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12월 24일 – 지난날을 회고하는 좌담회
1955년 개관된 천부교의 첫 번째 교회, 원효로 구제단1955년 전국 순회 부흥집회가 열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은혜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소문을 듣고 하나님 자택 기도실(용산구 원효로 3가 52번지)로 모여드는 교인들이 나날이 늘어나자 2,500명 수용의 건물을 준공하여 ‘서울 임시중앙전도관’이라는 이름으로 1955년 12월 24일 개관되었다. 이 교회는 이만제단 건립 후 ‘구제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전도관 명칭이 처음 사용된 천부교 최초의 교회였다.
1964년 12월 24일자 374호 신앙신보에는 원효로 구제단 시절을 돌아보는 좌담회가 열렸다. 당시 좌담회에는 조남준 집사, 김도삼 권사, 선우혜국 권사가 참석했다.
하나님 은혜로 훈훈했던 그 시절
▶ 조남준 집사 = 제가 하나님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한 것은 9·28 수복 다음 해부터였지요. 하나님께서 철공장을 하실 때입니다.
저는 그때 신앙을 모르는 술탁보였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부르시더니 오늘은 공장 일을 일찍 마치고 어디 놀러 가자고 하시더군요. 그날 저녁 하나님이 앞장서시고 종업원 25명은 영문도 모르고 따라 나갔습니다. 어디로 가시는가 했더니 충무로 어느 음식점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방에 들어가 보니 언제 예비하셨는지 한 방 가득히 음식상이 차려져 있었어요. 식탁에 둘러앉으니까 하나님께서 “조 선생, 왜 얼굴을 찡그리고 있나? 술이 없어 그러지? 조 선생, 앞으로는 술을 끊고 믿기로 하나님 앞에서 맹세합시다.”하시더군요. 그 말씀에 어떻게 합니까, “예 그러겠습니다.” 했지요.
그 다음 날 하나님께서 내가 선물을 사다 줄 테니까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시더군요. 흰 종이에 큼직하게 싼 것을 가져오시더니 이것을 줄 테니 혼자 갖던지 나누어 갖던지 마음대로 하라 하시며 들어가셨습니다. 풀어보니까 성경과 찬송책이었습니다. 조금 있으니 웃으시며 나오시더니 그 선물이 지금은 좋은 것 같지 않지만 앞으로 좋을 때가 있을 것이라 하시면서 찬송가 를 몸소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미련한 저희를
이끌어 생명을 알게 하시려고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이끄신 것이었지요`
그다음 주일부터 우리 종업원들은 하나님을 따라 교회에 나갔습니다. 나가 보니 강대상 앞으로 우리 자리를 대여섯 비워 두셨겠지요. 예배를 마치고 나니 우리를 곰탕집으로 데려가 배불리 대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선 하시는 말씀이 “주일날은 집에서 식사하지 말고 나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부터 종업원들은 주일날과 수요일 날을 우리 생일이라고 좋아했습니다. 예배 드리고, 식사하고, 또 어느 때는 우리를 기쁘게 해 주시려고 저녁예배 드리고는 다시 식사 대접해서 차비까지 주어서 보내시는 이 일을 한 번도 빠짐없이 3년간을 계속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때는 낮 예배 보고 남산 푸른 잔디밭으로 올라가 찬송가를 잘 부르는 사람에게 상으로 사과를 주시고 즐긴 일도 많았지요.
