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종교 탐구 <9> 길가메시 서사시와 성경에 대하여
전 세계 개봉을 앞둔 헐리우드 영화 ‘이터널스’에는 ‘길가메시’라는 이름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 영화는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주인공 10명이 스토리를 이끌어 가는데, 그중에서 길가메시는 맨손으로 괴수를 때려눕히는 전사이자 영웅으로 그려진다. 이는 실존 인물이었던 길가메시가 거대한 체구에 강력한 힘을 가졌던 데서 착안해 영화적인 캐릭터로 만들어 낸 것이다. 특히 길가메시 역에 우리나라 배우가 캐스팅되면서 국내 팬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데, 예고편에서 길가메시가 바빌론의 성문 앞에 버티고 서서 괴수를 물리치는 장면이 공개되자 그가 어떤 활약을 보여 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자료1,2>
역사적으로 길가메시는 서기전 2600년대에 존재한 인물로,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도시 ‘우루크’를 다스렸던 젊고 패기 넘치는 왕이었다. 영화와는 달리 실제 길가메시는 바빌론의 성문 앞에 서 있을 수가 없었는데, 이 성문은 서기전 500년대에 건설된 것으로 길가메시가 죽고 2000년 이상 지난 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길가메시는 비록 바빌론 시대를 살지 못했지만 그의 모험을 담은 ‘길가메시 서사시’는 바빌론 시대에도 계속 살아남아 학생들은 학교에서 이 흥미진진한 영웅담을 배웠으며 필경사들은 점토판에 이 서사시를 기록했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우루크나 바빌론뿐 아니라 이 도시들을 포함하는 메소포타미아 지역 전체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고, 그 생명력은 2000년 이상 이어졌던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길가메시가 바빌론을 무대로 활약하는 영화 장면이 역사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빌론 시대로부터 다시 2500년이 지난 지금, 길가메시가 영화의 주인공이 될 만큼 각광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길가메시를 주인공으로 하는 ‘길가메시 서사시’가 수천 년의 시간을 넘어 현대에 널리 알려진 것은 성경과의 독특한 관계 때문이었다.
이번 기획기사에서는 길가메시 서사시의 전체 내용과 함께 성경과의 관계를 짚어 본다.
『광활한 땅 위에 있는
모든 지혜의 정수(精髓)를 본 자가 있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모든 것을 경험했으므로
모든 것에 능통했던 자가 있었다.』
<길가메시 서사시 中>
(출처: 김산해,『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휴머니스트 출판그룹, 2020., p.63.)
길가메시 서사시는 길가메시라는 인물을 자세히 묘사하면서 시작된다. 그는 모든 왕을 압도하는 체격과 힘을 가진 인물이었으며, 견고한 성과 화려한 신전을 세운 유능한 왕이었다.<자료3> 또 ‘세상 최고의 남자’라고 자부하는 오만한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신들은 오만방자한 길가메시를 견제하기 위해 야수처럼 강인한 청년 엔키두를 창조하게 된다. 두 청년은 막상막하의 대결 끝에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고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으며, 파란만장한 위기를 함께 헤쳐 나가며 산속의 괴수를 처단하고 하늘에서 내려온 황소를 죽여 명성을 떨치게 된다.<자료4,5,6>
그러나 산속의 괴수와 하늘의 황소는 모두 신의 관할 아래 있었고, 그들을 죽인 사건으로 인해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신들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결국 엔키두가 벌을 받아 극심한 고통 끝에 목숨을 잃게 되는데, 죽은 친구를 끌어안고 슬픔에 잠겨 있던 길가메시는 부패가 시작된 엔키두의 코에서 구더기가 기어 나오는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때까지 두려울 것이 없었던 길가메시가 죽음의 공포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자료7>
길가메시는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며 방황하게 되었고, 신에게서 영생을 얻은 인물 ‘우트나피쉬팀’이 머나먼 곳에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길가메시는 그를 찾아 험한 산을 넘고 위험한 바다를 건넌 끝에 결국 우트나피쉬팀을 만나게 된다.
길가메시가 “당신은 나와 똑같아 보이는데 어떻게 신들에게서 영생을 얻게 되었는지 말해 주십시오.”라고 청하자 우트나피쉬팀은 “내가 너에게 숨겨진 사실을 말해 주리라.”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먼저 신이 대홍수로 온 세상을 쓸어 버렸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신이 홍수에 대비해 그에게 배를 만들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집을 허물고 배를 만들어라. (…)
온갖 생물의 씨를 배에 실어라.
