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 세계사 <1> 가톨릭이 세운 나라, 세계 정복에 나서다

다시쓰는 세계사 <1> 폭력은 어떻게 세계화 되었는가?
발행일 발행호수 2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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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600년 전인 1419년은 세계사에서 중요한 해였다. 포르투갈이 항해를 위한 기반 시설을 세우고 대항해시대라는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자가 돛을 올린 그들의 항해는 세계사에 지울 수 없는 거대한 폐해를 남겼다. 이번 기획 기사에서는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행 선박을 그린 모습. (사진출처: https://timegeo.ru/velikie-lyudi/vasko-da-gama/)

포르투갈은 12세기 가톨릭 십자군이 세운 나라였다. 초대 군주인 아폰수 1세는 십자군이었고 이슬람 세력과 수백 년 전쟁을 벌인 끝에 그들을 몰아내고 이베리아 반도를 빼앗았다.

영토를 뺏긴 입장에서는 명백한 강도짓이었지만 가톨릭은 이 땅에 가톨릭 신도들이 살았기 때문에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은 것(영토회복운동, Reconquista)이라고 믿었다. 남의 집을 뺏은 날강도가 내가 원래 집 주인이고 정의를 바로 세웠다고 믿는 격이었는데, 교황 알렉산드르 2세는 그들이 정의로운 전쟁을 수행한다며 가톨릭 신의 이름으로 축복해 주었다.

가톨릭에게 있어 신의 명령으로 벌이는 전쟁은 정당한 폭력이었고, 비 가톨릭의 영토를 빼앗는 것은 신의 명령이었다. 이것은 5세기 가톨릭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부터 면면히 내려오는 정신적 뿌리였으며 예수의 대리자인 교황은 성스러운 폭력을 축복하고 부추겼다.

교황 레오 4세(790~855)는 이교도를 퇴치하는 폭력은 천국을 보장 받는 성전(聖戰)이라고 선언했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1020?~1085)는 성전에 합류하라고 서유럽 군주들을 독촉했다. 급기야 교황 우르바누스 2세(1042?~1099)는 가톨릭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되찾아야 한다며 직접 민중 앞에 나서서 십자군 전쟁을 촉발시켰다.

1419년 항해를 위한 기반 시설을 세우고 망망한 바다로 떠난 포르투갈은 십자군의 칼을 세계로 겨누기 시작했다. 가슴에 붉은 십자가를 새기고 무차별 폭력을 휘두르는 십자군의 전통대로 돛에 붉은 십자가를 새겼다.

육지의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빼앗으려고 길을 떠났다면 바다의 십자군은 미지의 가톨릭 왕국을 찾으려고 항해를 떠났다. 이 항해를 시작한 장본인 엔리케 왕자는 그리스도 기사단의 단장이었고, 가톨릭 왕국을 찾아 전설 속의 가톨릭 통치자 ‘프레스터 존’을 만날 것이라는 열망에 들떠 있었다. 동방에 대 영토를 가진 왕이라는 프레스터 존은 수백 년간 구전된 허구에 불과했지만, 그가 통치하는 왕국을 직접 확인하려는 호기심과 기대감은 가톨릭 신도들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포르투갈 선박은 아프리카와 인도의 위치도 모르고 막연히 상상만 하던 당시에 상상의 산물인 프레스터 존을 찾아 위험천만한 바다를 건넜다. 가상현실을 좇아 실제 눈앞에 닥치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항해 기술도 미개하고 지리적인 지식도 부족했으나 그들이 시대를 뛰어넘어 특출난 한 가지가 있다면 가톨릭 특유의 광신이었다.

예컨대 폭풍이 불어오는 밤이면 돛대 끝에 파란색 불꽃이 나타났는데, 이를 보고 선원들은 ‘세인트 엘모의 불’이라고 불렀다. 뼛속까지 가톨릭 신자인 선원들은 뱃사람의 수호성인 엘모(Elmo, 뱃사람의 수호성인 에라스무스(St. Erasmus)가 와전된 이름)가 불꽃으로 인도해 준다며 감격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번개 구름의 영향으로 대기 속에 전기가 방출되는 과정에서 불꽃이 보이는 방전 현상이었다. 과학의 눈으로 보면 별 것 아니지만 광신의 눈으로 보면 망망대해를 인도하는 신의 가호였다. 바다의 십자군은 가톨릭 신이 함께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행위가 신의 뜻이며 어떤 행동을 하든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었다.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1469~1524)는 그리스도 기사단의 일원이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1499년 포르투갈이 염원하던 인도 항해를 성공시켜 국가적 영웅이 되었다. 포르투갈이 인도로 가는 길을 갈망했던 것은 인도산 향신료 때문이었다. 유럽에서 날로 인기가 치솟았던 향신료를 인도에서 독점해 들여온다면 막대한 부를 쌓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따라서 바닷길을 밝힌 후에는 무역을 성공시키는 것이 바스코 다 가마의 사명이 되었다.

