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종교 탐구 <14> 민족문화 말살의 변천사를 따라서
이번『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시대에 따라 변화했던 민족문화 말살의 모습에 대해 알아본다.오는 3월 1일이면 삼일절이 올해로 103주년을 맞이한다. 한민족 최대 규모의 항일독립운동이 일어났던 3월 1일은 우리나라 독립사에 있어 역사적인 날이다. 이를 기념하듯 1996년의 3월 1일에는 광복 50주년을 맞아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한 정책이 시행됐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초등학교로 변경하는 것이었다.
국민학교란 ‘우리나라 국민’의 학교라는 뜻이 아니다. 황국신민학교의 준말로 ‘황국의 신민’을 양성하는 학교였다. 일본은 자기 나라를 천황이 다스리는 나라라 하여 황국이라 칭했고, 조선인을 황국의 신하된 백성으로 양성하려 했던 것이다. 국민학교에선 매일 아침 일왕에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의 황국신민서사를 제창하게 했고,<자료1> 우리말과 역사 교육을 금지시키고 일본어를 사용하게 했으며, 일본식으로 성과 이름을 바꾸지 않으면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국민학교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말살시키고 충실한 일본인이 되게 하려는 이른바 ‘민족문화 말살 정책’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일왕을 최고신으로 받드는 일본은 우리나라 각 가정마다 일왕의 직계 조상이자 일본의 시조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신주를 걸어놓고 숭배하게 했고, 사이렌 소리에 맞춰 아침 7시에는 일왕이 사는 동쪽으로 고개 숙여 절을 하게 하고,<자료2> 정오에는 일왕을 위해 묵도하게 했다. 또 지방 곳곳에 천백 여개의 신사를 지어 일본 조상신들에 참배토록 했다.
이와 같이 지배국이 피지배국의 민족문화를 말살하고 자신들의 문화를 강제하는 것은 일본만의 특유한 정책이 아니다. 이러한 정책은 고대에서부터 존재했으며, 말살의 모습을 조금씩 달리한 채 현대까지도 이어져 왔다.
이번『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시대에 따라 변화했던 민족문화 말살의 모습에 대해 알아본다.
▣ 고대의 문화 말살: 완전한 정복을 위해
민족문화를 말살하는 최초의 기록은 고대 수메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시작은 전쟁이었다. 수메르의 중소도시 움마는 이웃한 대도시 라가쉬와 국경선인 수로를 두고 잦은 분쟁을 벌였다. 움마는 전쟁을 감행했고 승리했다. 이에 라가쉬는 군대를 재정비하여 움마를 정복했다. 움마는 다시 라가쉬를 침공했지만 패배한다. 서기전 2350년경, 움마는 보복 전쟁 없는 완전한 정복을 위해 이번에는 라가쉬를 아예 말살시켜 버린다.
이 시기 라가쉬의 한 사제 또는 서기가 기록한 문서가 이라크 텔로 유적지에서 발굴되었다.<자료3> 이 점토판에는 불타고 약탈당하고 파괴된 라가쉬의 사원과 신전들의 목록이 상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신전의 이름과 그 피해가 반복되는 형식으로,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움마의 사람들은 에키 신전을 불태웠다. 그들은 안타수라 신전을 불태웠다. 그들은 은과 보석들을 가져갔다. 그들은 엔릴의 신전에서 피를 흘렸고, 태양신의 신전에서 피를 흘렸다. 그들은 가툼둑의 신전에 불을 질렀다. 그들은 은과 보석을 빼앗고 신상을 파괴했다! 그들은 여신 닌니의 신전 에안나의 신전에 불을 질렀다. 그들은 은과 보석을 빼앗고 신상을 파괴했다.”
과거 수메르는 제정일치 사회로, 신을 받들고 제사하는 일이 곧 정치의 중심인 사회였다. 신전과 신상을 파괴하는 것은 그들의 주체와 문화와 민족적 자긍심을 동시에 짓밟는 행위였고, 이것은 최초의 민족문화 말살이라 할 수 있다.
이후에도 민족문화 말살은 계속 행해졌다. 수메르의 또 다른 기록 ‘니푸르 파괴에 대한 애도가’에서 “그곳의 관습과 종교적 의식은 더럽혀졌고, 종교적 축제는 더 이상 경축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죽고 약탈당했으며, 젊은 남녀와 아이들은 학살되었고 파괴된 신전은 참담했다”며 “왜 니푸르의 거대한 신전들은 사라져버렸는가, 최고의 신전과 도시가 어떻게 이토록 황폐해졌는가” 한탄하는 내용을 볼 수 있다.
