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땅 신앙촌에서 기쁨과 보람을 알게 되었습니다.

최월순 권사/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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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받은 뒤로 가슴 가득 차오르는 기쁨을 느끼고 귀한 은혜를 간직하기 위해 노력해
은혜 받아 몸이 건강해지고 마음도 즐거워지니 은혜 받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앞장서
신앙촌에서 지내온 시간은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보람을 알게 해 준 시간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신 하나님을 찬송하며 열심히 살아갈 것을 다짐해

최월순 권사/기장신앙촌

1939년에 전라남도 장성에서 태어난 저는 세 살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생계를 책임진 어머니는 새벽 시장에 나가 밤늦게야 돌아오시고 오빠와 언니도 집안일을 돕느라 곁에 없으니 저는 언제나 마음 한쪽이 춥고 외로웠습니다. 그 후 6∙25전쟁이 일어나 밤마다 울리는 총소리 속에서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전쟁이 끝난 후 살길이 막막했던 어머니는 저를 이모님 댁에 맡기고 언니, 오빠와 함께 서울로 떠나셨습니다.

제 나이 스물 한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가 찾아오셔서 그동안의 일을 들려주셨습니다. 언니가 시집간 이야기며, 언니네 시집 식구들이 전도관이라는 곳에 다닌다는 이야기, 그리고 어머니와 오빠도 언니를 따라 전도관에 나가게 됐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전도관이라는 이름은 저도 낯익었습니다. 이모님 댁에 오시는 어른들이 전도관이며 박태선 장로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집회하실 때 불치병자들이 그 자리에서 낫고 향기로운 냄새도 진동하고 신기한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박 장로님을 따르며 전도관이라는 교회에 다닌다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같이 살면서 전도관에 나가 보자 하시기에 저는 그날로 짐을 정리해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1960년 4월 24일 일요일. 어머니를 따라 마포에 있는 서울중앙전도관(이만제단)에 갔습니다. 1층에 자리 잡고 앉아 박 장로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사과 향 같은 달콤한 향이 진하게 풍겨와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키가 크신 신사 분이 2층 단에 서 계셨습니다. 순간 사과 같던 향기는 더없이 향기로운 꽃향기로 바뀌어 맡아졌습니다. 고향 어른들이 말하던 향기로운 냄새가 이런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예배가 시작되어 박 장로님께서 찬송을 인도하시며 단상을 ‘탁탁’ 하고 치시는 순간, 그때마다 불덩어리가 ‘팍팍’ 튀어나와 2층 성가대 쪽으로도 가고 1층을 향해서도 쫙 퍼져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불이 나오다니!’ 하며 한참 동안 신기한 광경을 바라보면서 ‘박 장로님께서는 과연 보통 분이 아니신가 보다.’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전도관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일요일예배는 마포 이만제단으로 가고 평일에는 집과 가까운 응암동 전도관에 다녔는데 전도관 친구 중에 ‘정의리’라는 동갑내기 친구가 있었습니다. 의리는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언니와 같이 살았는데, 언니가 어디서 들었는지 전도관은 이단이라며 무척 반대해서 예배 마치고 돌아가면 언니가 문을 잠그고 열어 주지 않아서 밤새 문밖에서 쪼그리고 있다가 아침이 돼서야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의리와 함께 서울 서대문전도관에 갔습니다. 당시 하나님께서는 전도관에 오셔서 교인들을 안찰해 주시는 일이 있었는데, 저는 말로만 듣던 안찰을 그때 처음 받게 됐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줄을 서서 한 사람씩 안찰을 받는 중에 저와 의리도 기다란 줄 뒤로 가서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의리가 안찰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의리의 눈과 배에 살짝 손을 대시더니 “너는 핍박이 심하구나.” 하고 온유한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전도관에는 교인들이 무척 많았기 때문에 담당하시는 관장님도 교인들 사정을 다 알기가 어려웠고, 의리는 크게 눈에 띄는 교인이 아니었는데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말씀하시니 무척 신기했습니다.

