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직접 체험하니 이 분을 따라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제주 일도교회 장명이 권사 신앙체험기 (1)1946년생인 저는 푸른 바다로 둘러싸인 섬 제주도에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저희 집은 형편이 그리 넉넉지 못했습니다. 6.25 전쟁이 끝나고 모두가 어려웠던 시기, 저는 강냉이 가루나 우유 가루 등 교회에서 나눠주는 구호물자를 받고 싶어서 집에서 가까운 장로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꾸준히 교회를 다니던 중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육지에는 박태선 장로님이라는 유명한 부흥강사가 있는데 그 분의 집회에서는 향취 은혜가 내리고, 수많은 기사이적이 나타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매 집회마다 은혜의 창파를 이룬다는 이야기가 너무나 인상 깊어서 저는 그분의 존함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나 저는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17살 때 즈음으로 기억됩니다. 영등포에 자리 잡은 첫째 언니를 따라 함께 공장에서 일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집 언니가 교회에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디 교회를 다니냐 물으니 박태선 장로님이 세우신 전도관에 간다고 했습니다. 박 장로님의 성함을 들은 저는 반가운 마음에 그 언니를 따라 영등포 전도관에 가기로 했습니다.
전도관은 다른 교회들과 달리 손뼉을 치며 찬송을 부르는 곳이었습니다. 전도사님이 예배를 인도하실 때, 힘차게 박수를 치며 부르는 찬송이 그렇게 신이 나고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첫째 언니는 제가 서울에 와서 박수 치는 교회를 다닌다며 잔소리했지만, 전도관에 가면 마음이 기쁘고 편안해지니 아랑곳없이 계속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예배 시간, 평소처럼 예배실에 앉아 기도를 드리는데 코에서 진한 꽃향기가 맡아졌습니다. 백합이나 장미꽃같이 진하고 기분 좋은 그 향기를 깊게 들이마시니 가슴 속이 마치 박하사탕을 먹은 듯 시원해졌고, 기분은 날아갈 듯이 가볍고 즐거워서 하늘로 둥둥 뜨는 것만 같았습니다. 순간 박 장로님의 집회에서는 향취가 내린다던 사람들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쁘고 감격스러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것이 저의 첫 번째 은혜 체험이었습니다.
은혜를 체험하니 박 장로님께서 직접 인도하시는 예배에도 참석하고 싶어서 이웃집 언니와 함께 마포에 있는 이만제단을 찾아갔습니다. 이만제단에서 저와 언니는 1층 중간 쯤에 자리를 잡고 앉아 예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키가 큰 신사분이 단상 쪽으로 걸어 나오셨습니다. 하얀 와이셔츠에 인자한 미소를 띤 그 분은 바로 박태선 장로님이셨습니다. 박 장로님께서는 찬송가 64장 ‘나의 기쁨 되신 주’를 부르기 시작하셨고, 예배실에 모인 사람들은 큰 소리로 힘차게 찬송을 따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박 장로님이 탁탁 단상을 치실 때마다 빨간 불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잘못 본 줄 알고 눈을 비비고 다시 앞을 봤지만, 불꽃은 분명히 박 장로님 손에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참 신기한 광경이었습니다. 나중에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니 그것은 성신의 불이라고 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은혜가 많으신 분이라고는 익히 들어왔지만, 직접 그 은혜를 체험하고 나니 저절로 경외심이 생기며 계속해서 이분을 따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로 저는 신앙촌에서 운영하는 직매점에 취직하여 그 곳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는 신앙촌에서 생산된 다양한 제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과자, 카스텔라, 캐러멜 등 제과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제품들이 무척 인기였습니다. 직매점에는 도매로 물건을 가져가는 소비조합에서부터 일반 고객들까지 끝없는 방문행렬이 이어졌습니다.
저는 직매점의 활기찬 분위기가 좋아서 이곳에서 오래도록 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직매점에서 일한 지 1년 정도 지나자, 첫째 언니를 포함한 가족들의 반대가 심해져서 제주에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전도관이 없는 제주에 돌아가기 싫었던 저는 잘 알고 지내던 부산 당감동 제단의 전도사님에게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러자 전도사님은 저를 안타까이 여기시며 제주로 가기 전까지 당감동 제단 권사님의 집에서 지낼 수 있도록 거처를 알아봐주셨습니다. 당감동 제단의 권사님이 저를 무척 따뜻하게 맞아주셔서 눈물이 핑 돌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저는 한 달 동안 부산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그때 생명물로 시신이 피는 모습을 처음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 당감동 제단의 연세 많으신 할머니 권사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입관 예배에서 본 권사님의 얼굴은 이미 새카맣게 변해있었고, 몸에서는 송장 썩은 냄새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입까지 벌리고 돌아가신 고인의 모습이 낯설고 무섭게 느껴졌지만, 저보다 어린 주일 학교 동생들이 있어서 애써 담담한 척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입관 예배가 시작되자 장례반 권사님들은 수건에 생명물을 적셔 고인을 정성껏 닦아드렸습니다. 또 숟가락으로 생명물을 떠서 고인의 입에 넣어드렸는데, 넣어드리는 대로 잘 넘어가는 모습이 신기했습니다. 입관 예배가 끝난 후에 본 권사님의 모습은 무척 놀라웠습니다. 새카맣던 피부가 환하게 피어나고, 벌리고 있던 입도 다물어져서 매우 편안한 표정이었습니다. 진동하던 악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서 생명물로 시신을 씻기면 악취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처음에는 그렇게 무서웠던 권사님 얼굴이 잠든 듯 편안해 보여서 저와 함께 입관 예배를 드렸던 주일 학생들도 매우 신기해했습니다.
입관 예배를 마친 전도사님과 권사님들은 잠시 자리를 비우셨고, 저는 그 방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것이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저는 창문을 닫으려 했지만 이미 모든 창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때는 겨울이라 연탄불을 때서 방도 뜨끈뜨끈했고, 바람이 들어올 곳도 없는데 시원한 바람은 계속해서 방안을 맴도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관 아래 양쪽에 괴어둔 나무토막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습니다. 그 아래에 손을 넣어보니 시원한 바람이 제 손가락 사이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저는 너무 신기하여 전도사님이 돌아오시자마자 이 일을 말씀드리니, 하나님께서 성신의 바람으로 권사님을 지켜주신 것이라 하셨습니다. 저는 제주로 가면 이렇게 귀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시는 전도관이 없다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지만, 가족들의 채근에 못 이겨 아쉬움을 뒤로한 채 제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가 1966년의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오전 내내 세탁소에서 일한 후 늦은 점심을 먹고 있는데 처음 보는 젊은 신사 두 분이 저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제주에 사는 장명이 씨가 맞냐고 물으셔서, 그렇다고 답하니 무척 반가워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분들은 제주도에 전도관을 개척하기 위해 오신 분들이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두 전도사님들은 막상 제주에 교회를 개척하러 왔으나 연고도 없고, 제주 지리도 몰라서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넓은 공터에 천막이라도 치고 예배를 드리자고 의견을 모아가던 찰나 부산 당감동 전도사님이 저를 찾아가 보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제주에도 전도관을 지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너무나 기쁘고 설레서 최선을 다해 전도사님들을 돕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날부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정식으로 전도관이 지어지기 전까지 임시로 예배 드릴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전도사님들께 길을 안내하고, 지금보다 훨씬 심했던 제주 사투리를 통역해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때는 교통편도 좋지 않아서 멀고 험한 길을 걸어 다녀야 했지만, 저는 제주 전도관이 생긴다는 기대감으로 즐겁기만 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