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세계사 <15> 세계에 전파된 악의 기원 ··· 홀로코스트의 진범(眞犯)은 누구인가?(下)
다시 쓰는 세계사 <15>나치가 폴란드에 세운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유대인을 노동 착취로 혹사시킨 강제 수용소이자, 1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을 집단 학살한 ‘절멸 수용소’로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 유대인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학살하는 것을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이라고 명명했던 나치는 그 최종 해결이 신속하고 정확하게 완결되는 장치를 고안했는데, 그것이 바로 독가스 치클론 B를 사용한 가스실이었다.
유대인들이 화물 열차에 실려 아우슈비츠에 도착하면 곧바로 옷을 벗고 샤워실로 이동되었다. 유대인을 통솔하는 나치 친위대원들은 “샤워실의 온수 온도가 내려가고 있다.” “샤워 후에 먹을 스프가 식고 있다.”는 말로 샤워실로 가는 행렬을 재촉했으나 유대인들은 샤워실에 입장한 후에야 샤워기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곧이어 불이 꺼지고 샤워실은 암흑 천지로 변했고, 바닥에서부터 치클론B의 독가스가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연기가 솟아오르자마자 유대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가스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위쪽으로 올라가기 위해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쓰러뜨리며 발버둥쳤지만 그 비명과 참상은 오래 가지 못했고 불과 15분 후에는 가스실에 더 이상 살아 남은 자가 없었다. 가스실 문을 열면 시체는 탑 모양으로 쌓여 있었고, 그 아래에는 연약한 어린아이들이 짓밟힌 채 깔려 있었다. <자료1,2,3,4>
나치의 신속한 최종 해결책은 특히 어린이에게 효율적으로 집행됐는데, 일례로 트럭에 태울 때 나치 친위대원들이 멀찍이서 아이들을 트럭 안으로 집어 던지는 행위만으로도 아이들은 쉽게 목숨을 잃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로 학살당한 600만 명의 유대인 중에 150만 명이 어린이였다.
피비린내 나는 학살이 전 유럽을 휩쓸고 있을 때 폴란드의 유대인 랍비 바이스만델(Weissmandl)은 로마 교황청에 도움을 구하며 무고한 어린이들만이라도 구해 달라는 간곡한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의 답변은 ‘이 세상에 무고한 유대인 어린이의 피라는 것은 없다. 모든 유대인의 피는 죄악되다. 당신들은 죽어야 한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 때문에 당신들은 이런 형벌을 받는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Eliezer Berkovits, 『Faith after the Holocaust』, KTAV, 1973., p.16-17.)
어린이든 어른이든 유대민족 전체가 죽어야 한다는 생각은 2,000년 전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순간부터 가톨릭에서 발원한 뿌리 깊은 증오였다. 이 증오는 학살을 정당화할 뿐 아니라, 학살이 곧 예수의 원수를 갚는 신성한 일이라는 가톨릭적인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에 이 일에 동참하는 세력은 가톨릭의 전폭적인 지원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1933년 7월 20일 로마 가톨릭 교황은 히틀러와 ‘제국 종교 협약’을 체결해 전폭적인 정치적 지원과 종교적 지원을 약속했는데, 그로부터 불과 나흘 후인 7월 24일자 영국 <타임즈>에는 히틀러의 의미 있는 발언이 보도되었다. “유대인과의 전투를 통해 나는 예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선언하는 내용이었다. <자료5>
1933년 히틀러 정부가 들어선 후 어떤 나라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을 때 로마 교황청이 처음으로 히틀러 정부의 손을 잡아 준 이 협약은 외교적으로 히틀러와 나치에 정당성과 힘을 부여해 주었고, 히틀러는 협약에 성공하자마자 예수를 위한 일에 돌입했으니 거래의 대가를 충실히 이행한 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예수를 위한 일’에 히틀러와 나치보다 더욱 열광한 집단이 있었는데, 바로 크로아티아라는 나라였다. 크로아티아는 2차 세계대전 중에 세워진 신생 국가이자 철저한 가톨릭 사상으로 무장한 가톨릭 국가였다.
