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종교 탐구 <7> 바빌론과 성경에 대하여
세계 종교 탐구 <7>지금부터 90여 년 전인 1930년, 독일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아치형의 거대하고 아름다운 성문이 전시되었다. 성문 벽을 쌓아 올린 푸른색 벽돌은 화려하게 반짝였으며, 벽면에는 포효하는 사자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생생하게 돋을새김 되어 있었다.<자료1,2,3> 그러나 관람객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성문이 발굴된 장소였다. 이 성문은 바빌론의 성곽에 설치되었던 것을 그대로 옮겨온 것으로, 관람객들은 성경에 기록된 도시 바빌론의 유물을 눈앞에서 보게 되었다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바빌론은 성경에 여러 가지 사건이 기록된 도시였다.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이 쌓아 올린 ‘바벨탑’은 인간의 오만함을 상징하는 이야기로 유명했고, 유대인 선지자 다니엘이 활동했던 도시도 바빌론이었다. 또 바빌론 군대가 유대인의 도시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수많은 유대인을 포로로 끌고 간 사실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었다.
바빌론은 2600년 전에 있었던 신(新)바빌로니아의 수도였으며, 현재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80Km 떨어진 위치에 있다. 화려한 건축물을 자랑하던 바빌론이었지만 멸망 후에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점차 황폐해졌고 시간이 흐르면서 사막의 모래바람에 묻히게 되었다. 황량하고 메마른 모래 언덕이었던 바빌론을, 독일의 고고학 팀이 수십 미터의 모래더미를 걷어내는 작업 끝에 마침내 발굴해 냈던 것이다. 바빌론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면서 바빌론의 기록도 해독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뜻밖에도 성경에 대한 진실과 마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번 『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바빌론의 발굴과 연구 과정을 따라가며 성경과 맞닿는 순간을 짚어 본다.
바빌론은 1898년 독일에 의해 발굴되기 시작했는데 그 중심에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1859~1941)가 있었다.<자료4> 그는 발굴을 위해 ‘독일 오리엔트 협회’를 설립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으며 발굴에 필요한 자금을 황제의 개인 금고에서 지출할 정도로 바빌론에 대해 남다른 애착과 관심을 보였다.
그 이유는 황제가 박물관을 건립할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를린 한가운데 세워진 박물관에 진귀한 유물을 채우고 수많은 사람이 몰려오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황제가 생각하기에 무엇보다 진귀한 유물은 성경의 무대에서 발굴된 것이었고 그것은 독일뿐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등 기독교 국가의 공통적인 경향이었다.
독일의 고고학자 프리드리히 델리취(1850~1922)는 이렇게 말했다. “비싼 돈 들여가며 수천 년 동안 버려졌던 잡석을 휘젓는 이유는 무엇이며, 금이나 은이 나올 것이라는 희망도 없는데 지하 깊숙이 파 들어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빌론 발굴에 대해 계속 높아만 가고 있는 관심의 토대는 무엇인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는 하나의 해답이 있다. 바로 성경이다.”(프리드리히 델리취, 강연집 『바벨과 성경』,라이프치히 출판사,1902.,p.3)<자료5>
델리취 교수가 지적한 대로, 독일 황제가 바빌론 발굴을 전폭적으로 지원한 것은 성경의 도시를 발굴한다는 종교적 열망이 큰 이유였다. 유적지를 발굴하고 거대한 유물을 운반하는 것은 엄청난 노력과 재원이 필요한 일이었는데, 독일에 앞서서 프랑스와 영국도 성경의 무대를 발굴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자료6,7>
