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시며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

정인선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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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선 (기장신앙촌)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 부흥집회”
인천 동산중학교 벽에 커다란 포스터가 붙어 있었습니다. 교회 친구들이 “박 장로님은 아주 유명하셔서 서울 장안에 모르는 사람이 없대.” “그분 집회에 은혜가 내린대!” 하며 떠들썩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도 서울에 있는 둘째 언니가 박 장로님 집회에 꼭 가 보라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식구 중에 언니와 저만 교회에 다녔는데 언니는 서울에서 미션 스쿨인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저는 교회 행사가 있는 날이면 집집마다 돌면서 동네 아이들을 데려가고 특히 친한 친구 네 명과 같이 예배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에게 언니가 했던 말을 전하며 집회에 가 보자 했더니 너도나도 가겠다고 해서 집회에 같이 참석하게 됐습니다. 그때가 1955년 9월 제 나이 열네 살 때였습니다.

집회 첫날, 만 평이 넘는 동산중학교 운동장에 천막이 까마득하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천막 안에 머리만 새까맣게 보일 정도였는데, 박 장로님께서는 빼곡히 앉은 사람들 사이를 다니시며 한 사람 한 사람 머리에 안수해 주셨습니다. 안수를 마치시고 “병 나은 자는 일어나라!” 하고 외치시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벙어리였는데 말문이 트였다며 더듬더듬 “어, 엄마-”를 말하는 아가씨, 앉은뱅이였는데 일어서게 됐다며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는 아저씨도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할렐루야 영광을 돌리고 눈물 흘리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어린 마음에도 눈시울이 뜨겁고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엿새의 집회 기간 동안 예배 시간이면 박 장로님의 인도로 힘차게 손뼉 치며 찬송을 불렀는데 마음이 참 기쁘고 즐거워서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그 많은 사람이 찬송하는 소리가 인천 시내를 울리는 것 같았고 집회 도중에 폭우가 쏟아져 비를 맞으면서도 자리를 떠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는 매일 학교를 다녀오면 재빨리 숙제를 마치고 가방을 챙겨 집회장에 갔습니다. 철야한 후 새벽예배를 드리고 나면 어느새 날이 밝아 곧장 학교에 갔는데, 밥 먹을 겨를이 없어도 어떻게 된 일인지 배고픈 줄 몰랐고 오히려 몸이 가볍기만 했습니다. 집회에 가면 기쁘고 즐거우니 마음이 자꾸 이끌려서 집회장에 달려가게 됐습니다.

집회때 하나님께서 안수해 주시니
벙어리였던 아가씨가 말문이 트이고
앉은뱅이였던 아저씨가 일어서게 돼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 뭉클해져

집회 마지막 날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집회가 끝나는 것이 얼마나 아쉬운지 어린아이가 엄마를 떠나는 것 같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광고 시간에 박 장로님께서 다음 주에 대구에서 집회하신다고 하니 어른들은 다들 대구로 가자며 왁자지껄했습니다. 저도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어른이 아니라 대구까지 못 가는 처지가 그렇게 안타까울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 새벽예배를 드리고 학교까지 걸어오는 동안 ‘하나님! 또 집회에 갈 수 있을까요?’ 하며 많이 울었습니다.

그런데 몇 달 후인 1956년 1월, 시내에서 반가운 포스터를 봤습니다. 인천 전동에 ‘전도관’이 세워져서 박 장로님께서 개관집회를 인도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찌나 기쁜지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가 이야기했더니, 방학을 맞아 집에 온 둘째 언니는 물론이고 교회에 다니지 않던 셋째 언니도 관심을 보여 같이 참석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한참 집중하고 있을 때
폭포수 같은 물이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느낌이 들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몸이
시원해지며 목에서 달콤한 물이 마셔져

