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집회에서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을 따르게 돼
<신앙체험기 509회> 장위교회 황정자 권사 1편저는 1940년생으로 전남 완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제가 7살이 되었을 때 돌아가셨는데, 어린 나이에도 그것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는지 그 이후로 저는 자주 토하고 몸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 사이 아버지는 아직 어렸던 저희 4남매를 위해 재혼을 하셨습니다. 새어머니께서 마르고 병약한 저를 많이 걱정하셔서 약을 쓰고, 굿도 해보았지만 별 차도가 없었습니다. 제 상태가 도무지 나아지지 않자 어느 날은 새어머니께서 교회에 가보자고 하셨고, 저 역시 교회에 다녀보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겨 학교 가는 길목에 있던 장로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다니게 된 저는 하나님께서 항상 지켜보신다는 생각에 길을 걸을 때조차 조심스럽게 걷곤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제가 다니던 장로교회 사람들은 신앙과는 거리가 먼 모습만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교회에 많은 구호물자가 오던 때였는데 구호물자가 오면 목사들이 가장 먼저 좋은 옷가지들을 쏙쏙 골라 갔고, 그다음에는 임원들이 욕심껏 옷을 챙겨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목사와 임원들은 네가 가져간 옷이 더 좋아 보인다는 둥 시기 질투까지 하니 어린 마음에도 실망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에 다녀도 몸은 좋아질 기미가 안 보였고, 목사들의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게 된 저는 결국 얼마간 다니다가 장로교회에 발길을 끊게 되었습니다.
이후 여수로 이사를 갔는데 어느 날 친척이 찾아와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님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당시에는 하나님을 박 장로님이라 부를 때였는데, 친척이 말하길 박 장로님의 집회에서 은혜가 많이 내리고, 병자들이 낫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궁금증이 생긴 저는 동생(장위교회 황송자 권사)을 데리고 여수집회(1956.4.2.~4.7.)에 참석했습니다. 커다란 천막을 친 집회장 내에는 수만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흰 와이셔츠를 입은 하나님께서 예배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한참 예배를 드리다 보니 집회장 내에 안개가 끼어있는 것이었습니다.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 하나님 모습이 보일 듯 말 듯 한 것이 무척 이상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안개는 걷히고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좋은 향기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인 집회장이기에 불쾌한 냄새가 날 법도 한데 오히려 너무나 은은하고 좋은 향기가 진동하니 참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다음날에는 예배드리는데 시간이 갈수록 가슴이 뜨끈뜨끈해졌습니다. ‘왜 이렇게 가슴이 뜨겁지’ 이상하게 여길 무렵 전날 맡았던 기분 좋은 향기가 다시 맡아졌습니다. 그러더니 몸이 하늘로 둥둥 뜨는 느낌까지 드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집회에서 신기한 체험을 많이 할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은 병자들의 병이 낫는 광경이었습니다.
집회기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시며 일일이 안수를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병 나은 사람들은 일어나라고 외치시자 앉은뱅이가 스스로 걷는 등 집회장 곳곳에서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 자신의 병이 나았음을 증거했습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벙어리로 살다가 말문이 트인 사람이었는데, 마이크를 받아 들고 더듬더듬 말하며 감격스러워하는 모습이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제 눈으로 직접 보고 나니 ‘이것은 정말 보통 일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어 앞으로는 이분을 따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저 역시 여수집회에 참석한 이후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저처럼 여수집회에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예배드릴 공간을 마련하고자 여수전도관을 짓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질통을 지고, 벽돌을 나르면서도 제단이 생긴다는 것에 즐거워했습니다. 저는 집안일로 자주 가보지는 못했지만, 제 동생은 제단을 짓는데 작은 일손이라도 보탤 수 있게 됐다며 무척 신나 했습니다.
여수전도관이 완공되고 하나님께서 순회집회를 위해 여수에 오셨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인도해 주시다가 축농증 있는 사람 다섯 명만 나와 보라고 하셨습니다. 선착순으로 다섯 명이 앞에 나오자 하나님께서 한 명 한 명 코에
‘쉭쉭’ 하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하나같이 밝아진 얼굴로 코가 뻥 뚫린 것 같다, 숨쉬기가 너무 편하다며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여수전도관에 다니던 시절에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전도사님의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입관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그분은 천주교 신자여서 돌아가신 후에도 십자가 모양의 목걸이를 하고 계셨습니다. 생명물로 시신을 깨끗이 닦고, 밤새도록 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드리고 나니 전도관에 다니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시신이 환하게 잘 피셨습니다. 그런데 유독 십자가 펜던트가 있던 부분만 피지 않고 새카만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영문을 몰랐지만 훗날 하나님께서 예수의 정체를 밝히셨을 때 저는 십자가가 있던 부분만 피지 않았던 시신을 떠올리며 ‘그런 거였구나!’ 하고 무릎을 탁 쳤습니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저는 미용기술도 배우고, 일자리도 얻을 겸 언니가 있는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때가 1960년대 초였습니다. 서울에서 생활하며 일요일마다 서울 시내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전차를 타고 이만제단으로 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이만제단에서도 여수에서 체험했던 은혜를 그대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안개와도 같은 이슬은혜가 예배실 안에 뽀얗게 내려서 하나님 모습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하고, 자욱하게 내렸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싹 사라졌습니다.
또 예배를 드리면 마음이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때 예배실 안을 둘러보면 저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환하게 피어있어서 ‘저 사람도 기쁨의 은혜를 받았구나!’ 하고 짐작해 볼 수 있었습니다.
이만제단에 다니며 들었던 설교말씀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앞서 지나간 사람의 발자국을 밟으면 그 사람이 어느 정도 죄를 지었는지 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가 지은 모든 죄를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하니 너무나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 앞으로는 절대 죄를 짓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은 오만제단이 완공되어 개관 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배실이 꽉 차서 오래 자리를 비우면 자리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저는 식사도 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런데도 배가 전혀 고프지 않았고, 집회가 열리는 3일 내내 향취가 맡아져서 무척 신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몇 년 후 저는 결혼해서 시댁이 있는 충북 보은군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댁은 전도관이 없는 시골인 데다가, 시부모님이 교회에 가는 것을 매우 반대하셔서 전도관에 다니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날이 계속되니 마음이 답답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어서 어영부영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