▣ 중세의 민족문화 말살: 정당성을 부여받다
중세에는 원주민에 대한 민족문화 말살이 횡행했다. 유럽 국가들은 원주민의 신전과 신상을 파괴하고 서양의 종교를 강요했다. 일례로 스페인은 아즈텍 전역에서 황금과 은, 보석을 닥치는 대로 긁어모아 본국으로 보냈고, 아즈텍인들에게 기독교를 강요하며 아즈텍 전통 신앙을 철저히 금지하는 선교사업을 벌였다. 아즈텍의 신전을 모두 기독교 교회로 개조하고, 아즈텍 신들의 상 대신 예수와 성모마리아 상을 들여놓았다. 몰래 섬길 수도 없도록 집을 뒤져 신상을 부숴버렸다.
1524년 아즈텍 성직자들은 스페인에서 온 프란체스코회 수사들에게 “당신네 스페인인들은 이미 우리나라를 멸망시켰고 땅을 빼앗았습니다.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더 이상 우리에게 당신들의 방식을 강요하지 마십시오.”하고 하소연했지만 그들의 강요는 계속되었다. 아즈텍인들의 불만은 커져갔고 1533년에는 “저 그리스도교 성직자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우리 신들을 잘 섬겨서 행복한 삶을 살았다. 저들은 우리의 신들을 악마라고 비난하지만, 오히려 저들이야말로 세상의 종말에 나타난 악마들이다!”라며 비난했다.(도현신,「지도에서 사라진 종교들」, 서해문집, 2016., p.198.)
1537년 스페인은 기독교를 반대하던 이들을 화형 시켜버린다. 아즈텍에서 생사람을 불태워 죽이는 건 상상하지도 못할 일이었고, 아즈텍인들은 듣도 보도 못한 야만적인 광경에 치를 떨었다. 하지만 혹독한 감시와 탄압으로 아즈텍인들은 끝내 그 종교로 개종하고 만다.
1532년, 스페인은 페루의 잉카 제국에 가서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고요한 왕국 잉카여! 하느님을 대신하시는 신성한 교황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께서 악마를 추종하는 그대들의 무지를 이해하시어…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제들을 보내시어 신성한 하느님의 율법을 가르치게 하셨다. 그대들은 우리를 맞이하고 신성한 율법의 가르침을 들어라.”
이를 듣고 있던 잉카 황제 아타우알파의 눈에는 그들이야말로 문명화되지 않은 야만인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었고 그들을 건방지게 여겼다. 하지만 전쟁에서 진 황제는 스페인에 붙잡혀 광장에 끌려나와 말뚝에 묶인 채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지 않으면 화형에 처해질 위기에 놓인다.<자료4> 잉카인들은 육체가 파괴되어 죽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고, 결국 그는 프란치스코 아타우알파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약속대로 그는 교살로 처형됐지만 스페인은 그가 죽자마자 바로 화형시킨 뒤 광장에 밤새도록 두어 누구든 그의 시신을 볼 수 있게 했다.
남의 나라를 침략하면서도 오히려 아량를 베푸는 듯한 스페인의 당당함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들은 자신들이 원주민의 땅을 정복해야 할 신성불가침한 권리와 사명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1493년 가톨릭 국가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서 신대륙 발견지 소유권에 대한 분쟁이 일어나자,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이 분쟁을 조정하기 위하여 교서(敎書)를 발표한다.<자료5> 신의 대리인이라는 교황이 지구를 반으로 갈라 왼쪽은 스페인에게, 오른쪽은 포르투갈에게 부여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교서에 의하면 아즈텍과 잉카 정복은 그저 자신들의 땅을 정당히 차지한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들은 원주민 대륙을 정복해야 한다는 사명감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 사명감은 1492년 콜롬버스가 스페인의 왕과 왕비에게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 그곳의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은 채 우상숭배에 빠져들고, 사교를 신봉해 왔습니다. 그리스도교로서 성스러운 그리스도의 믿음에 헌신하여 그것을 널리 전파하고, 이슬람교를 비롯한 모든 우상숭배와 사교를 타파하기 위해 노력하는 통치자시여. 두 분 폐하께서는 바로 이 사람을 인디아 땅으로 파견하시어 그 지역의 지배자들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 그 지역의 원주민들을 우리의 성스러운 종교로 개종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분부하셨습니다. (…) 두분 폐하의 말씀을 그 지역의 지배자들에게 전달하여 그 명령을 따르게 할 계획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서, 이번 항해 동안 제가 한 행동과 보고 경험한 모든 것에 관해 하나도 빼놓지 않고 자세히 기록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
이처럼 원주민 땅을 정복해야 할 권리와 사명이 있던 그들은 그토록 당당한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인류의 범죄사」의 저자 콜린 윌슨은 ‘범죄자란 기본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몰래 훔치거나 강제로 빼앗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하물며 빼앗아야 할 권리와 사명을 가진 이들은 더없이 거침없는 민족문화 말살을 보여주었다.
