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하나님이셨는데 드러내지 못하셨음을 깨달아
박계윤 권사(3) / 성동교회전도관에 다니며 기쁘게 생활하던 저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은혜 받은 이야기를 하며 전도를 했습니다. 제가 받은 기쁨과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시누이의 집에 세 들어 사는 대학생 한 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학생은 중앙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면서 어머니와 함께 시골에서 올라왔는데, 객지 생활 중에 아는 사람이 없으니 가까이 있는 저희 집에 가끔씩 오곤 했습니다. 저는 성실해 보이는 그 학생을 전도하고 싶었지만 집에서 공장을 하기 때문에 차분히 앉아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틈틈이 이야기를 하면서 어느덧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 한번은 공장이 쉬는 토요일에 그 학생이 찾아와서 제가 받은 은혜를 차근차근 들려주었습니다. 그동안 체험했던 이슬성신과 불 성신, 향취에 대해 이야기하며 ‘감람나무께서 이 땅에 나타나셔서 은혜를 내려 주신다.’라고 설명했습니다. 학생은 이야기를 열중해서 듣더니 당장 내일 이만제단에 가겠다고 하며 성경과 찬송 책을 사 가지고 왔습니다. 다음 날이 되자 형님 두 분까지 모시고 와서 삼 형제가 같이 이만제단 예배에 참석하더니 그 후로 세 사람 모두 전도관에 열심히 다니게 되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뒤 그 학생은 전도사로 발령받았으며 형님 한 분은 가족들과 함께 소사신앙촌에 입주하여 신앙생활을 계속했습니다.
당시 기성교회에서는 이단 운운하며 전도관을 비방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터무니없는 비방이 신문에 실리고, 또 그런 비방을 사실인양 그대로 믿는 사람들을 볼 때면 저는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을 참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중상모략과 비방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예배 시간마다 날카롭게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는 죄를 떡 먹듯 하는 사람이 많다. 4, 50년 예배당에 출입하면서도 죄를 해결 짓지 못하면 목사, 장로, 집사 할 것 없이 다 지옥을 면치 못한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루 종일 땀을 흘리며 일해도 향긋한 향취가 진동하고
일을 할 때 더욱 환하게 피는 동료들의 얼굴을 볼 수 있어
은혜 속에서 피곤한 줄 모르고 신바람 나게 일을 해
1957년 11월 경기도 부천에 소사신앙촌이 건설되면서 저는 건설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저희 큰언니와 작은언니도 함께 건설대에 들어가서 ‘건설대 세 자매’로 불렸습니다. 당시 하나님께서는 친히 작업복을 입으시고 저희와 똑같이 지게를 지시며 일을 하셨는데, 작업에 열중하다가 어느 순간 향취가 진하게 맡아져서 주변을 둘러보면 하나님께서 현장에 와 계셨습니다. 점심시간에 밥을 먹고 잠시 쉴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노구산에 올라가셔서 신앙촌 전체를 내려다보시며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그 은혜 속에서 하루 종일 땀을 흘리며 일해도 향긋한 향취가 진동하니 피곤한 줄을 모르고 신바람 나게 일했습니다. 지금과 같은 건설 장비가 있는 시절이 아니라 직접 땅을 파고 벽돌을 나르는 고된 작업이었지만, 일을 할 때 더욱 환하게 피어나는 동료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고, 다음 날 새벽예배 때면 앞자리에 앉으려고 다들 일찍 일어나 제단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두가 잠든 밤에도 주무시지 않으시고 신앙촌을 계속 축복해 주셨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60년 12월에 동아일보 사건이 있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이슬성신이 찍힌 사진이 조작되었다고 왜곡해 오던 동아일보가 12월에 또다시 축복 사진이 조작된 것이라고 보도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슬성신을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한 사람으로서 그런 보도를 보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항의를 위해 동아일보사에 모여 있던 우리 교인들에게 경찰이 무지막지하게 곤봉을 휘두르더니 무조건 경찰서로 연행해 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그때 투옥되어 4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습니다. 수백만이 직접 보고 체험한 은혜를 어떻게 ‘조작’이라고 할 수 있는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억울하고 분한 심정을 가누기가 어렵습니다.
이슬성신에 대한 왜곡된 보도를 해오던 동아일보가
1960년 12월 급기야 축복 사진이 ‘조작’이라고 보도헤
직접 체험한 사람으로 참을 수 없어 동아일보사에 강력 항의
그 후 저는 서울 신당동으로 이사하여 성동제단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당시 성동제단을 신축하게 되면서 저도 틈틈이 일을 도왔는데, 건설대에서 일했던 경험을 살려서 기초를 파고 마루를 까는 일을 거들었습니다. 귀한 성전을 짓는 데 작은 힘이나마 보탤 수 있는 것이 참 기쁘고 보람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신앙촌 제품을 판매하는 소비조합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한창 인기 있던 신앙촌 이불과 담요를 판매했는데 당시는 주부들 여러 명이 계를 짜서 신앙촌 이불을 구입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한 품질 좋은 신앙촌 양말을 찾는 사람이 많아서 신나게 다니며 판매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 나이 여든을 넘기고 보니 젊은 시절에 시간을 아끼며 바쁘게 살았던 그때가 참 좋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1981년 하나님께서는 이슬 같은 은혜를 내리시는 감람나무가 곧 하나님이심을 발표하시며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심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내가 사람과 같은 몸으로 왔지만 이 안에 성신이 생산되는 구조를 가져왔다.”라고 말씀하실 때 저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하나님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소사신앙촌 건설대에서 일할 때 하나님께서 저만큼 오시면 벌써 향취가 강하게 진동하던 일과 예배를 인도하실 때 하나님의 손끝에서 뽀얀 안개처럼 이슬성신이 한없이 쏟아지던 모습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생각하며 ‘인간과 같은 모습이지만 성신을 생산하는 구조를 가져왔다.’라는 말씀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30년 전에 제 꿈속에서 환하게 빛나는 얼굴로 하늘에 나타나셨던 모습도 떠올랐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이셨는데 드러내지 못하셨구나. 무지한 우리를 한 단계씩 깨우쳐 주시며 이제야 하나님이심을 발표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만큼 오시면 벌써 향취가 강하게 진동하던 일
예배를 인도하실 때 손끝에서 뽀얀 안개처럼 이슬성신이 쏟아지던 모습
‘인간과 같은 모습이지만 성신을 생산하는 구조를 가져왔다’는 말씀 실감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조용히 떠올려 봅니다. 은혜를 받을 때 마음속에 차고 넘치는 기쁨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하나님의 인도로 힘차게 찬송을 부를 때 얼굴이 뽀얗게 핀 사람들은 아기가 방긋방긋 웃는 것처럼 환한 웃음을 띠었고 그 기쁨과 즐거움은 어디에도 비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귀한 은혜를 제대로 간직하지 못하고 말씀대로 살지 못한 어리석은 제 모습이 한없이 부끄럽습니다. 저 자신을 돌아볼 때면 지난 시간이 안타까워 눈물이 흐릅니다. 오래 따라온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구원의 말씀대로 살고 있는지가 중요함을 마음 깊이 깨닫게 됩니다. 지금도 함께하시며 은혜 주시는 하나님. 그 말씀대로 맑고 성결하게 살아서 그날에 구원의 자격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하나님 이 모든 은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