프랑스는 니느웨(현재 이라크에 위치)를 발굴해 날개 달린 거대한 황소 석상을 루브르 박물관으로 운반해 왔는데, 니느웨는 성경에서 요나 선지자가 활동했던 도시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또 영국은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였던 님루드(현재 이라크에 위치)를 발굴해 전쟁 장면이 정교하게 돋을새김 된 석판을 영국 국립 박물관으로 가져왔다. 아시리아는 성경에 포악한 제국으로 묘사돼 있었기 때문에 관람객들은 석판에 새겨진 전쟁 장면을 보고 흥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루브르 박물관과 영국 국립 박물관이 큰 인기를 끌며 화제가 되는 속에서 독일은 바빌론 발굴을 시작했다. 조사를 통해 20m 두께의 모래와 진흙층 아래 건물과 벽이 묻혀 있는 곳이 밝혀지자 그곳을 수직으로 파 내려가 단면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정한 위치에서 자기로 구워진 푸른색 벽돌이 계속해서 발견되면서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발굴했는데, 9개월 후 푸른 벽돌로 쌓은 성문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보존 상태가 좋았던 성문의 벽돌은 수백 개 궤짝에 담겨 독일로 운반되었고 새롭게 세워진 박물관 안에 14m 높이로 설치되었다. 그것이 1930년 페르가몬 박물관에 설치된 바빌론의 성문이었다. 독일 황제가 원했던 대로 성경의 이야기를 담은 진귀한 유물이 전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발굴은 뜻하지 않은 증거물을 찾아내게 되었는데, 성경에 기록된 도시를 발굴할수록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성경에 기록된 바빌론의 이야기가 전부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실제 발굴된 바빌론의 모습을 보고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성경을 보면 바빌론의 왕 느부갓네살은 잔혹하고 폭력적인 면만 부각되어 있는데, 사실 그는 최첨단의 건축 기술을 발휘해 도시를 세운 왕이었다. 유프라테스의 강물을 끌어와 물이 풍족히 공급되게 했고 황량한 사막에서 푸른 초목이 우거진 공중 정원을 만들었던 것이다.<자료8> 이를 알게 된 사람들은 “왜 성경은 바빌론 왕의 부정적인 면만 부각하여 기록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고고학자이자 미국 콜롬비아대학 교수인 마크 반 드 미에룹은 이렇게 설명했다. “바빌론의 왕은 예루살렘을 침략해 유대인의 성전을 파괴한 왕이었다. 유대인은 바빌론의 왕이 자신들의 성전을 파괴하고 동족을 포로로 끌고 갔기 때문에 그를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할 수밖에 없었다.”(EBS 다큐 프라임 “위대한 바빌론 2부 바벨탑” 2013.1.29. 방영)
서기전 601년 바빌론의 왕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성전을 파괴한 것은 유대인에게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또 수천 명의 유대인을 바빌론으로 끌고 가 포로 생활을 하게 만든 것은 유대인 역사에서 잊지 못할 수난이었다. 그들의 시각에서 기록된 성경이 바빌론에 대해 결코 호의적일 수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다시 말해 성경에 유대인의 시각이 반영되어 일부 사실은 부각하고 일부 사실은 누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고고학자 장 보테로는 “성경도 사관(史觀)의 문제”라고 간단하게 정리했다.(장 보테로,『메소포타미아』, 시공사, 2008., p.48.) 성경도 집필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여느 역사책과 다를 바 없다는 설명이었다.
성경을 ‘인간이 집필한 역사책’이라고 보는 것과 ‘신의 계시가 쓰인 기록’이라고 보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성경을 인간의 책이라고 보게 만든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성경을 신의 계시라고 받들던 기독교 국가들이었다. 이들이 열정적으로 뛰어들었던 고대 세계의 발굴과 연구가 사실에 대해 눈뜨게 만든 것이었다.