크로아티아의 권력을 휘어잡은 독재자 안테 파벨리치는 1941년 5월 18일 바티칸에서 로마 교황 비오 12세와 면담을 갖게 되었다.(제랄드 포스너, 『교황청의 돈과 권력의 역사』, 밀알서원, 2019., p.116.) 이 면담은 로마 가톨릭이 크로아티아라는 신생 국가를 전 세계 앞에 인정하고 정당화하는 행위였고, 크로아티아는 이 거래의 대가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교황과의 면담이 성사된 바로 그날 유대인을 차별하는 법률을 통과시키고 곧바로 유대인에 대한 피의 숙청에 돌입했다.
독재자 안테 파벨리치는 매일 미사에 참석하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크로아티아를 지배하는 우스타샤라는 이름의 집권당은 그 구성원이 가톨릭 사제와 신도들이었다. 또 로마 가톨릭의 대주교 알로찌제 스테피낙은 우스타샤 군대를 통솔하는 ‘최고 사도 대리자’의 역할을 했는데, 우스타샤의 군대는 유대인 학살의 최전선에 있었다. <자료6>
우스타샤 군대의 장교 중에는 가톨릭 프란치스코회 수도사가 있어서 지도자 역할을 했으며 특히 3명의 수도사는 강제 수용소(야세노바츠 수용소)를 담당하는 부소장으로 일했다. 이 수용소의 소장인 나로스라브 필리포비치는 유대인을 비롯해 4만 명의 무고한 생명을 학살해 ‘야세노바츠의 악마’로 불렸는데 그 또한 가톨릭 프란치스코회 소속의 수도사였다.
크로아티아 거리에는 우스타샤 소속의 가톨릭 사제들이 사제복을 입은 채 장총을 들고 다니는 모습을 예사로 볼 수 있었으며, 여자들의 앞가슴과 남자들의 성기를 자르고, 희생자들의 눈을 모아 섬뜩한 트로피를 만드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학살의 현장에 가톨릭 사제들이 가담하면서 일반 가톨릭 신자들은 그런 참사를 보면서도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지 않게 되었다. 크로아티아의 유명한 가톨릭 사제인 디오니시 유리체브는 신문에 사설을 게재하며 “유대인을 죽이는 것은 더 이상 죄가 아니다.”라고 주장했고(Michael Phayer, 『The Catholic Church and the Holocaust, 1930-1965』, Indiana University Press, 2001., p.34.), 고리카 수도원의 스레치코 피리크 신부는 “당신들이 일(대량 학살)을 마친 후 교회에 오면 내가 고해성사를 주어 죄를 씻어 주겠습니다.”라고 설교했다.(Yugoslavia Poslanstvo. United StatesYugoslavia. Poslanstvo (U.S.), 『The Case of Archbishop Stepinac』, Information Officer, Embassy of the Federal Peoples Republic of Yugoslavia, 1947., p.54.) 이 설교 직후인 1941년 8월 10일 인근의 리브노 지역에서 대량 학살이 일어나 5천 6백 명이 목숨을 잃는 참화가 벌어졌다. <자료7, 8>
당시 브랑코 보쿤이라는 전직 외무성 직원은 크로아티아의 상황을 관찰한 후 이렇게 적었다. “가톨릭 신자들이 유대인을 죽이고 있다. 왜냐하면 유대인 학살이 가톨릭 교황청을 기쁘게 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출처: Branko Bokun, 『Spy in the Vatican, 1941-45』, Praeger Publishers, 1973., p.11.)<자료9>
학살이 가톨릭 교황청을 기쁘게 한다는 확신은 가톨릭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또 찾을 수 있는데, 200년 동안 계속되었던 가톨릭 십자군 전쟁 또한 그 확신 위에서 일어난 대량학살이었다. 십자군은 광신도의 무리였고 이들에게 가톨릭에서 믿는 신이 어떤 일을 기뻐하는지 가르쳐 준 사람은 교황 우르바누스 2세였다. <자료10>
