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의 상호주의
지난번 평양에서 있었던 6·15 남북공동선언 기념대회에서 남북은 남북한의 공존공영, 동족간의 공조실현, 핵 전쟁 위협의 제거 등을 합의했다고 한다. 발표 대로라면 이제 한반도에서 전쟁의 그림자는 사라지고 남북간의 화해와 평화가 정착된 것처럼 보인다.
5년전 역사적인 6·15 남북공동선언이 이루어졌을 때 사람들은 남북 대치 50년의 냉전구도를 종식시키고 항구적 평화정착을 위한 기초가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그러나 북한이 겉으로는 6·15 남북공동선언을 하고 뒤로는 핵무기 개발에 착수하여 한반도에 엄중한 위기를 조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그러한 평가는 빛이 바래게 되었다. 그 후 남북대화와 이산가족 상봉, 개성공단사업 같은 교류가 진행되었지만 그것은 오직 남한의 경제적 지원을 얻는데 이용되었을 뿐, 남북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하였다.
6·15선언 이후 결과적으로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한국을 미국편이 아닌 제3자적 ‘균형자(均衡者)’로 돌아서게 만들었고, 적지 않은 한국의 경제적 지원을 얻는 실익을 취하였다. “같은 민족끼리 공조하여 미국에 대항하자”는 북한의 ‘민족 공조론’은 특히 6·25전쟁을 모르는 젊은이들의 대북 경계심을 희석(稀釋)시켜 북한보다 미국에 적개심을 가지는 반미감정을 확산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북한은 지난 2월 핵무기 보유를 선언하면서, 북한의 핵무기는 ‘외세’로부터 ‘민족의 존엄’을 지키는 남북한의 자산이라고 선전하기까지 하였다. ‘민족 공조론’은 유사시 북한이 한국을 볼모로 잡을 수 있는 직접효과뿐만 아니라 대북 압박과 제재를 반대하는 한국의 정서 때문에 한미동맹의 균열(龜裂)을 초래하는 간접효과까지 거두고 있다.
문제는 북한의 ‘민족 공조론’이 정작 민족의 장래를 위태롭게 하는 북한의 핵 문제는 덮어둔 채, 경제적 지원만을 한국에 요청하는 이론이 되었다는데 있다. 북한이 모든 남북교류에서 핵 문제를 철저하게 분리시킨 반면, 한국정부는 경제지원은 주고 북핵의 포기는 받아내지 못하는 북한의 ‘일방주의’에 이끌려 다닌 것이다. 그 원인이 같은 민족을 믿는 순진함 때문인지, 체제경쟁은 끝났다는 여유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남북 관계에서는 순진함도 여유도 용납될 수가 없다.
6·15 남북공동선언이 진정 한반도의 역사를 바꿔놓는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 받으려면 그것이 7000만 민족의 안위와 직결되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지렛대가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구체적 전략으로서 북한에 대해 준 것만큼 요구할 것은 요구하는 상호주의(相互主義) 원칙을 지켜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