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신 나를 오라 하네…’ 일생 함께 해 주신 은혜에 감사할 뿐
박희애 권사 / 기장신앙촌그 후 저는 1970년경에 아이들과 함께 소사신앙촌을 거쳐 덕소신앙촌에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부터 신앙촌 물건을 조금씩 판매했던 저는 신앙촌에 입주한 뒤로 하루도 빠짐없이 장사를 다니며 신앙촌 소비조합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신앙촌에서는 각종 생필품부터 악기와 전기 제품까지 다양한 물건이 생산되었는데, 그중에서 저는 양재와 편물 제품을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는 자가용이 흔하지 않아서 물건을 직접 들고 다니며 판매했기 때문에, 근력이 약한 저는 되도록 가벼운 제품을 택한 것이 양재와 편물 같은 의류였습니다. 방문 판매를 하며 집집마다 다닐 때 낯선 사람에게 말을 꺼내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일단 신앙촌 제품을 써 본 사람들은 좋은 물건이라면서 너도나도 앞 다투어 구입했으며, 다음에도 꼭 신앙촌 물건을 찾았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장사에 재미가 붙었습니다. 오랫동안 왕래하면서 신뢰를 쌓게 된 단골 고객들은 친정어머니나 언니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고민을 저에게 털어놓으면서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방문하는 집집마다 반갑게 맞아 주는 속에서, 즐겁고 신나게 판매하며 매일매일 활기차게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소비조합을 하면서 세월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고 30년이라는 시간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을 한들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 있었을지, 지금도 그때처럼 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고 생각하곤 합니다.
저는 신앙촌 제품을 판매하여 생계를 해결했으며, 자식들의 대학 공부까지 뒷바라지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신앙촌에서 바르고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마음속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곤 했습니다.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던 딸아이는 서울 2중앙의 피아노 반주를 맡게 되었는데, 일요일마다 제단에 일찍 가서 피아노를 깨끗이 청소한 후 정성껏 반주를 하곤 했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아이들은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 가정을 꾸리며 윤택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이 길에서 멀어져 있지만 가슴 한구석에 하나님과 신앙촌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는 아이들이 언젠가는 이 길로 돌아와서 저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1977년에는 70대에 접어드신 아버지가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하시게 되어 서울에 있는 남동생 집에서 모시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처음 전도관에 나가실 때 심하게 반대하셨지만 수십 년 한결같은 어머니의 신앙과 전도에 조금씩 마음이 녹으셔서 전도관에 다니는 것을 말없이 후원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오신 후부터는 집과 가까운 역촌동전도관의 관장님과 교인 분들을 모시고 자주 심방예배를 드리기도 하셨습니다. 저는 소비조합을 하는 틈틈이 아버지를 찾아뵈었는데 하루는 저를 부르시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아가, 내가 너한테 죄를 많이 지었다. 그동안 전도관에 다닌다고 너를 미워했거든. 그게 다 하나님 앞에 죄가 되지 뭐냐, 이 아비를 용서해라.” 그로부터 얼마 후 아버지는 편안히 눈을 감으셨고, 생전에 간곡하게 원하셨던 뜻을 받들어 전도관식으로 장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관장님과 교인 분들이 오셔서 입관예배를 드리며 생명물로 씻겨 드렸을 때, 아버지는 곤하게 잠이 드신 분처럼 참으로 편안하고 깨끗해 보였습니다.
저는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해서 오랫동안 제단에서 성가대로 활동했는데, 1985년부터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시온합창단의 연주회가 열렸을 때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합창단원들에게 수시로 축복해 주시며 연주회 때 친히 무대에 서서 저희와 함께 노래를 하셨습니다. 1500명의 합창단이 출연했던 18회 연주회에서는 “하이든의 사계”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연주하면서, 중간 중간에 전문 성악가들의 독창 순서가 있었습니다. 독창이 연주되는 동안 합창단 쪽의 조명이 꺼지고 단원들이 제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그때가 한겨울이라 감기에 걸린 사람들의 기침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습니다. 저도 감기에 걸려서 자꾸 콜록거리는 데다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여간 답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침 소리를 들으시고는 곧바로 주머니에서 은단을 꺼내 축복하신 후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저도 그 은단을 먹었는데 그때부터 거짓말같이 기침이 멈추고 목소리가 시원하게 뚫려서 노래를 잘 부를 수 있었습니다. 당시 합창을 했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하시며 아낌없이 은혜를 베풀어 주신 일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때 즈음 저는 대학생이던 막내아들을 불의의 사고로 잃는 크나큰 슬픔을 겪게 되었습니다.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는 말처럼 삶에 깊은 상처가 되는 일이었지만 저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마음을 다잡으려고 애썼습니다. 합창 연습을 하는 동안은 노래에 열중하면서 아픈 마음을 잠시 접어둘 수 있었고, 합창단원들을 자주 불러 계속 축복해 주셨기에 그 은혜 속에서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덕소신앙촌의 임원이었던 분이 하나님을 뵙게 되었을 때 제 아들의 죽음에 대해 말씀드려서 아들 사진을 하나님께 드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진을 보시고 “내가 기억해 주지, 그럼 기억하고말고.” 하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저는 괴롭고 아프던 마음에 한없는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가슴에 묻는 것은 일생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기도 하지만, 저는 은혜 속에서 그 상처가 점점 아물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의지와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87년에는 어머니가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습니다. 한양대병원에서 숨을 거두셔서 시체 보관실에 들어가셨는데, 다음 날 시신을 꺼낼 때 보니 어머니의 얼굴이 뽀얗게 피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돌아가신 지 24시간이 지났음에도 오히려 살아 계실 때보다 더 보기 좋게 피어서 잠깐 주무시는 것 같았습니다. 장례반 권사님이 생명물로 씻겨 드리자 팔다리, 머리 할 것 없이 온몸이 노글노글하게 피어서, 마치 살아 있는 분에게 옷을 입히듯이 몸을 이리저리로 움직이며 수의를 입혀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뵈온 후로 진실하게 이 길을 따르고자 노력하셨던 어머니는 참으로 곱고 평안한 모습으로 가셨습니다.
소비조합으로 계속 활동하던 저는 1995년에 기장신앙촌에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곳 목욕탕에서 근무하시던 송순음 승사님이 돌아가셨을 때 생명물로 씻어 예쁘게 핀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마치 어린애 피부에 분을 발라 놓은 것처럼 뽀얗고 맑게 핀 얼굴을 보면서 입관예배에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이 다 같이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께서 낙원으로 가신 후에도 시신이 아름답게 피는 것을 볼 때마다, 변함없이 저희와 함께해 주시는 그 권능과 사랑에 한없이 감사드릴 뿐입니다.
제가 처음 전도관에 다니기 시작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성신 나를 오라 하네~” 하는 찬송가를 부르며 성신께서 저와 함께해 주시기를 눈물로 간구했던 때가 떠오릅니다. 집안의 가장이 세상을 떠나고 올망졸망 어린 자식들과 저만 남게 되었을 때, ‘만약 신앙촌 소비조합을 하지 않았다면 내가 그토록 즐겁고 신나게 일하면서 아이들을 키울 수 있었을까?’ 하며 그 시절을 돌아보게 됩니다. 이제 저는 건강한 몸과 정신으로 귀한 길을 끝까지 따르고 싶은 소망 하나뿐입니다. 마음과 생각으로도 죄짓지 않으며 맑고 성결하게 살아서 그날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올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