성경에서 바빌론은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바벨탑을 쌓으며 ‘신에 도전하는 오만한 도시’로 묘사되어 있다.<자료9>그러나 실제 바빌론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을 경배하 고 찬미하는 종교 생활을 영위했던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들이 사용하던 언어인 ‘악카드어’를 해독하고 쐐기 문자로 기록된 점토판을 연구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바빌론에서 중요한 종교 행사는 해마다 열리는 신년 축제였다. 바빌론 사람들은 ‘마르둑’이라는 신을 최고의 신으로 섬겼기 때문에 신년 축제에서 마르둑을 찬미하는 행사가 벌어졌다. 이때 제사장은 수많은 관중 앞에 나와 “에누마 엘리쉬”라는 서사시를 낭독했다.<자료10> 이는 마르둑이 천지를 창조하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는 내용이었고, 먼저 하늘과 땅이 없었던 태초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시작되었다.<자료11> 마르둑이 창공을 만들어 해와 달과 별을 두고, 그것의 움직임에 따라 절기와 날을 세도록 만드는 과정이 묘사되어 있었다.
⌈해를 정하고 절기를 나누었다.
열두 달에 세 별을 세웠다.
이에 따라 일 년의 날짜를 정했다.⌋
<에누마 엘리쉬 다섯째 토판 3행~5행>
그리고 물을 모이게 한 후 육지와 바다를 만들었다고 묘사하는데 이는 바빌론의 지리적 조건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바빌론이 있었던 메소포타미아(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지역, 현재 이라크와 일부 국가)는 두 강줄기가 실어온 퇴적토가 육지인 삼각주를 만들고 강물이 페르시아만으로 흘러가 바다가 되었던 것이다.<자료12> 그 지역에서는 물이 모여 땅이 되고 바다가 되었던 셈이다.
이러한 내용을 유대인들도 해마다 들을 수 있었다. 유대인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왔던 시기(서기전 587~ 서기전 538)에도 신년 축제가 열려 에누마 엘리쉬를 통해 신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바빌론에서의 포로 생활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자신들의 성경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성경 창세기 1장 6절부터 19절의 내용을 보면 유대인들의 하느님(엘로힘)이 창공을 만들어 해와 달과 별을 두고 그에 따라 절기와 날을 세는 징표가 되게 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그중에서 1장 14절은 이런 내용이다.
⌈낮과 밤 사이를 갈라 놓기 위하여
하늘의 창공에 빛들이 있어라.
그래서 절기와 날수와 햇수의 징표가 되어라.⌋
<성경 창세기 1장 14절>
그다음 엘로힘이 물을 모이게 한 후 육지와 바다를 만드는 과정이 묘사돼 있는데, 이는 에누마 엘리쉬에서 ‘마르둑’이 행한 것과 같은 과정이었다. 유대인이 살았던 예루살렘은 두 강줄기가 모여 퇴적토를 만들고 바다로 들어가는 환경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이러한 내용이 그들의 성경에 포함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었다.
창조의 과정뿐 아니라 바빌론에서 쓰이던 표현이 그대로 성경에 들어간 것도 있었다. 창세기 5장 3절에 “아담이 그와 닮게 그의 모습처럼 아이를 낳았다.”는 표현은 바빌론 사람들이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고 표현할 때 사용하는 숙어였다. 이 표현은 에누마 엘리쉬 첫째 토판 15절~16절에도 나오는데, “안샤르는 그의 자식 아누를 그와 닮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누는 누딤무드를 그의 모습으로 낳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조철수, 『사람이 없었다, 신도 없었다』, 서운관, 1995., p.66~67.)
성경이 집필된 것은 서기전 400년대이며, 에누마 엘리쉬가 쓰여진 것은 서기전 1100년대~1200년대로 추정되고 있으니 에누마 엘리쉬는 성경보다 700년을 앞서 기록된 천지 창조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바빌론에서 널리 퍼졌던 이 창조 서사시가 성경의 창세기가 되고, 바빌론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던 표현이 성경의 관용구가 된 셈이었다.
지금부터 120여 년 전, 바빌론의 발굴을 주도했던 독일 황제는 성경이 신의 계시라고 신봉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주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성경이 신의 계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며 분노하기도 했다.(<그렌츠보텐>, 라이프치히 출판사, vol.62 1903년 1분기, p.493.) 독일 황제가 살아 있다면, 바빌론의 발굴이 가져온 결과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다음 번『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널리 퍼졌던 또 다른 창조 이야기에 대하여 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