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통한 깨달음, 변화를 이끌고 새 삶을 허락하시니”

발행일 발행호수 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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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덕 권사(1)/기장신앙촌

저는 1939년 경남 양산군 물금읍 서부리에서 1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돌이 되기도 전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故 윤성조 권사) 슬하에서 자랐는데, 어머니는 목화 농사를 하며 집안을 보살피느라 힘겨우셨을 텐데도 그런 내색 없이 저희들을 사랑으로 대해주셨고 막내였던 저는 특히 아껴주셨습니다. 아버지 얼굴도 모른 채 자라는 제가 안쓰러우셨는지 늘 곁에 두셨고 이웃의 전도로 장로교회 다니신 후로는 예배마다 저를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6·25전쟁으로 장남을 잃은 어머니의 가슴앓이
제가 열두 살 되던 해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집안의 기둥인 오빠가 학도병으로 입대하게 되자 어머니는 날마다 따뜻한 밥을 아랫목에 넣어두시며 오빠가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셨습니다. 얼마 후 오빠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된 어머니는 굉장히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두 살 터울의 순일이 언니는 “어머니가 전쟁터에 나간 외아들 걱정에 마음 졸이시며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우시다 결국 전사 소식을 듣게 되셨고, 그 충격에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셔 심한 가슴앓이로 몸까지 쇠약해지셨다.”며 상세히 기억하는데 저는 오빠 때문에 힘들어하신 것은 알았지만, 그 정도로 애를 태우셨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어머니에게 위로 한 번 못 해 드린 저는 너무 철이 없었던 것 같아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전도관은 장로교회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껴
어느덧 시간이 흘러 1955년이 되었을 때, 첫째 둘째 언니는 출가하고 어머니와 저는 고향 살림을 정리해 셋째 언니(이순일 권사/現 기장신앙촌)가 있던 서울 신촌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 저는 서울 생활에 적응해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기 위한 준비로 바쁘게 시간을 보냈고, 여전히 건강이 좋지 않으셨던 어머니도 직장을 얻어 일하시느라 눈코 뜰 새 없는 하루를 보내셨습니다.
이듬해인 1956년 10월 즈음 언니가 “구원을 얻으려면 전도관에 가야 한다.”며 같이 가 보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언니가 전도관에 다니고 있었는지도 몰랐고 서울로 와서도 어머니와 함께 일요일마다 장로교회를 가고 있었기에 처음에는 언니의 말이 난데없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다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언니의 간절한 설득에 ̒가족끼리 같은 길을 가야지’하며 따라나서게 되었습니다. 그 길로 주일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어머니를 모시고 언니와 함께 ‘전도관’이라는 곳에 가게 되었습니다.

마포 산언덕, 건물을 짓기 위해 터를 닦은 곳에 커다란 천막을 치고 가마니를 깔아 둔 임시 예배처 천막 안으로 들어가니 빼곡히 자리하고 있던 사람들과 그 넓은 규모는 내심 놀랄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어느새 안내하시는 분이 오셔서 처음 온 사람이라고 맨 앞자리에 앉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천국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길 되나니 은혜로다”라는 찬송을 부르며 준비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도 함께 찬송을 하는 중에 찬송가 가사가 와 닿으며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장로교회를 오랫동안 다녔지만, 찬송 시간은 그저 형식적인 순서인 줄 알았는데 전도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간절하게 찬송을 부르니 제 마음도 뜨거워졌던 것 같습니다.

이윽고 예배가 시작되어 등단하신 분이 찬송과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찬송과 말씀이 귀에서 왕왕 울려 전혀 들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방금 전까지 찬송을 잘 따라 불렀는데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귀가 아픈 것은 아니고, 어떤 찬송을 불렀는지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예배를 마치고는 웬만한 찬송가는 모두 꿰고 있는데 찬송도 기억이 안 나니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전도관에 간 날 그 많은 사람이 진심으로 간구하는 모습에 뭉클한 감동 받아
전쟁으로 아들 잃고 가슴앓이 하시던 어머니 새 소망을 갖게 되시고
소극적이던 나는 귀한 은혜 받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앞장서고 싶어져

하나님 은혜를 깨닫고 전도관으로
그날 이후 어머니는 느끼신 바가 있으셨는지 장로교회를 더 이상 나가지 말고 전도관으로 다니자고 하셨습니다. 매일 새벽마다 원효로에 있는 전도관에서 예배를 드렸으며 일요일에는 마포의 전도관 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전도관을 다니면서 예배를 인도해 주시는 분이 ‘박태선 장로님’이라는 것과 마포에 이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전도관을 건설 중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공사장에서 일을 돕는 것을 보게 되어 어머니와 함께 나가서 일을 돕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때도 가슴앓이로 고생하고 계셔서 공사를 돕는 것이 힘에 부치실 줄 알았는데 오히려 거기 가면 기쁘고 좋다며 하루도 빼놓지 않고 다니셨습니다. 그러면서 변화가 생겼습니다. 매일 새벽예배에 다녀오시면 얼굴이 밝아 보이셨고 웃으시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큰 돌덩이가 가슴에 올라와 있는 것처럼 항상 답답했는데, 하나님을 알고는 싹 다 없어졌다.”라고 하시며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당시는 통행금지가 있어 새벽 4시부터 통행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아랑곳없이 어머니는 눈만 뜨면 새벽예배를 가셨습니다.

