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분이 바로 참 목자구나’ 깨달아 (이명우 권사/기장신앙촌)

이명호권사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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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내가 고등학교 때 교회 아래 사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관장님이 먼저 예배를 보라고 하셨다.
때는 7월말 경이라 폭염이 기승을 부릴 때였다. 나는 친구 3명과 함께 그 댁으로 갔다. 시신이 있는 방문을 열면서 더운 열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이게 웬일인지 냉장고를 열면 차가운 바람이 확 쏟아져 나오듯이 찬바람이 확 불어닥치는 것이었다.

당시는 한국전쟁 후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시절이라 선풍기는 아주 부유층이 아니면 구경하기 힘든 제품이었고 모두가 가난으로 찌든 때였다. 방 안에 들어가 예배를 보는데 향취가 찬바람과 함께 방 안을 진동시키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하나님 부족한 우리 어린 것들에게도 이런 이적 기사를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하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고등학교 3학년때 인천 팔미도에 소풍을 갔을 때였다. 돌아올 때에 풍랑이 심해 배가 기우뚱하며 뒤집어지려고 하였다. 아이들은 모두 갑판 위로 올라와 눕고 토하고 난리였지만 나는 혼자 찬송을 부르고 싶어 배 밑바닥에 앉아 있었다. 선생님이 오더니 ‘너 혼자 왜 여기에 있니? 올라오지 않고?’하고 역정을 내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은혜로 기쁨이 찬 내 마음을 알 리가 없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당시에 나는 늘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심을 느꼈다.

나는 꿈에 하나님께서 안찰을 해주시는 체험을 세 번이나 하였다. 한 번은 주일 전날 토요일 밤에 안찰을 해주셨는데 배가 너무나 아팠다. 깨어나니 너무 아파서 허리띠를 매지 못할 정도였다. 주일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데 단상에서 하나님께서 ‘어젯밤에 내가 몇 명 안찰을 해주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이 분이 영으로 역사 하시는구나’하고 깨달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개 장로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니신가? 나는 하나님께 ‘이제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따르겠습니다’라고 굴복하였다.

당시 인천전도관에 150명 가량 남녀학생들이 나왔는데, 모든 학생들이 교회일을 하는데 경쟁이 붙었다. 교회에서 봉사를 하는데 그 숫자가 매일 60명 정도는 되었다. 나도 교회 일을 하면서 많은 은혜를 체험하였다.

교회일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내가 은혜받기 위해 몸 사리지 않고 열심히 해야 한다. 육신이 쇠약하면 하나님 일은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다. 젊을 때 특히 중 고등 대학시절에 오로지 나를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평생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나는 늘 나의 부족함을 느끼며 생활한다. 지금 맡고 있는 직책도 나에게는 과분하다. 그러나 양로원의 어르신, 청년, 장년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하려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에 천부교를 찾은 것이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이었다.

(전 호에 이명우 권사를 이명호 권사로 정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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