집회 날 인천전도관은 사람이 차고 넘치게 모여들었습니다. 설교 시간에 박 장로님께서 강대상을 “쾅!” 하고 힘 있게 치시자 거기서 불덩어리 같은 것이 확확 하고 튀어나왔습니다. 또 찬송 부를 때는 안개가 낀 것처럼 예배실이 온통 뽀얗게 되더니 아주 좋은 향기가 진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향기를 맡으면 맡을수록 마음 깊은 곳에서 기쁨이 샘솟는 것 같았고 저도 모르게 계속 웃게 됐습니다. 어른들에게 물어보니 강대상에서 튀어나오던 불덩어리는 불성신을 본 것이며 안개처럼 뽀얗게 내리는 것은 이슬 같은 성신이라 했습니다. 또 성신을 받으면 좋은 향취를 맡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 하셔서 은혜를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고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때 개관집회에 다녀온 후로 언니들과 함께 새벽예배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어려서 하나님 집회에 따라다니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는데 언니들과 같이 제단에 다니면서부터 서울에서 열리는 집회며 전도관 체육대회도 참석하고 마음껏 집회에 갈 수 있어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날이 갈수록 인천전도관에 사람이 몰려오면서 숭의동 산언덕에 큰 전도관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어른부터 학생까지 건설 현장에서 자재를 나르며 일을 도왔습니다. 많은 사람이 함께 찬송하며 벽돌 하나하나 나를 때 저의 작은 힘을 보탤 수 있는 것이 참 즐거웠습니다.

인천전도관 예배 마친 후

인천전도관에서 예배를 마친 후 나오시는 모습

그 후 1957년 1월 인천전도관이 완공돼 하나님을 모시고 개관집회가 열렸습니다. 아버지는 그때까지 1년 넘게 전도관을 반대하셨는데 전도사님이 집에 오셔서 심방예배를 드린 것을 계기로 반대가 누그러지셨고 개관집회도 참석하시게 됐습니다. 치과 의사였던 아버지는 친구 분들에게 전도관을 비방하는 말만 들으시다가 직접 예배에 참석하고 하나님 말씀을 들으신 후로 완전히 달라지셨습니다. 마음과 생각으로도 죄짓지 말라는 자유율법에 대한 말씀이 놀랍다 하시더니 말씀을 더 듣고 싶다며 새벽예배에 나가기 시작하셨고 저희 자매보다 열심히 전도관에 다니셨습니다. 그때부터 어머니도 함께 다니시면서 온 가족이 한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설교 시간에 강대상을 치시자
불덩어리 같은 것이 확확 튀어나오고
찬송 부를 때 예배실이 온통 뽀얗게 되더니
아주 좋은 향기가 진동하기 시작해
향기를 맡으면 맡을수록 마음 깊은 곳에서
기쁨이 샘솟아 계속 웃음이 나

그해 4월 서울에 이만제단이 세워져서 낙성집회가 열렸을 때는 언니 둘과 같이 참석했습니다. 이만 명이 모여 예배드릴 수 있는 제단에 사람이 터져 나갈 듯 모여들어 옆 사람과 무릎이 겹쳐서 앉을 정도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집회 기간 내내 비좁은 자리에서 불편했을 만도 한데 마냥 기쁘고 즐거웠던 기억만 떠오릅니다. 또 예배 시간에 하나님께서 성경상의 감람나무를 하나하나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호세아 14장을 보면 이슬 같은 은혜를 내리고 향기를 내리는 존재가 감람나무라고 기록돼 있다 하시며 “내가 바로 그 은혜를 내리는 감람나무”라 하셨습니다.

저는 한참 말씀에 집중하고 있을 때 폭포수 같은 물이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느낌이 들어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부터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몸이 시원해지며 목으로는 달콤한 물이 꿀꺽꿀꺽 마셔지는 것이었습니다. 인천제단 어른들이 ‘은혜를 받으면 생수가 통한다.’ 하시는 말씀을 여러 번 들었는데 나도 그 은혜를 받았나 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향취가 얼마나 진하게 나는지 세상 공기가 전부 향취로 변한 것 같았고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기쁨을 다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만제단 집회에 다녀온 후 세 자매가 같이 앉아서 성경을 펼쳐 놓고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서로 이야기했습니다. 호세아 14장에 이슬 같은 은혜와 감람나무 구절을 읽어 보고 이사야 41장에 동방의 한 사람을 풀어 주셨던 말씀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아주 향기로운 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더니 금세 온 방에 향취가 가득 찬 것처럼 진하게 맡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언니! 향취가 나!” 하고 이야기했더니 언니들도 “너도 맡았니?” “나도 맡았어!” 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때 배꽃같이 환하게 웃던 언니들 얼굴과 진하게 맡아지던 향취를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됩니다.