정당성을 부여했던 교황의 교서는 원주민 민족문화 말살의 시발점이었고, 이를 시작으로 원주민에 대한 문화 말살은 현대까지도 계속되었다.
▣ 현대의 민족문화 말살: 말살을 은폐하다
지난 2015년, 원주민 기숙학교의 진상을 조사하고 알리기 위한 조직인 캐나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원주민 기숙학교 생존자 6750명의 1355시간에 이르는 증언을 수집하고 분석하여 최종보고서를 발표했다. 최종 요약보고서는 첫 장, 첫 문장부터 원주민 기숙학교는 ‘명목상 교육 시스템이었다’고 명시하며 시작한다. 원주민 기숙학교는 교육의 탈을 쓴 문화말살의 현장이었다. 1867년 캐나다가 국가로 세워지기 전인 17세기 초부터 가톨릭 교회는 원주민 기숙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고 있었다. 원주민 아이들을 ‘문명화’하고 ‘기독교화’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부모는 자녀를 그 학교에 보내기 꺼려했고, 학생들은 재빠르게 도망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1883년부터는 캐나다 정부의 허가를 받아내 전국적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정부는 ‘모든 문명은 종교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원주민의 민족성을 없애려면 대체할 더 나은 종교를 제공해야 한다’는 논리로 교회가 학교를 운영하는 것을 허가한 것이었다. 학교의 수를 늘리려는 가톨릭의 추진력은 실로 대단했다. 급기야는 정부 지원이나 승인 없이 기숙학교를 설립하고 나중에 자금 지원을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캐나다 정부는 그들의 지나친 추진력을 통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으나 실패할 정도였다. 학교의 수는 계속해서 늘어났고 가톨릭은 빠른 속도로 이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가톨릭은 17세기 초 원주민 부모들의 반대로 기숙학교를 활성화시키지 못했던 과거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이번에는 가장 먼저 아이들을 부모들과 떨어트려 놓았다.<자료6>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큰 트럭이나 ‘눈물의 기차’에 실려가 부모와 강제로 이별해야 했다. 그곳에 도착하자 검은 옷을 입고 긴 가운을 입은 신부들과 수녀들이 아이들을 맞이했다.<자료7> 아이들은 하루아침에 원주민 언어와 의복, 종교 의식을 금지당해야 했다. 집에서 가져온 원주민 옷가지는 불태워졌고, 긴 머리는 짧게 잘렸다.<자료8> 아이들은 원래의 이름 대신 번호로 불렸다. 영어를 사용하는 그들의 말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고, 아이들이 이 학교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다.
수용 기간 동안 신부와 수녀들은 신체적, 정신적, 성적인 폭행을 일삼았고, 많은 아이들이 도망치고 자살을 시도했다. 보고서에서는 원주민 기숙학교가 운영되었던 100여 년간 아이들은 끔찍한 학대와 영양실조, 질병, 자살 등을 포함하여 최소 4천100명이 사망했으며 최대 6000명이 죽어 나갔다고 추산했다. 그러나 이것은 2015년까지만 밝혀진 사실에 불과했다.
