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허락하신 축복의 날, 축복일
◆ 가장 가치 있는 길을 찾게 해 준, 나의 첫 축복일
‘누가 나에게 가치 있는 일을 줄 수 있을까?’ 1974년 서른아홉 살에 문득 드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때 청주에서 남편과 같이 사업을 했습니다. 학교에 교구(校具)를 납품하는 사업이 잘되고 부족한 것이 없었지만 언제부턴가 아등바등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습니다. 남한테 인정받고 열심히 살아도 돌아서면 허전하고 쓸쓸해지는 허무감이 마음을 괴롭혔습니다. 몸까지 아프고 기운이 없어 병원에 가도 아무 이상이 없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울증 같은데 그때는 우울증이라는 말도 잘 모르던 시절이었습니다. 주변에서 종교를 가지면 마음이 편안해질 거라고 해서 교회를 다닐까 생각해 봤지만 교인들끼리 소란스럽게 어울리는 모습이 별로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산 사는 사촌동생이 와서 전도관에 다닌다 했습니다. 저는 전도관이 나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저한테 가자고 할까 봐 내심 경계했습니다. 그런데 동생은 같이 가자는 것도 아니고 전도관에 가니 기쁘고 좋다고 자랑만 열심이었습니다.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진심인 것 같았고 저는 전도관을 반신반의하면서도 알아보고 싶어졌습니다. 청주에 있는 전도관을 수소문해 찾아가니 전도사님이 성신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저는 성신이 진짜 있나 의심하면서도 말씀이 조리 있고 분명해 몇 번 더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교인들은 친절하게 대해 주며 축복일예배를 드리러 기장신앙촌에 가자 했습니다. 그때 몸이 성치 않아 부산까지 가기 힘들 것 같았지만 간곡하게 권하는 것을 뿌리치기 어려워서 축복일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기장신앙촌 대예배실은 얼마나 넓은지 앞쪽 단상이 까마득해 보였습니다. 단상에서 예배 인도하시는 분이 신앙촌과 전도관을 세우신 박태선 장로님이라 했습니다. 저 멀리 계시는데도 한 말씀 한 말씀이 선명하게 들려왔습니다. 성신을 받으면 마음이 기쁘고 평안해진다 하시기에 내 병든 마음도 평안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배 마치고 일어나 영광을 돌릴 때였습니다. 아주 좋은 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며 저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그동안 감정이 메말랐던 제가 웬일인지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주저앉아 울고 싶은 심정인데 사람들 퇴장하는 소리가 들려 간신히 참고 나왔습니다.
신앙촌에서 나와 기차와 버스, 택시를 갈아타고 밤늦게 집에 왔을 때였습니다. 문득 ‘왜 이리 몸이 가볍지?’ 했습니다. 많이 쇠약해져서 차를 타고 나면 기진맥진했는데 그날은 부산까지 장시간 여행을 다녀왔어도 몸이 가벼웠습니다. 단잠을 자고 다음 날 눈뜨자마자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우울증에 시달리고부터 아침이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었던 저였습니다. 마음도 언제 그렇게 괴로웠나 싶게 편안해졌습니다.
그때부터 일요일마다 청주전도관에 나가면서도 의심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전도관이 이단이니 나쁜 곳이니 하던 말이 떠오르면 마음 한구석이 불안해졌습니다. 그러던 중 축복일이 되어 신앙촌에 갔습니다. 처음으로 안찰 받으려고 길게 줄을 섰을 때 ‘내가 잘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그런데 제 차례가 되자 박 장로님께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의심치 마세요.”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놀랄 새도 없이 두 눈을 안찰하시는데 가만 손을 얹으실 뿐인데도 깊이 후벼 파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안찰 받고 나와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생각을 환히 들여다본 듯 말씀하시니 자연히 경외심을 갖게 되었고, 의심을 버리고 전도관에 다니는 계기가 됐습니다.
◆ 힘과 용기를 주신 축복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85년에 부산 7중앙에서 시무할 때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교회에 페인트칠을 하기 위해 쓰레기통 위에 합판을 놓고 올라가서 작업하다가 잘못하여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바닥에 떨어질 때 팔을 잘못 짚어서 팔이 바깥으로 꺾이며 부러진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아픈지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연산동 제중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어 보니 팔이 부러진 데다 여러 군데 금이 가는 중상이라 6개월 동안 계속 치료하며 경과를 지켜봐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저는 기장신앙촌 축복일예배에 참석하여 하나님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축복을 받기 전에 저는 팔에 했던 깁스를 풀고 팔을 목줄에 걸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다친 팔을 향해 “쉭! 쉭!” 하고 한참 동안 축복해 주셨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 조금씩 팔을 움직여 보니 축 늘어진 채 움직이지 않던 팔이 움직여지며 차츰차츰 힘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병원에서는 6개월 동안 치료를 받아야 된다고 했는데 축복을 받고 불과 며칠 만에 자유자재로 팔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런 이상 없이 잘 지내고 있으니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할 뿐입니다.