그는 ‘칼을 휘둘러 예수를 기쁘게 할 수 있다. 예수를 위해 싸우는 그리스도의 전사(milites Christi)가 되면 구원 받을 수 있다.’며 십자군에 참전한 모든 사람들에 죄의 사면과 영원한 구원을 약속했고, 이에 열광적으로 응답한 가톨릭 신도들이 유대인 공동체와 이슬람 지역을 파괴하며 “예수를 위하는 일”이라는 이름으로 대량 학살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나 2차 세계대전에서 일어났던 유대인 학살에서도 로마 가톨릭은 ‘예수의 일’을 한 사람들을 마지막까지 보호하고 은닉해 주었다. 크로아티아에서 유대인을 무참히 학살한 독재자 안테 파벨리치는 전쟁이 끝난 후 최우선 지명 수배자로 여러 나라의 추적을 받았지만 로마에서 가톨릭교회가 소유하고 있는 여러 장소를 옮겨 다님으로써 2년 이상 추적을 피할 수 있었다. 그의 거처는 베네딕토 신학원인 성 안셀모의 집과 산타 사비나 성당, 그리고 산 지로라모 신학교였다. <자료11>
2년 후 로마 가톨릭은 더욱 강력하게 안테 파벨리치를 보호하기 위해 교황이 지배하는 바티칸 내부로 그의 거처를 옮겼으며 1947년에 아르헨티나로 안전하게 도피시켰다. 안테 파벨리치가 부에노스 아이레스 항구에 도착하자 프란치스코회 소속의 가톨릭 사제들이 항구에 마중을 나와 그의 도착을 환영했다.(제랄드 포스너, 『교황청의 돈과 권력의 역사』, 밀알서원, 2019., p.183.) <자료12>
로마 가톨릭은 학살자를 도피시킨 것뿐 아니라 전쟁 후에 치러진 전범 재판에서 학살자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가톨릭 사제 6명이 학살 행위로 인해 유죄를 선고받자 교황 비오 12세는 그 판결을 공개적으로 비난했으며, 또한 학살을 주도했던 우스타샤 군대의 통솔자 스테피낙 대주교가 유죄를 선고받자 교황은 감옥에 갇힌 스테피낙을 추기경으로 승격해 주었다. 그 후 199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스테피낙을 성인으로 추대하기 위해 그 첫 단계인 복자(福者)로 추대한 바 있다. 그들의 정신 세계에서 학살은 악을 멸하는 성스러운 행위였던 것을 생각하면 학살자를 성인으로 추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홀로코스트는 박물관에 갇힌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그 참상이 밝혀지고 있는 거대한 범죄이다. 최근 아일랜드에서 밝혀진 9,000명의 어린이들이 학살된 사건에서 한 생존자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우리의 홀로코스트이다. 여기 미혼모 시설에도 홀로코스트가 있었다.” <자료13>
그가 말한 홀로코스트는 바로 로마 가톨릭 교회가 운영한 미혼모 시설에서 9,000여 명의 어린이들이 방치와 학대, 전염병 등으로 학살된 사건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 홀로코스트는 아일랜드 투암 지역의 가톨릭 시설에서 오수 탱크에 버려진 800개의 아기 유골이 확인되면서 정부 차원의 조사가 시작되었고, 3,000페이지에 달하는 조사 보고서로 확인된 사실이다.
현재 아일랜드에서는 학살 당한 어린이들을 위한 장례 행렬이 이어지며 가톨릭에 대한 비난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이 또한 홀로코스트의 진범에게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릴’ 한때의 바람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당신들은 죽어야 한다.”고 선언했던 로마 교황의 분명한 목소리가 그들의 정신을 지배하는 한 홀로코스트의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