 말 그대로 엿가락처럼 휘어 있었습니다. 폭발 잔해가 여기저기 널려져 있는 가운데 이리역 옆쪽 언덕에 유독 다른 곳보다 눈에 띄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마치 누가 파 헤쳐놓은 것처럼 넓은 지역이 산산조각이 나 다른 곳보다 더 쑥대밭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불들이 찢겨져 흐트러져 있었고 당시 일반 서민들이 잘 사용하지 않던 변기, 욕조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습니다. ‘일반 주택이 있던 곳은 아닌 것 같은데 저긴 왜 저럴까?’ 궁금해진 저는 지나는 사람에게 “저곳에 어지럽게 파인 곳은 어떤 곳이었길래 저런 것들이 널려 있습니까?”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행인은 “저곳이 이리역전 윤락촌이 있던 곳입니다. 이번 사고로 저렇게 된 것입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저는 성경에 음란과 죄악의 도수가 차고 넘친 소돔과 고모라 성을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유황불로 심판하셨다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뜨거운 농구 열기
1970년 기장신앙촌 건설하신 이후 하나님께서는 스포츠를 즐겨 하시고 또 크게 장려하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농구에 대한 교인들의 관심은 대단해서 일요일마다 신앙촌 내 각 동(건물)별 친선 농구대회가 열렸습니다. 또 농구계에 이름이 알려진 우수 고교팀, 대학팀, 외부 팀들을 한 달에 1번씩 초청해 친선경기를 가지는 등 신앙촌 내 농구 코트에는 온종일 경기가 그치지 않을 정도로 그 열기가 대단했습니다. 1974년 5월 18일 진주교육대학팀이나 삼천포, 부산에 있는 여러 외부 팀과 친선경기를 가질 때는 하나님께서 직접 선수로 뛰시기도 하셨습니다.
농구 경기뿐만 아니라 응원도 볼만했습니다. 앞에서 이끄는 응원단장의 지도하에 착착착 337 박수를 치며 응원을 했는데 특별한 응원도구 없이도 모두가 일치단결하여 각 팀을 열심히 응원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미군 부대 초청 경기
저도 신앙촌에서 열리는 시합이 있으면 항상 응원을 하곤 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부산 하야리야 미군 부대 농구팀 초청 시합이었습니다. 당시 미군팀과의 경기에는 하나님께서도 선수로 출전을 하셨는데, 경기 도중 한 흑인 선수가 하나님과 부딪혀 농구코트바닥에 나가떨어지면서 정신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이 사고로 경기는 중단되고 신앙촌이 떠나갈 듯 하던 응원도 잠시 중단이 되면서 경기장에는 순식간에 적막이 감돌았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농구장 바닥에 쓰러져 있는 흑인 선수에게로 다가 가셔서 정신을 잃은 선수에게 쉭쉭 하고 축복을 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축복을 받은 흑인 선수는 벌떡 일어나더니 하나님께 꾸벅하고 크게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기절을 했던 선수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일어나서 그 즉시 쌩쌩 뛰어다니며 다시 경기를 펼치게 되자 숨죽이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응원석의 관중들에게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와 갈채가 터져나왔습니다.
농구 시합하다 부딪친 덩치 큰 흑인병사
농구장에 나가떨어지며 기절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자 벌떡 일어나
숨죽여 바라보던 응원석의 사람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 갈채로 기뻐해
1978년 1월 1일 일요일 하나님께서는 서울 각 중앙에서 순회집회를 인도하시고 돌아오신 후 저녁 예배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금년은 죄를 벗는 해로 정하자. 죄 짓지 말라.” 그리고 열흘 후 10일 화요일 새벽예배 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강조하셨습니다. “금년은 성결하게 되도록 노력하는 해라고 했으니 더욱 노력하자.”
1978년 3월 26일 협회 인사과장 대리로 발령을 받은 후 한 달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제도에 전도사를 새로 파견하려하니 거기에 적합한 사람을 추천하라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협회에서는 지방 관장님들과 협회에 근무하는 직원들 중 8명을 선발하여 명단을 올려 드렸는데 명단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제 이름에 도장을 찍어 내려보내셨습니다.
사라진 기억
집무실로 저를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거제도에 앞으로 계획한 일이 있으니 그곳에 가서 잘 하라”고 여러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한 말은 밖에 나가서 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저는 그때까지 하나님께서 하셨던 말씀의 기억이 제 머릿속에서 싹 없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지금도 그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기억이 나지를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계신 일이 있는데 네가 가서 잘하라 하신 것만 생각이 날 뿐입니다.
하나님 집무실에서 내려 오는데 10번 경비실 앞쪽에 있던 당시 기장전도관 김모관장이 저를 보고 “심과장,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라고 묻길래 저는 거제도로 발령이 났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김관장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심과장이 거제도에 큰 임무를 띠고 하나님께서 직접 발령을 내셨다”고 자기 혼자 생각으로 떠들고 다니더니 그 이튿날 협회에 왔는데 멀쩡하던 입이 한쪽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말씀을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해 저렇게 되었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