1957년 인천전도관

인천전도관 모습(1957년경)

그 후 1957년 11월 경기도 부천에 신앙촌 건설이 시작되자 전국 제단에서 건설에 동참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저와 셋째 언니도 건설대에 자원해서 소사신앙촌에 들어가게 되었고 얼마 후 둘째 언니도 입주했습니다. 저는 건설대 생활을 하면서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해 일할 때 보람되고 기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서로 배려하며 힘들고 어려운 일을 솔선하는 자세도 배우게 됐습니다. 은혜 속에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는 하루하루가 참 감사했습니다.

돌아가신 언니를 위해 기도 드리는데
시원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감돌았고
입관예배를 드릴 때 온 집 안에 향취가
진동해서 지나가는 사람도 맡을 정도

하나님께서는 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메마른 황무지에 주택과 공장, 학교와 교회를 건설하기까지 친히 현장에 나와 격려하시며 진두지휘해 주셨습니다. 1962년 덕소신앙촌을 건설할 때는 건설대원들 수백 명의 물지게에 직접 물을 담아 주셨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전국으로 집회를 다니시는 중에도 고된 작업을 함께하시며 힘을 주셨고 건설대원 한 명 한 명에게 안수하시며 은혜를 주셨습니다.

둘째 언니는 어려서부터 위가 약해 소화를 잘 못 시켰는데 서른 살 무렵 많이 마르고 쇠약해지더니 숨을 거두게 됐습니다. 저는 눈을 감은 언니를 아랫목에 눕힌 후 입관예배 전까지 언니를 위해 조용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누워 있는 언니 주변과 위아래로 시원한 바람이 감도는 것이었습니다. 그때가 겨울이라 불을 때서 아랫목이 뜨끈뜨끈했는데 언니 주변으로 부드러운 바람이 계속 불어오며 향취가 진하게 맡아졌습니다. 그 전에 성신의 바람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성신의 바람으로 함께해 주시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장례반 권사님들이 오셔서 생명물로 씻기며 입관예배를 드릴 때는 온 집 안에 향취가 진동해서 지나가는 분들도 이 집에서 향취가 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생명물로 다 씻기고 난 다음 언니를 보니 마르고 창백했던 얼굴에 보기 좋게 살이 오르고 양 볼에 발그스름한 혈색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언니는 깨끗하고 예쁜 모습으로 편안하게 잠이 든 것 같았습니다. 생명물로 씻기면 숨을 거둔 사람도 아름답게 핀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언니가 생전보다 곱고 예쁘게 핀 모습을 보면서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한 은혜를 허락해 주셨구나 하며 마음 깊이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는 1970년 기장신앙촌이 세워질 때도 건설대원으로 일하게 되었고 건설이 끝난 후에는 와이셔츠부를 거쳐 나염 가공 공장에서 근무했습니다. 그 후 1981년 하나님께서 감람나무가 곧 하나님이심을 발표하셨을 때 저는 초창기부터 들어왔던 말씀이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이슬 같은 은혜를 내리시는 분이 감람나무이신 것을 초창기부터 가르쳐 주셨는데 감람나무는 우리의 죄를 씻어 구원을 주시는 분이니 당연히 하나님이시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깨달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시고 가르치시며 계속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처음 참석했던 하나님 집회에서 마지막날 집회장을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쉽고 안타까웠던 기억입니다. 은혜 주시는 장소에서 떠나고 싶지 않았고 은혜 받는 시간을 한 시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귀한 은혜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그보다 값진 일이 어디에 있을까요. 죄와 상관없는 맑은 마음을 소유해야 은혜를 간직할 수 있기에 오늘도 죄를 멀리하며 자유율법을 지킬 것을 다짐해 봅니다. 마음과 생각으로도 죄짓지 않고 성결하게 살아서 그날에 아름다운 세계에 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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