그 후 1987년경 축복일에 기장신앙촌에서 농구 시합을 할 때였습니다. 평소 운동에 자신이 없었던 저는 응원만 하고 선수로 뛰어 보지 않았는데, 그날은 잘하지 못하는 사람들까지 전부 팀을 구성하여 저도 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공을 받으면 급한 마음에 골대만 바라보고 던지는 정도였으나 그날은 신기할 만큼 던지는 대로 다 들어갔습니다. 상대편을 이긴 후 기분 좋게 제자리로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 부르신다고 하여 얼른 달려갔습니다. 제 등 번호인 4번을 부르시며 “4번 농구 잘해?” 하고 물으셔서 “잘 못합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리시며 “최고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정말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하나님께서 소심한 저에게 용기를 주시려고 그렇게 경기를 잘하게 해 주시고 칭찬까지 해 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로 저는 무슨 운동이든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어려운 일이 닥쳐와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약한 마음이 들 때도 한번 해 보자는 용기를 내게 되었습니다. 엄지손가락을 올리시며 환하게 웃어 주시던 하나님 모습을 마음에 담아 두고 그렇게 칭찬을 받을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고 싶었습니다.
◆ 축복해 주시는 축복일, 하늘나라의 기쁨이 이런 것일까?
1985년경으로 기억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한창 농구를 장려하셨던 시절이었는데 축복일 전날 학생들이 야외 농구장에서 경기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코코아를 한 컵씩 나눠 주셨고 저와 다른 친구들은 선수들을 응원했습니다.
초저녁에 시작한 경기가 한참 진행되는데 하나님께서도 농구장에 함께 계시며 경기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을 향해 ‘쉭쉭’ 하시며 축복해 주셨습니다. 바로 그 순간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제 가슴속으로 평안한 어떤 줄기가 싹 오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제 마음은 잔잔한 호수와 같이 편안해졌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드는데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속이 너무나 편안하고 기뻐지며 포근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제 온몸을 감싸는 듯했습니다. ‘아! 하늘나라의 기쁨이 이런 것일까? 천국은 이런 기쁨이, 이런 상태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좋고 기쁘고 편안하고 감사해서 계속 눈물이 났습니다. 옆에 있던 친구는 제가 갑자기 우니까 왜 그러냐고 하면서 당황해했지만, 그날의 그 느낌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고 제 가슴에 남아 있었습니다.
나중에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라는 찬송을 부르면서 그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세상의 어떤 기쁨과 평안함도 이렇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하면서, 그 이후로 세상의 어떤 즐거움의 유혹이 있을 때, 그때 그 은혜 받은 느낌을 떠올리면서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후에 어느 분의 신앙체험기에서 저와 아주 비슷한 체험을 하신 것을 보고 놀라며, 더욱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늘의 기쁨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 축복일에 느낀 기쁨, 이제는 제가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 처음 천부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교회에서 주는 선물이 좋아 선물만 받으러 교회에 다니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아이였습니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12월 어느 날, 그날도 친구들과 어김없이 재미삼아 천부교회에 갔고 그날 관장님께서는 신앙촌에서 학생캠프가 열린다며 같이 가보자고 하셨습니다. 부모님이 다른 종교를 가지고 계셨고 평소에도 외박을 싫어하셨기 때문에 ‘당연히 안 보내주시겠지. 여쭤보고 안 되면 말자’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는데 의외로 다녀오라고 쉽게 허락을 해 주셨고 그렇게 처음 신앙촌에 가게 되었습니다.
처음 와 본 신앙촌은 조금 낯설었습니다. 하지만 축복일예배를 드리고 3박 4일 동안 캠프에 참가하면서 언니들의 장기자랑 시간, 합창연습 등 모든 시간이 너무나 즐겁고 기뻤습니다. 특히 신앙촌에 있는 학교, 시온실고에 입학한 언니의 스피치 시간이 저에게는 정말 감동적이고 인상적이었습니다. 스피치를 듣는 동안 ‘나도 저 학교에 꼭 가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신앙촌에 다녀온 후 저에게는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매일 교회에 가는 것이 너무 즐거웠던 것입니다. 꾸준히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 말씀을 하나하나 배워가며 전도 하는 반사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중학교 3년의 시간을 보내고 꼭 가고 싶었던 시온실고에 입학을 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찬송가를 부를 수 있고 새벽예배, 주일예배, 축복일예배를 드릴 수 있는 기쁨, ‘입사생’이란 이름으로 신앙촌에서 사는 매 순간이 감사하고 정말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나태해지는 저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다시 열심히 해 봐야지’라고 마음먹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교역자’라는 더 큰 직분을 주시며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셨습니다.
입사생으로 있을 때 매달 축복일에 오는 아이들을 보며 ‘반사할 때 더 열심히 전도하면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는 학생관장으로서 전도의 사명감을 갖고 처음 천부교회에서 느꼈던 기쁨과 신앙촌에서 받은 큰 사랑을 전할 수 있도록 항상 겸손한 마음과 감사함으로 힘차게 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