작년 5월, 캐나다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다. 캠루프스 원주민 기숙학교 부지에서 어린이 유해 215구가 무더기로 발견된 것이다. 그러나 충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캠루프스의 암매장 소식에 원주민 단체들이 나서서 다른 학교들의 암매장 여부도 조사하기 시작하자 캠루프스뿐만 아니라 매니토바, 서스캐처원, BC 크랜브룩 등 다른 원주민 기숙학교 부지에서도 총 1000여 구가 훌쩍 넘는 유해가 연이어 발견됐기 때문이다.<자료9>
지난달 25일에도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의 한 원주민 기숙학교 부지에서 아이들을 암매장한 사실이 또 드러났다. 윌리엄스 레이크 원주민 부족의 추장 윌리 셀라스는 성 요셉 미션 원주민 기숙학교(St.Joseph’s Mission Residential School)<자료10> 부지에 대해 지표면 탐사를 진행한 결과, 유해가 묻혀 있는 것으로 보이는 매장지 93곳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번 탐사는 전체 학교 부지 470㏊ 중 14㏊를 대상으로 우선 실시한 것으로, 조사 작업이 계속 진행되면 추가적인 결과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고 현지 언론은 전했다. 한 곳에서도 몇백여 구의 유해가 발견되고 있는 가운데, 캐나다의 원주민 기숙학교는 전국 139곳 존재했다고 알려져있다.<자료11>
윌리 셀라스는 “우리 조사팀은 아동과 유아의 살인 및 실종에 관한 이야기를 녹음했을 뿐만 아니라 아동에 대한 조직적인 고문, 기아, 강간 및 성폭행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또한 “아이들의 시신이 인근 강과 호수에 처분되었다는 증거와 학교의 소각로가 아이들을 처리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증거를 발견했다”고 했다.
현대의 민족문화 말살도 상대의 민족문화를 말살하고 자신들의 문화를 강요하는 본질은 중세와 같았다. 하지만 교육이란 가면을 써야 했고, 아이들의 시체를 땅에 묻고, 강물에 던지고, 불로 소각시켜 은폐해야 했다. 정당성을 얻었던 중세의 당당함은 어디로 간 것일까?
현대의 민족문화 말살도 정당하다 믿어 자행된 사건들이었다. 보고서에 의하면 원주민 기숙학교의 역사는 가톨릭 교황의 교서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원주민 문화보다 유럽 문명과 기독교 종교가 우월하다는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들이 학살을 정당화했던 근거는 자신들의 특정한 신념과 가치가 전 세계 사람들에게 부과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정당성을 당당히 주장하기엔 시대가 변했다.
미국의 과학자 마이클 셔머는 자신의 저서「도덕의 궤적」<자료12>에서 “인류는 ‘과학’과 ‘이성’을 통해 도덕적으로 진보해왔고, 현재 인류는 종의 역사에서 가장 도덕적인 시기를 살고 있으며, 앞으로 더 진보하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과학적 방법론으로 이를 논증하였다. 그는「도덕의 궤적」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단지 내 것이라는 이유로, 또는 전통적이라는 이유로 내 믿음, 내 도덕, 내 삶의 방식이 남들 것보다 더 낫다는 것은 점점 받아들여질 수 없는 주장이 되었다. 내 종교가 남의 종교보다 낫다거나, 내가 믿는 신만이 진짜 신이고 남이 믿는 신은 그렇지 않다거나, 내 나라가 당신의 나라를 맹공격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이유가 될 수 없다.
이제는 내 도덕적 믿음이 옳다고 무작정 우겨봤자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는다. 정당한 근거를 대야 한다. 그리고 그 근거들은 이성적 논증과 경험적 증거에 따라 과학적 기반을 둔 것이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무시당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현대는 종교의 자유가 보편화 되었으며, 집단 학살은 공공의 범죄로 규정하고, 과거의 학살은 자성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그들이 원주민 기숙학교의 정당성을 주장하기에는 그 근거들이 이성적 논증과 경험적 증거에 기반을 둔 것이라 할 수 없었다. 따라서 교육이란 명목을 내세우지 않으면 문화 말살을 할 수 없었고, 은폐하지 않으면 그 조직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진실화해위원회의 보고서에서도 ‘가해자들은 세계의 원주민들에게 기독교와 문명을 가져다 줄 필요가 있다는, 기숙학교 운영을 정당화할 확고한 신념이 있었겠지만, 그 정당성은 법적, 도덕적, 심지어 논리적으로 유효하지 않다. 교황은 원주민에게 속한 땅을 양도할 권한이 없으며, 원주민은 문명화될 필요가 없었다. 그들에게 맞는 시스템을 가지고 다른 문명을 이루며 살고 있었을 뿐’이라며 그들의 근본적 과오을 짚어 설명하였다.
과학의 발전으로 유대인이 흑사병을 옮기지 않았고, 마녀는 없다는 것이 당연해진 시대가 되었고, 땅을 파보지 않고도 어린이 유해의 존재를 알아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마이클 셔머의 표현을 빌리자면 과학적 사고에 기반을 둔 이성적 세계관이 발전해 나간다면 도덕의 궤적은 점점 정의를 향해 구부러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