네가 만들 배는
그 크기를 잘 재어서 만들어라.
가로와 세로의 길이가 똑같도록 하라. (…)”
거기 있는 모든 것을 배에 실었다. (…)
모든 산 것들의 씨와 그것들을 실었다. (…)
가축, 들짐승 (…)을 태웠다. (…)
육 일 밤낮으로
바람이 일고 홍수와 폭풍이 땅을 휩쓸어 버렸다.
칠 일째 되자, (…)
바다는 잠잠해졌고 폭풍은 가라앉았으며
홍수는 그쳤다. (…)
모든 인간들은 진흙으로 돌아갔다. (…)
배는 니무쉬 산에 머물렀다.
니무쉬 산은 배를 꼭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
일곱째 날이 되자,
나는 비둘기를 꺼내어 내보냈다. (…)』
<길가메시 서사시 中>
(조철수,『수메르 신화』,서해문집,2003.,p.124.~130.)
우트나피쉬팀은 날려 보낸 새가 돌아다니며 먹이를 찾아 먹는 것을 보고 땅이 드러났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방주 밖으로 나가 정성을 다해 신에게 제사를 올렸는데, 그 제사를 보고 흡족해진 신이 우트나피쉬팀을 찾아와 축복하며 영원한 생명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길가메시는 자신도 영생을 얻게 해 달라고 간청했는데, 처음에 냉소적이던 우트나피쉬팀은 결국 길가메시를 측은히 여겨 불로초를 손에 넣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자료8> 길가메시는 그 방법대로 위험한 심연에 몸을 던져 천신만고 끝에 불로초를 손에 넣었지만, 허무하게도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뱀에게 빼앗기고 만다.<자료9> 빈손으로 돌아온 길가메시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마지막에 숨을 거두는 장면으로 서사시는 끝을 맺게 된다.
점토판에 새겨진 길가메시 서사시는 인류가 기록한 최초의 서사시로 불린다. 흥미진진한 모험을 기록한 이 이야기는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알려졌지만, 이후 이곳의 도시들이 쇠락하고 황폐해지면서 길가메시 점토판은 모래 언덕 아래에 묻히게 되었다.
그 후 길가메시 서사시가 다시 세상에 알려진 것은 이것이 인류 최초의 서사시라거나, 매력적인 모험담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성경 때문이었다. 성경의 노아 홍수 이야기와 동일한 대홍수 이야기가 기록되었다는 이유로 길가메시 서사시는 큰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자료10>
메소포타미아 발굴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800년대, 발굴에 나선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은 성경을 신의 계시로 신봉하는 기독교 국가들이었고 이들에게 성경의 이야기가 기록된 점토판은 무엇보다 놀라운 유물이었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영국의 발굴팀이 가져온 2만 5천 점의 점토판 중에 하나였는데, 산더미처럼 쌓인 점토판을 정리하던 연구원은 노아 홍수와 똑같은 홍수 이야기를 보고 흥분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성서 고고학회에서 발표하자 영국뿐 아니라 모든 기독교 국가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872년, 길가메시 서사시가 처음 공개됐을 때 사실 이를 해독한 연구원 조지 스미스(1840~1876)는 ‘길가메시’를 길가메시라고 읽지 못했다. 그때까지 길가메시 점토판이 기록된 악카드어의 발음과 문법 체계가 완벽하게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내용은 파악할 수 있어도 실제 발음으로 읽을 수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조지 스미스가 길가메시 서사시의 전체 점토판을 찾아낸 것도 아니었다. 중간중간 점토판이 없어서 우트나피쉬팀이 대홍수를 설명하는 부분이 군데군데 비어 있었던 것이다.
길가메시 서사시를 발음대로 읽지 못하고 점토판을 전부 찾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불완전한 상태에서도 조지 스미스가 학회에 나가 발표한 것을 보면 길가메시 서사시가 가져다준 흥분을 짐작할 수 있다.<자료11> 2만 5천 개의 점토판 더미 속에서 성경의 이야기를 찾아냈다는 흥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이후 조지 스미스는 한 번 더 세상을 놀라게 했다. 비어 있는 점토판을 찾기 위해 직접 메소포타미아로 향했던 그가 어마어마한 모래 언덕을 파헤쳐 잃어버린 점토판을 결국 찾아냈던 것이다.
