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죄를 해결짓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다
김백덕 승사(2) / 기장신앙촌제일 장로교회에 도착해 보니 설교 시간이 다 끝났는지 박 장로님께서 단상에서 내려오셔서 참석자들에게 안수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박 장로님께서는 안수를 마친 후 다시 단에 오르셔서 방언에 대해 말씀하시며 ‘입술이 새파랗게 되고 입에 거품을 물면서 방언하는 것은 마귀의 역사’라고 하셨습니다. 그 전에 제일 장로교회에서 한 교인이 방언하는 것을 봤는데, “떼떼떼떼-” 하고 이상한 소리를 빠르게 중얼거리면서 입에는 거품이 부글부글 흘렀습니다. 저는 그때 방언이 은혜 받은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저 사람은 잘 믿어서 은혜를 받았나 보다.’ 했었습니다. 그런데 박 장로님께서 ‘방언이 마귀의 역사’라고 하시자 교인들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여기저기서 수런수런하며 분위기가 어수선해졌습니다.
그렇게 제일교회에서 예배를 마친 후 박 장로님께서는 다시 순천으로 가셔서 집회를 마무리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급히 기차를 타고 순천으로 달려갔으나 제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집회가 끝난 뒤였습니다. 그 넓은 천막이 순식간에 걷히고 사람들은 저마다 갈 길을 재촉하는데 저는 아쉬운 마음에 눈물이 쏟아지려 했습니다. “박 장로님은 어디로 가셨을까요?” 하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봤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에도 집회장에서 은혜 받았던 일이 계속 떠올라서 ‘그때 정말 기쁘고 즐거웠는데……. 언제나 박 장로님 집회에 다시 참석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집회장에서 은혜 받던 일이 계속 떠올라
‘정말 기쁘고 즐거웠는데 언제 다시 박장로님 집회에 참석할 수 있을까?’ 생각뿐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1956년 3월이었습니다. 하루는 저희 집에서 제일교회 교인들이 모여 구역예배를 드렸는데, 그분들 이야기가 박태선 장로님께서 곧 여수에서 집회를 하실 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박 장로님 집회에 참석하면 제직회(장로교에서, 교회의 직책을 맡은 사람들이 교회 업무를 결정ㆍ수행하기 위하여 여는 모임)에서 제명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직회에 소속된 그분들은 “제명한다고 하니 어떡하지요? 박 장로님 집회에 꼭 가고 싶은데. 우리 몰래 보자기를 쓰고 갈까요?” 하면서, 저를 보고는 “당신은 직책이 없으니 마음껏 집회에 갈 수 있겠네요.” 하며 부러워했습니다. 저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집회 소식이 얼마나 기쁘고 반가운지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첫날부터 참석하리라 마음먹고 집회가 열리는 4월 2일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여수집회가 열리는 곳은 서초등학교 주변의 넓은 운동장이었습니다. 저는 집회 첫날 일찍부터 서둘러서 집회장에 갔지만 그때 벌써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제가 앉은 자리는 천막과 천막이 연결된 부분이었는데, 집회 중에 비가 내리자 천막 사이가 벌어져서 그 비를 다 맞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잠깐 일어났다가는 그 자리마저 없어질 것 같아 저는 그대로 앉아서 예배에 열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집회장의 군중을 향하여 “마음 문 여세요.” 하시면서 “병뚜껑을 닫아 놓으면 어떤 것도 담을 수 없듯이 마음 문을 열어야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자상하게 가르쳐 주시는 한 말씀 한 말씀이 제 마음속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탐내고 미워하는 것과 같이 마음과 생각으로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
죄를 깨우쳐 주시는 말씀을 듣고 지난날을 돌아보니
재단사로 근무하며 말뜰하게 재단하고 남은 천으로 내 옷을 만들어 입은 일이 생각 나
‘분명히 남의 것이었는데 내가 왜 그랬을까?’ 진심으로 뉘우쳐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죄를 해결 짓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으며 성신의 은혜를 받아야 죄를 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제일 장로교회에 다니면서 십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며 예배당에만 들어오면 천국에 간다고 배웠기에 그런 줄만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저희 부모님께서 항상 선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하라고 하셔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며 제가 특별히 죄를 지었다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탐내고 미워하는 것과 같이 마음과 생각으로도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죄를 깨우쳐 주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저는 지난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결혼 전에 저는 한 양장점에 취직해 재단사로 일했는데, 한번은 알뜰하게 재단하여 예상보다 천이 남았을 때 제가 그 천으로 옷을 해 입은 일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남의 것인데……. 내가 왜 그랬을까?’ 하며 그렇게 후회될 수가 없었습니다. 지난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면서 ‘앞으로 죄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수 집회가 열리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아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소경이 눈을 떴다!” 하며 감격에 겨워서 외치는 사람, 벙어리였는데 말문이 열렸다면서 마이크를 붙들고 더듬더듬 말하는 사람, 또한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오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 놀라운 기적을 똑똑히 목격하면서 ‘정말 여기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나 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1958년 여수 관문동 산언덕에 430평 석조건물로 전도관이 세워져
일요일 예배를 마치면 `산 언덕이 전도관 교인으로 뒤덮인다`고들 말해
그렇게 여수 집회가 끝나고 몇 개월 후에는 자그마한 집을 예배실로 꾸며서 여수전도관이 세워졌습니다. 저는 매일 새벽예배와 수요일예배를 그곳에서 드리고 일요일에는 어머니와 함께 제일 장로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제일교회 예배 시간에 전도사가 신문을 들고 단상에 올라가더니 전도관을 비방하는 기사를 읽어 주었습니다. “다들 정신 차리세요. 절대 전도관에 가면 안 됩니다!” 하고 목청을 높이는데, 저는 ‘아니 왜 신문에서 말도 안 되는 비방을 할까? 전도관은 죄짓지 말고 성결하게 살라고 가르치는 곳인데…….’ 하며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예배를 마친 후 어머니에게 앞으로 장로교회에 가지 말고 전도관에 다니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는 “나는 나이 든 사람이라 이리저리 옮기는 것이 거북하구나. 좀 두고 보자. 참 진리가 거기 있다면 전도관으로 가야지.” 하셨습니다. 그 후로 제가 장로교회에 나가지 않았더니 목사와 권사, 부인회장 등 몇 명이 집으로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제 장로교회에 안 나갑니다. 저는 전도관에서 은혜를 받았고 구원 얻는 길을 알았습니다. 은혜 받은 곳으로 가겠습니다.”라고 했더니, 그 사람들은 날카롭게 인상을 쓰며 “아니, 당신 어머니는 우리 교회에 나오잖아요. 그러면 당신 혼자 천국에 가고 어머니는 지옥 가라고 장로교회에 놔둡니까?” 하고 큰소리로 비아냥거렸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어머니는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겠니. 나 전도관으로 가야겠다.” 하셔서 그때부터 어머니를 모시고 여수제단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58년에는 관문동에 여수전도관이 신축되었습니다. 산언덕에 세워진 430평의 석조 건물인 여수제단은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일요일예배를 마친 후 수많은 교인들이 한꺼번에 내려갈 때면 동네 사람들은 ‘산언덕이 전도관 교인들로 뒤덮였다.’라고 이야기하곤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