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신을 받지 못한 인학으로는 고차원의 신학을 알수 없어

황순희 관장(2) / 삼천포 교회
발행일 발행호수 2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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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황순희 관장. 삼천포 교회

박 장로님 집회에 참석하기 전까지 저는 ‘종교를 가지면 이 세상을 좀 더 선하게 살아갈 수 있고 인격적인 면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하는 생각으로 감리교회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존재나 천국과 지옥, 구원에 대한 이야기들은 저에게 그저 막연하게만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박 장로님의 집회에서 은혜를 직접 체험하며 ‘진실로 하나님께서 계시는구나. 이렇게 은혜를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멀게만 느껴졌던 하나님의 존재가 그때 비로소 가깝게 와 닿았습니다.

박장로님의 집회에서 은혜를 체험한 후
‘진실로 하나님께서 계셔서
이렇게 은혜를 주시는 구나’
생각 들어 하나님의 존재가 비로소 가까이 느껴져

마산집회가 끝난 후 저는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우리나라에서 여성들의 사회 활동이 많지 않은 시절이었지만, 저는 이화여대 약학과에 진학하면서 졸업 후에 사회 활동을 하는 것이 보람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박 장로님 집회에서 깨닫게 된 구원의 말씀과 놀라운 은혜는 그러한 인생관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하나님을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저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유한한 인생을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에 매진하며 살고 싶었습니다. 그때 신문에서 신학대학 신입생 모집 광고를 보고 ‘하나님을 증거하려면 일단 기본적인 학식을 쌓아야겠구나.’ 하고 생각한 저는 몇 개월 후 서울 서대문의 감리교 신학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 학교 학생들은 일요일마다 인근의 감리교회로 봉사 활동을 나갔는데, 저는 박태선 장로님께서 원효로에 전도관을 세우셨다는 소식을 듣고 매주 그곳에 가서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원효로전도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콩나물시루같이 빼곡히 들어찼으며 제단 밖의 둑에까지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박 장로님께서는 빈틈없이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를 다니시며 일일이 안수를 해 주셨는데, 하루는 저에게 안수를 해 주신 후 몇 걸음 앞으로 가셨다가 다시 오셔서 한 번 더 안수를 해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탁!’ 하고 손이 닿는 순간 박하사탕을 먹은 것처럼 속이 시원해지면서 뻥 뚫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온몸이 가볍고 상쾌한 그 느낌을 어떻게 형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제가 다니던 신학교에서는 매일 정오에 예배를 드렸는데 어찌 된 일인지 저는 예배 시간마다 온몸이 오싹해지며 무서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치 밤중에 공동묘지에 갔을 때 머리털이 쭈뼛쭈뼛 서고 등골에 찬물을 끼얹은 듯 오싹해지는 것처럼 예배 시간만 되면 그렇게 무서운 느낌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왜 이런 느낌이 들까?’ 하며 너무도 이상할 뿐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기성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
어찌된 일인지 온몸이 오싹해지며
마치 밤중에 공동묘지에 갔을 때처럼
머리털이 쭈뼛쭈뼛 서는 것을 느껴

그러던 어느 날, 원효로 구제단의 주일예배에 참석했을 때였습니다. 그 즈음 박 장로님께서는 성경 이사야 41장을 풀어 주시며 ‘동방의 일인’에 대해서 자주 설교하셨는데, 그날도 동방의 일인에 대해 말씀하신 후 “지금 신학자들이 논하는 것은 신학(神學)이 아니라 인학(人學)”이라고 하셨습니다. 성신을 받지 못한 자들이 논하는 것은 인학일 뿐이라고 하시며 앞으로 3개월만 전도관에 다니면 신학대학 4년을 다닌 것보다 훨씬 차원 높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신학대학에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그만두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저는 ‘더 이상 신학대학에 다닐 필요가 없겠구나.’ 하며 그길로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그때부터 ‘전도관에 다니면서 열심히 말씀을 들어 봐야겠다.’ 하고 마음먹었지만, 오빠들이 제가 학교에 가지 않고 계속 서울에 있는 것을 극구 반대하여 할 수 없이 삼천포 집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때 삼천포에는 전도관이 없었기 때문에 저는 예전에 다녔던 삼천포 감리교회에 나가면서 ‘혹시 여기서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주일학교 부장을 맡아 나름대로 열심히 교회 일에 봉사하면서 전도관에서 받았던 것처럼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6개월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받을 수 없으니 답답하고 클클한 마음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 은혜가 몹시도 그리워서 ‘어떻게 해야 은혜를 받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1957년 어느 날, 마산의 한 감리교회에서 일주일 동안 행사가 열려 저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권사, 속장, 주일학교 부장 등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신앙 토론을 하고 친분을 쌓는 행사였지만 저는 거기서 아무런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행사 마지막 날 답답한 마음을 풀어 보려고 교회 밖을 나와 산책했는데 동양호텔 건물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 순간 박 장로님께서 마산에서 집회를 하셨을 때 동양호텔 주인이 은혜를 받아 박 장로님께서 그 호텔에 유하셨다는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전도관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호텔로 들어간 저는 호텔 주인인 권사님과 마산전도관의 전도사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전도사님은 박 장로님께서 일주일에 한 번씩 마산에 오셔서 예배를 인도해 주신다고 하시며 마침 내일 박 장로님께서 오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반갑고 기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감리교회에 다니고 있다고 했더니, 전도사님이 “기성교회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하신 박 장로님의 말씀을 전해 주며 앞으로 혼자서 예배를 드리더라도 기성교회에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다음 날 저는 사람들이 빽빽하게 앉아 있는 마산전도관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한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박 장로님의 인도로 찬송을 부르며 왜 그리도 눈물이 흐르는지 억제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날 저는 박 장로님께 안수를 받고 축복해 주신 생명물을 받아 왔습니다.

기성교회에 가지 않고 이모와 둘이서만
기도를 드리는데 따뜻하고 온화한
기운이 저를 감싸면서 온 몸이 훈훈해져
그토록 그리워했던 은혜임을 느끼게 돼

집에 돌아온 저는 당시 삼천포 감리교회에 다니시던 이모님을 찾아갔습니다. 이모님은 예전에 하나님의 설교집을 읽고 집회에도 참석하셨는데, 제가 “기성교회에는 구원이 없다.” 하신 말씀을 전해 드렸더니 “그럼 이제부터 너하고 나하고 둘이서만 예배를 드리자.”라고 하셨습니다. 그 주 일요일에 이모님 댁에서 예배를 드리며 저는 ‘죄를 사해 주시고 은혜를 허락하시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그 순간 따뜻하고 온화한 것이 저를 감싸면서 온몸이 훈훈해지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고, 그것이 제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은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감리교회에서 그렇게 애를 써도 은혜를 받을 수 없었던 일과 이전에 신학대학에서 예배드릴 때 온몸에 공포감이 엄습했던 일을 다시금 생각하면서 ‘기성교회에는 은혜가 없고 구원을 얻을 수가 없구나!’ 하며 깨닫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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