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천막집회의 현장을 가다(5) 대구집회

'불의 사자 박태선장로님이 대구에 오신다는데 가봤느냐'
발행일 발행호수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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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1955년 전국에 불길처럼 번졌던 하나님의 천막집회는 6월에 대구집회로 이어졌다. 대구 칠성동 천변 사장 집회(1955.6.9.~6.16.)
 
집회가 열렸던 1955년에는 신앙신보에 기사가 없고 집회가 열리고 1년 뒤에 그 때를 정리하는 기사(1956.5.21.<협회창립1주년>)에서 대구 칠성동 천변 사장 집회라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또 한편 당시 집회를 알리는 영남일보에는 집회 장소에 대하여 경북대앞 사장이라고 광고(1955.6.7.,11.)가 나간다. 사람들의 기억 속엔 때론 수성천에서 집회가 열렸다고도 했다.
 
우선 집회가 열렸던 장소의 정리가 필요했다.그 유명한 『박태선 장로의 이적과 신비 경험』이란 책이 나오게 된 집회. 바로 대구의 6월 집회가 그것인데, 낮기온이 30도 안팎을 오르내린 6월 14일 역사의 현장을 찾았다.
 
 
직선거리로 부산에서 120㎞, 서울에서 300㎞에 있는 대구. 하나님의 집회소식이 여기인들 안났으리요.하나님께서는 부산공설운동장집회(1955. 5. 23.~ 5. 31.)를 성공적으로 마치셨다. 여기서 잠깐 부산일보 기사(1955. 5. 30.)를 인용하여 당시의 분위기를 전한다. “그는 향년 38세, 서울 장안을 휩쓸고 그 높은 명성이 전국적으로 전하여진 바 있거니와 이제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그 막을 열고 있어 화제의 주인공이 되고 있는데 박장로 하면 누구나가 ‘아아 그 기적을 보여준다는 사람말이지’ 할 정도로 되었다. 부산시내에서는 물론이요 천리길을 멀다하지 않고 이곳 부산공설운동장 안에 가설된 커다란 텐트안 기도장소로 운집하고 별의 별 병을 다 가진 사람들과 신도들의 수는 이 기도회가 끝나는 31일을 눈 앞에 두고 더욱 격증되고 있다.
 
29일 새벽 6시 기자가 이곳을 방문하였을 때는 밤을 뜬눈으로 기도와 찬송가로 새웠다는 약 5,000여명으로 추산되는 사람들이 찬송가를 되풀이 하고 있으며 기적을 보여주는 박장로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안수기도를 베풀기에 매우 분주하였다.”기사에서 보면 5월 말인데 하나님은 이제 전국적으로 누구라도 “아아, 그 사람” 할 정도가 되었다고 했다. 이 정도 되면 흔히 ‘삼척동자도 다 안다’라고 한다.
 
`향년38세, 서울장안 휩쓴 높은 명성 전해져
예배를 인도하실 때 입에서 불이 나와 ‘불의 사자’
집회장에는 이슬같은 은혜 내리고 향기가 진동해`
 
그럼 다시 대구 1955년.
홍영의권사(91.기장신앙촌)는 친구인 박연진의 아버님께 “요즘 시내 칠성동 강변에서 대형 천막을 쳐 놓고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님’께서 오셔서 집회를 하신다는데, 특히 그 집회에서는 놀라운 기사와 이적이 일어나 교계의 화제가 되었다는 사실을 혹시 가서 봤느냐?”라는 말을 듣고 찾아간다. 최온순승사(81.기장신앙촌)는 대구선교부 소속 성경학교에서 같이 공부하는 학생이 “칠성동에 박태선 장로님의 부흥집회가 열리는데 꼭 가보세요. 박 장로님께서 예배를 인도하실 때 입에서 불이 쏟아져 나와 불의 사자라 불리며, 집회장에 이슬 같은 은혜가 내리고 아주 좋은 향기가 진동해요.”라고 하는 말을 듣고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나’하는 마음으로 의심하며 가지 않았는데 그 학생의 계속되는 간곡한 권유로 집회장을 찾아가게 된다. 또 2002년에 신앙체험기를 썼던 박복연승사(작고)는 동네 목욕탕에 갔다가 아주머니들에게 “수성천변 모래사장에서 큰 집회가 열리는데 사람들도 많이 모이고 참 은혜스럽다.”는 말을 듣고 집회장을 찾아간다.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도 함께 가서 은혜 받기를 전할만큼 넘치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을 것이다.
 
그 당시 집회가 열렸던 장소를 찾아보았다. 대구교회의 주태조(74)승사는 “우리집에 세들어 살던 김집사라는 이가 그 집회에 다녀와선 그렇게 기뻐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날 보며 가자고 해서 하루 참석했었지요.”라고 했다. 또 역시 집회에 하루 참석했다는 박명월권사(85.대구교회)는 “6·25때 피난 와서 지금 도청교 앞쪽 방천둑 근처에서 하꼬방을 짓고 살았어요. 하루는 이웃이 찾아와 박장로님이 오셔서 집회를 하는데, 가면 은혜도 많이 받고 좋다고 해서 따라갔었어요. 우리가 살던 근처라서 그 때 위치를 잘 기억합니다.”라고 했다. 박명월권사는 도청교 아래서부터 경대교 사이에서 집회가 열렸다고 했다. 그림을 보면 알겠지만 도청교는 대구역에서 경북도청을 향해 곧장 가면 바로 볼 수 있는 곳이고, 당시에 큰 건물이 많지 않던 것을 감안해 볼 때 그곳은 경북대(경대)앞 사장일 수도 있고, 칠성동 천변일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도 하천이 그리 넓지 않은데 당시에는 지금 하천 폭의 1/3정도 밖에 되지 않는 아주 좁은 도랑 같았다고 했다.
 
집회에는 하루밖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하나 주승사는 “강대상을 치실 때 불이 나오는 것을 보았고, 가마니를 깔아논 자리에 누가 사이다를 엎었나 하는 생각이 들게 달디단 냄새가 계속 났는데 그것이 나중에야 향취인걸 알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송혜영기자news-song@theweek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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