들리지 않던 말씀이 뚜렷이 들리게 돼
어머니를 따라 원효로 전도관 새벽예배에 몇 번째 참석했을 때였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등단하셔서 설교 말씀을 하시는데 ‘동방의 한 사람’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이사야 41장의 ‘동방의 땅 끝, 땅 모퉁이, 해 돋는 곳’이 한국을 가리킨다고 하시며 동방의 한 사람이 나타나는 곳은 틀림없이 한국이라고 하셨습니다. ‘동방의 한 사람이 어디서 나타나며, 어떤 역사를 하시는지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었는데 지금껏 몰랐구나’ 하며 생각했습니다. 그제야 지금껏 들리지 않던 말씀이 선명히 들린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깜깜하게 가려져 있던 눈이 환하게 밝아진 듯 시원했습니다. 그때부터 말씀이 뚜렷이 들리며 예배 시간마다 새롭게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설교 말씀에 ̒죄가 막히면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고 하셔서 ̒그래서 나도 들리지 않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만제단에서 은혜받으며 의미 있게 보낸 학창시절
1957년 이만제단이 완공되면서 저는 서울동명여고에 다니며 이만제단 학생 성가대에도 들어가고 학생 안내부원으로도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안내부원들은 일요일이면 이만제단 2층 사무실에 모여 찬송과 기도를 드린 후 안내를 하러 나갔습니다. 저희들은 나이 드신 분들이 이만제단 언덕길을 올라갈 수 있게 밀어드리는 일이며, 더울 때는 전차 종점이나 버스 정류장에서 걸어오시는 분들을 위해 마실 물을 드리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하나님께서 이만제단 안내부원들을 따로 부르셔서 안찰을 해주셨던 적이 있습니다. 안찰을 받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다 순서가 되면 한 명씩 안찰을 받았는데 하나님께서 눈과 배에 손을 살짝 대시며 안찰해 주시고 나자 몸이 날아갈 듯이 아주 가볍게 느껴졌습니다. ‘안찰을 통해 은혜를 주셔서 그토록 몸이 가벼워졌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전대 밴드부가 운행 중인 차 위에서 연주하며 인천집회(1958. 5. 29.)를 알리고 있다. 여자대원들은 모인 군중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설명하며 전도했다.

하나님 은혜받은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1957년 5월 9일. 이만제단 젊은이들을 주축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특별전도대’가 조직되었습니다. 특전대는 당시 이슬성신과 감람나무를 증거하는데 앞장섰던 것입니다. 그때 저도 특전대에 들어가 열심히 전도해 보고 싶었습니다. 평소 소극적인 저였지만 은혜 받는 일에는 앞장서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을 따라 ‘무더기 심방’을 나가는 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심방을 하신다 하면 3, 4백 명이 무더기로 따라 나섰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을 보고 ̒무더기 심방’이라고 불렀습니다. 특전대 밴드부의 관악소리가 울려 퍼져나가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여자대원들은 성경상의 감람나무에 대해 설명하며 전도를 했습니다.

한번은 특전대 임원들이 장소를 정해 팀별로 전도를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6⋅25전쟁 때 폭파된 한강 철교를 넓적한 고무판으로 임시로 연결해 두었는데 그 밑 모래사장으로 노방 전도를 나갔습니다. 특전대 밴드부가 트럼펫을 불고 힘찬 반주에 맞춰 신나게 찬송을 부르고 있으면 다리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할 때면 저도 모르게 용기가 솟아나며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또 기성교회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저녁에는 성경공부도 하고 친구들과 맛있는 음식을 해 먹었던 기억도 떠오릅니다. 전도하는 기쁨으로 달리던 저희들은 어른들에게 의지하지 말고 저희 힘으로 전도비를 마련해보려는 계획도 했습니다. 자수를 놓아 판매하기 위해 친구들과 열심히 만들어서 드디어 자수를 통해 수익을 얻어 전도비에 보태게 되었을 때 참 뿌듯했습니다. 이렇게 특전대원으로 전도 활동을 하며 하나님 말씀을 더욱 깨닫게 되었고, 신앙이 자라는 시간이 되어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하나님께서 신앙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인 “신앙촌”을 소사에 건설하신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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