제 차례가 되어 하나님 앞에 가니 제 눈과 배에 손을 살짝 대시는데, 배 속에서 바람이 빙빙 도는 것처럼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속이 뻥 뚫린 듯 시원하고 상쾌한 느낌은 안찰을 받고 집에 돌아온 후로도 계속되어 참 신기했습니다. 그때 안찰을 통해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는데, 안찰로 죄를 씻어 주신다는 것을 더 확실히 알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오빠와 함께 소사신앙촌으로 가서 안찰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오빠가 안찰 받는 모습을 보니 하나님께서 배에 살짝 손을 대시자마자 덩어리가 불룩불룩 올라오며 하나님의 손을 피해 이리저리로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손이 닿을락 말락하게 오빠의 배를 스치듯 대고 계셨지만 오빠는 아파 죽겠다며 몸부림을 쳐서 다른 분들이 손발을 붙들어 주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안찰을 받은 후 불룩불룩하던 덩어리가 어느새 사라지고 오빠는 평안한 얼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서는 성신이 나가기 때문에 안찰받을 때 내 속의 죄가 성신에 대항함으로 아픔을 느끼게 되고, 그 죄가 씻어지면 평안해진다는 것을 그때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7월에는 친구들 다섯 명과 함께 소사신앙촌에 가서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오만제단에 도착해 보니 사람들로 꽉 차 있어서 뒷자리에 겨우 앉았는데 갑자기 무언가 타는 듯한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주변을 둘러봐도 연기가 나거나 무엇을 태우는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성신을 주셔서 내 속의 죄를 멸해 주시면 ‘죄 타는 냄새’가 난다는 이야기를 그전부터 들었는데, 예배실에서 무엇이 타는 냄새가 진동을 하니 그것이 죄 타는 냄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죄 타는 냄새가 이렇게 지독하구나’ 하며 부끄러웠습니다.

예배 시간에 하나님께서는 ‘쉭’ 하고 축복을 하신 후 “병 나은 사람 있으면 일어나라” 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일어났고 그중에 단상 위로 올라가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한 남자 분은 “몇 년을 앉은뱅이로 살았는데 이렇게 다리가 좍 펴졌습니다.” 하며 감격에 벅차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 보던 사람들 모두 손뼉을 치며 기뻐하고 환호성을 올렸습니다. 실제로 은혜가 내리는 것을 체험하며 신기한 일들이 계속되니 마음이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전도관에 나와 은혜를 받은 뒤로 가슴 가득 차오르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고, 이 귀한 은혜를 잃어 버릴까 봐 말 한마디도 부드럽게 하고 마음먹는 것도 항상 돌아보며 은혜를 간직하려고 노력하게 됐습니다. 원래 몸이 허약해 항상 뒷전에 물러나 소극적이었는데, 은혜 받은 뒤로 몸이 건강해지고 마음도 즐거워지니 은혜 받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주저하지 않고 앞장서고 싶었습니다.

덕소신앙촌 기록화(전혁림 화백 作)

1962년 저는 늘 그리던 소사신앙촌에 입주하게 되었고, 얼마 후에는 덕소신앙촌이 건설되면서 덕소 제과부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지금처럼 공장이 자동화된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빵을 만들 때는 큰 철판 위에 빵 반죽을 일정한 간격으로 놓은 후 그 철판을 리어카에 실어서 빵 굽는 가마로 가져갔습니다. 빵 반죽을 올린 철판은 장정이 들어야 할 정도로 무거웠는데, 몸무게가 48킬로밖에 안 되는 제가 무거운 느낌도 없이 번쩍번쩍 들어서 리어카에 실으니 다들 놀라워했습니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나면 당시 한창 건설 중이던 때라 건설대들이 하는 일을 돕고 싶어서 건설대들이 채석장에 모아둔 돌을 옮겨 주며 힘든 일을 찾아서 했습니다.

덕소신앙촌 계란빵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최월순 권사.(오른쪽)

언젠가 한번은 사람들을 두 팀으로 나누어 모래 옮기기 시합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강 건너편에 있는 모래를 배에 싣고 와서 많이 쌓아 놓는 팀이 이기는 시합이었는데 그 당시 배는 모터가 아니라 노를 저어서 가는 배였기 때문에 다들 얼마나 재빠르게 노를 저으며 모래를 날랐는지 모릅니다. 그때 한마음이 되어 노를 저으면서 다 함께 힘을 모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선의의 경쟁 속에서 노력을 다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장신앙촌 양재 공장에서 재봉틀을 하고 있는 최월순 권사.

그 후 1970년 12월에 기장신앙촌에 입주한 저는 봉제공장에서 재봉틀을 하며 기술을 배우게 되었고 그 후 가공 공장과 양재부로 부서를 옮겨서도 줄곧 재봉틀 일을 해 왔습니다. 지금도 집에 놓인 재봉틀을 볼 때면 ‘신앙촌 마크는 신뢰와 정직이다. 단추 하나도 정확하게 달아야 한다.’며 열심히 일했던 그때가 떠오르곤 합니다.

신앙촌에서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니, 가슴 가득 넘치는 기쁨을 알게 되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보람을 알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오늘도 은혜의 땅 신앙촌에서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하는 찬송을 부르며 허락해 주시는 귀한 시간을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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