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조합 활동으로 경제적 풍족 이루고 살아
정순실 권사(4) / 안양교회그 후 1957년 11월부터는 경기도 부천에 소사신앙촌이 건설되면서 건설대원을 지원받는다는 광고를 들었습니다. 저도 건설대에 지원했지만 건설대장이신 장세호 집사님이 “너는 몸이 약해서 안 돼.” 하며 받아 주지 않으셨는데, 그래도 다시 지원해서 결국 건설이 시작된 신앙촌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은혜를 아는 건설대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힘든 일을 서로 하려는 분위기였으며, 무거운 모래 나르는 질통을 가져가려고 경쟁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행여나 질통을 놓칠까 봐 질통에다 “C.S.S.”라고 제 이니셜을 크게 써 놓고는 건설대 숙소에서 잘 때도 질통에 달린 끈을 꼭 붙들고 잤습니다. 일을 할 때 제가 나르는 모래의 양은 남들보다 적었지만 그래도 하루하루 더 나아지기 위해 열심을 다했습니다. 원래 몸이 약했던 저는 건설대에서 일하면서 밥을 잘 먹고 무척 건강해졌는데, 오빠가 소사신앙촌에 와서 저를 보고는 얼굴이 몰라보게 좋아졌다며 놀라기도 했습니다.
그 후 1958년에 어머님과 오빠네 식구들도 소사신앙촌에 입주했으며, 저는 형광등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형광등 공장은 밀려드는 주문을 맞추기 위해 밤새워 일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저희들과 함께 공장에서 철야를 하시며 계속 축복해 주셨기에 피곤은 간 곳이 없었고, 오히려 더욱 힘이 나서 가뿐하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공장을 둘러보실 때 사람들이 어디가 아프다는 말씀을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바로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어렸을 적 동상에 걸렸던 저는 겨울만 되면 두 손이 시퍼렇게 되며 심한 가려움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어느 겨울날 공장에 오신 하나님께 손을 보여 드렸더니 “동상에 걸렸구나. 이젠 다 나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하시고는 “쉭! 쉭!” 하시며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 후로 고질적인 동상이 깨끗이 나았음은 물론 한 번도 재발한 적이 없습니다. 또 한번은 목에 콩알만 한 종기가 생겼다고 말씀드리자 하나님께서는 부드러우신 음성으로 “이거 연주창 아니니? 많이 아팠겠구나.” 하시며 목을 탁탁 쳐 주셨습니다. 그 후로 연주창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뿐 아니라 며칠 동안 향긋한 향취가 계속해서 맡아졌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축복으로 병이 나았던 일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습니다. 저희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시며 “그래, 축복해 줄게.” 하시던 인자하신 하나님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희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들어주시며
`그래 축복해 줄게`하시던 인자하신 하나님의 모습 잊지 못해
하나님의 축복으로 병이 나은 일은 다 열거하기도 힘들어
축복을 받은 후에는 언제나 향취가 오랫동안 진동해
그 후 1962년에 덕소신앙촌이 건설되면서 저희 가족들은 1차로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주택과 생산 공장, 학교가 모두 갖추어진 덕소신앙촌에서 온 가족이 성실하게 일하고 공부하면서 부지런하게 생활했습니다. 당시 올케 언니는 신앙촌 소비조합으로 활동하며 신앙촌에서 생산하는 다양한 제품을 판매했는데, 엑슬란 내복, 담요 등의 신앙촌 제품이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장사가 잘되어서 경제적으로도 아주 풍족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오빠는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일 때면 “우리 식구가 얼마나 큰 복을 받았니.” 하는 이야기를 자주 했습니다. “우리가 이북에서 내려오지 않았더라면 영모님을 못 만났을 텐데, 이렇게 영모님을 만나 은혜를 받고 신앙촌에서 살게 됐으니 우리는 매일매일 감사를 드려도 부족할 것 같다.” 하면서,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살자고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영육 간에 얼마나 큰 복을 받았는지 다 헤아리기는 어렵지만 순간이라도 그 감사함을 잊지 않으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저는 결혼 후 기장신앙촌에서 잠시 지내다가 서울로 이사하게 되었고, 1992년에는 다시 경기도 안양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1995년에 덕소신앙촌에 계시던 어머니가 노환으로 숨을 거두셔서 입관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생전에 어머니는 팔순을 넘기시며 점점 쇠약해지셔서 뼈와 가죽만 남았을 정도로 비쩍 마르신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장신앙촌에서 떠 온 생명물로 시신을 씻긴 후에 봤더니, 비쩍 말랐던 팔과 다리에 포동포동하게 살이 올라 뽀얗게 피어서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통통한 팔을 보면서 마치 20대 아가씨 같다고 생각했는데, 예배에 참석하신 관장님 한 분도 너무 신기해하시며 어머니의 팔을 만져 보기도 했습니다. 편안히 주무시는 것 같은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저는 마지막까지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1997년부터 신앙촌 소비조합을 시작한 저는 지금까지 10년 동안 꾸준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품질 좋은 신앙촌 제품을 판매하면서 고객들과 십년지기처럼 신뢰를 쌓게 되었고, 하루하루 부지런한 생활 속에서 이처럼 건강하고 활기차게 지낼 수 있는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흘러 어느새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지만, 소사신앙촌에서 즐겁게 일했던 20대 시절의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꼭 필요한 자가 되어라.” 하신 하나님 말씀대로 이 귀한 구원의 길을 열심히 달려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한없는 은혜를 허락하시는 하나님께 오늘도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기쁘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