한날은 제가 너무 감사하고 민망하여 “이렇게 하지 아니 해도 이제 잘 교회 다니겠습니다.”했더니 “조 선생, 이것이 훗날 생각 날 때가 있으리라.”하시겠지요. 지금 생각하면 미련한 저희를 이끌어 생명을 알게 하시려고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이끄신 것이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밤늦게까지 일하여도 새벽 세 시 반만 되면 어김없이 새벽기도회에 가셨습니다. 공장 종업원들이 아무리 잘못한 일이 있어도 꾸지람 한 번 하시는 것을 못 보았습니다. 제가 한번은 무슨 기계를 만지는데 일은 잘 안 되는 데다가 동료 한 사람이 자꾸 빈정대겠지요. 원래 성격이 못된지라 하나님이 바로 뒤에 서 계시는데도 화를 이기지 못하여 그만 일어나 큰 해머로 그 기계를 내리쳐 버렸습니다. 그 기계는 묵사발이 되고 말았지요. 나는 즉시 사직할 각오로 걸어 나가려는데 하나님께서 웃으시면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제 마음이 시원합니까? 기계는 다시 사면 되니 다시 한 번 해 보세요.”하시며 어깨를 툭툭 치시겠지요. 내가 세상에 나서 그때같이 마음에 찔려 본 일이 없었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 나날이 모여들어
▶ 김도삼 권사 = 어느 날 새벽제단 때 제단을 크게 짓자 하시더군요. 그때 온 분이 다 해야 백 이삼십 명 될까 했어요. 그 이튿날 그때 수를 세어 보니까 80명밖에 안 되었어요. 그때 말씀이 4, 5백 평 제단을 짓겠다 하셔서 사람은 적은데 무엇 하려나 했지요. 그 이튿날부터 짓기 시작해서 10일도 못 되어 기둥을 올리고 1955년 12월 25일 원효로 구제단 개관집회를 가졌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찰떡을 해서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때 모인 수는 5백여 명… 그날 저녁 말씀하시는데 지금 여기 뒷자리가 비었지만 얼마 아니 되어 차고 넘치리라 했습니다. 과연 그 후 얼마 아니 되어 제단이 넘치고, 이층까지 넘치고, 철길을 덮고, 길까지 온통 덮어서 교통 차단이 일어났었습니다. 용산서에서 나오고 야단이었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소위 「80명 사진」을 찍은 것이 집사 임명한 때일 것입니다. 그때 각자 일어나 자기소개를 자기가 했어요. “나는 강원도 어디서 왔고 이름은 누구고… 교회는 어디입니다” 하고 자기가 소개하였지요.
`얼마 안 되어 제단이 넘치고,
이층까지 넘치고 길까지 온통 덮어서
용산서에 나오고 야단이었지요`
▶ 선우혜국 권사 = 저는 그때 어린애들을 데리고 있었는데, 주일학교 학생을 데리고 예배 보는데 향취를 맡았다, 불을 받았다 하며 무척 신기해 했어요.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동방의 한 사람을 증거하시다
▶ 김도삼 권사 = 그 이듬해 이만제단에서 동방의 의인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마지막에 이긴 자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 이긴자는 성신의 은혜를 내리고 향취를 내린다, 동방의 한 사람이 마지막 뜻을 이룬다는 말씀을 했어요.
1956년 2월 17일자 신앙신보에는 원효로 구제단 당시의 광경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참과 거짓을 분별시키는 성령의 은혜는 한없이 내려 영하 16도 이하의 추운 새벽에 얼어붙은 교회 유리 창문이 하나님이 서신 강대상 쪽부터 다음으로 녹아내리는 기이한 현상, 난방 장치가 필요치 않고 입고 온 웃옷도 벗어 놓고 향기 진동하는 이슬성신 속에서 별세계의 진상을 바라보는 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또 1956년 3월 11일자 신앙신보에는 원효로 전도관의 초창기 모습을 보도했다.
“원효로 3가에 전도관을 짓고 예배를 드린 지도 우리의 기억에 새롭건만 하나님의 은혜 충만한 설교를 듣고 또 들으려고 낮 예배는 물론 밤 예배까지 멀고 가까운 거리를 막론하고 서울 원효로 전도관에 쇄도하는 군중을 볼 때 이는 확실히 이 나라 심령계의 부흥됨을 여실히 증거하는 것이다.”
1956년 7월 7일자 신앙신보에는 원효로 전도관이 개관된지 6개월 만에 장년만 4,000여 명이 전도되었고 신임 임원 301명이 새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전했고, 1956년 8월 6일자 신앙신보에는 방학을 맞아 7월 30일부터 8월 5일까지 원효로 전도관 어린이 심령부흥회를 개최하여 많은 어린이가 은혜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원효로 구제단, 첫 번째 전도관 개관의 시작으로 1956년 1월 12일에는 인천전도관이 세워지고 부산, 마산, 전주, 광주, 밀양, 안동, 안양, 순창, 영산포, 청주, 군산, 대구, 순천, 대전 등 대도시에서부터 작은 섬마을까지 전도관 개관 행렬이 이어지면서 전국적으로 한 달에 3~4개씩 개관을 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