당시 인도양은 무역 질서가 정착돼 폭력으로 물자를 갈취하는 일이 없었고 선박들도 무장하지 않았다. 일정한 관세를 지불하면 누구나 무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포르투갈도 정상적인 거래로 향신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스코 다 가마는 평화로운 무역 질서에 참여하지 않았다.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 경로는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출발해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 캘리컷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사진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2D_AGEh7kE0&t=469s

두 번째 항해를 떠난 바스코 다 가마는 교역 중이던 이슬람 배를 향해 무력 공격을 감행했다. 십자군의 배는 20척에 불과했지만 대포를 이용해 비무장인 이슬람 선박 180척을 깨뜨렸다. 비 가톨릭 세력을 몰아내고 그 지역을 빼앗는 것이 가톨릭 신의 뜻이었고, 그 뜻을 따르면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고 엄청난 부를 거머쥘 수 있었다.

우세한 화력으로 승리를 거둔 바스코 다 가마는 800명의 이슬람 포로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신의 도우심으로 얻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독특한 방법을 썼다. 포로의 귀와 코를 잘라 이슬람 지도자에게 보내면서 카레라이스를 해 먹으라고 권유한 것이었다.

이후에도 바스코 다 가마는 계속해서 선박을 침몰시키고 약탈했으며 살아 있는 포로를 과녁으로 써서 석궁을 연습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포로의 귀와 코를 자른 후에 선박과 함께 불태우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십자가의 돛을 높이 세운 선박이 가는 곳마다 약탈과 방화가 일어났고 귀 베이고 코 베인 시신들이 악취를 풍겼다. 잔인한 폭력으로 교역 항구를 점령한 그들은 자신들 외에 누구와도 거래하지 못하게 막으면서 값비싼 향신료를 선박마다 가득 실을 수 있었다.

바스코 다 가마가 향신료를 가지고 포르투갈로 돌아갔을 때 국왕인 마누엘 1세는 크게 기뻐하며 가톨릭 신의 도우심으로 무역을 독점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국왕은 바스코 다 가마의 무사 귀환을 신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제로니무스 수도원을 지었다. 사치스럽기 그지없는 이 수도원은 포르투갈이 독점 무역에서 얻은 이익으로 세워졌으며 바스코 다 가마는 사후에 이 수도원에 묻혔다.

무덤 위에 설치된 그의 조각상은 경건하게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리고 있다. 무덤 옆면에는 배와 십자가가 나란히 조각되어 가톨릭 신의 뜻대로 바닷길을 헤쳐 갔던 그의 인생을 보여 준다.

제로니무스 수도원에 위치한 바스코 다 가마의 무덤. (사진출처:https://timegeo.ru/velikie-lyudi/vasko-da-gama/)

비록 무덤에는 조각되지 않았지만 그가 휘둘렀던 대포와 칼 또한 빠질 수 없는 상징물이다. 평화로운 질서를 무자비하게 날려 버린 대포, 산 사람의 귀와 코를 잘라버린 십자군의 칼을 무덤 한편에 더한다면 어떨까. 그들이 믿는 신이 인류에게 어떤 것을 선사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줄 것이다.

인구 100만 명에 불과하던 작은 나라, 유럽의 변방에 머물렀던 포르투갈이 단기간에 광대한 무역망을 구축한 것은 지금도 역사의 미스터리로 꼽힌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에 이르는 세 대륙의 서로 다른 문명권을 포르투갈은 어떻게 뚫고 들어갈 수 있었을까. 그 핵심 비결은 바로 가공할 폭력이었다.

강력한 대포로 무장한 채 세계의 바다를 휘젓고 다니는 포르투갈 선박은 떠돌아다니는 폭력 그 자체였다. 항해 기술과 화약 개발은 아시아도 발전돼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기술 수준이 아니라 그 기술을 사용하는 정신 자세였다.

비 가톨릭 국가의 땅과 교역 물자, 무고한 생명마저 ‘신의 이름으로’ 정당하게 강탈할 수 있다는 가톨릭의 정신은 가공할 폭력을 불러왔고 그 폭력으로 세계를 압도할 수 있었다. 십자가 돛을 앞세운 가톨릭 신도들이 항해를 통해 전 세계에 수출한 것은 다름 아닌 폭력이었다.

이로 인해 정복당하고 식민지배를 받는 대륙이 생겨났고, 그 거대한 폐해는 역사에 남아 현재까지 인류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음 편에서는 가톨릭이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였던 폭력과 약탈의 역사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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