처음 길가메시 점토판을 해독했을 때는 우트나피쉬팀이 대홍수에 앞서 곡식과 동물을 방주에 싣는 장면이 빠져 있었는데, 조지 스미스는 이 장면이 기록된 점토판을 찾아내 영국으로 가지고 돌아왔다. 이 장면 또한 성경상의 노아 홍수와 동일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영국을 비롯한 기독교 국가들은 다시금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발굴부터 해독까지 일거수일투족이 공개되었던 길가메시 서사시는 1910년대 번역본이 출간되어 그 내용을 일반인 누구나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서사시는 12개의 점토판과 2000행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장대한 분량이었다. 악카드어 문법 체계와 발음이 완전히 밝혀진 것이 1905년 무렵인 것을 생각하면 그 문법과 발음이 밝혀지자마자 이 장대한 시가 매우 신속하게 해독되고 출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 이후로도 메소포타미아의 발굴은 계속되었다. 점토판 서고가 발견되어 수만 개에 이르는 점토판이 기독교 국가들의 박물관으로 옮겨지는 일 또한 계속되었다. 길가메시 서사시 외에도 대홍수 이야기를 기록한 점토판들도 발굴되었는데, <지우수드라 홍수 이야기>나 <아트라하시스 서사시>도 성경의 노아 홍수와 동일한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었다.
『“내 말을 들어라.
내 가르침에 주의하여라.
우리 손으로 일으킨 홍수가 (…)
휩쓸어 버릴 것이다. (…)”
(약 40행이 부서져 없음.)
거세고 거센 바람, 거친 폭풍이 모두 한곳에 모였다. (…)
일곱 날 일곱 밤 동안
홍수는 이 땅을 휩쓸어 버렸고,
거센 바람으로 큰 배는 높은 물 위에 떠서 뒤흔들렸다.
태양이 떠오르자, 하늘과 땅에 빛이 비쳤다.
지우수드라는 큰 배에 구멍을 뚫었다. (…)
그는 소를 도살하고 양을 잡아 제사를 지냈다.
(이후 40행이 부서져 없음)』
<지우수드라 홍수 이야기 中>
(조철수,『수메르 신화』,서해문집,2003.,p.71.~72.)
『“(…) 내 말을 잘 알아들어라.
집을 허물고 배를 만들어라.
재산을 버리고 생명을 구하라.
네가 만들 배는
가로와 세로가 같게 하여라. (…)
내가 곧 비를 내릴 것이다. (…)”
깨끗한 동물 (…)
살찐 동물 (…)
그는 선택하여 배에 실었다.
하늘을 나는 새들
(…) 가축
들짐승 (…)
그는 (…) 배에 실었다. (…)
그의 가족을 배에 실었다. (…)
홍수가 들이닥쳤다.
그 위력은 사람들에게 전쟁처럼 밀어닥쳤다. (…)
홍수는 황소처럼 으르렁거렸다. (…)
칠 일 밤낮으로
폭우, 폭풍, 홍수가 일어났다.
(이후 58행 부서져 없음)』
<아트라하시스 서사시 中>
(조철수,『수메르 신화』,서해문집,2003.,p.107.~114.)
길가메시 서사시는 노아 홍수와 똑같은 이야기가 기록되었다는 이유로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며 신속하게 출간됐지만 그 후에 발굴된 지우수드라 점토판이나 아트라하시스 점토판은 그런 대우를 받지 못했다. 오히려 노아 홍수와 동일한 이야기가 자세히 기록된 부분은 부서져서 읽을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되었을 뿐이었다. 독일의 신문기자였던 C.W.쎄람에 의하면 길가메시 서사시가 공개된 후로도 대홍수에 관한 방대한 양의 점토판이 발굴되었지만 그중 상당수가 출간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C.W.쎄람, 『몽상과 매혹의 고고학』, 랜덤하우스, 2008., p.244.)<자료12> 그렇다면 이 점토판들은 왜 길가메시 서사시와 다른 대우를 받아야 했을까.
길가메시 서사시가 처음 발굴되었을 때는 그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정보나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를 접한 기독교 국가들은 당연히 길가메시 점토판의 대홍수 이야기가 노아 홍수를 기록한 것이라고 믿었다. 길가메시 서사시가 성경의 이야기를 증명해 주는 기록인 줄 알았기 때문에 그토록 열광하고 주목했던 것이다. 그러나 1900년대 들어 메소포타미아에서 다양한 유물과 점토판이 발굴되고 과학 기술이 발달해 점토판의 제작 연대를 정확히 밝힐 수 있게 되면서 길가메시 점토판이 가지는 의미는 완전히 달라졌다.
과학적으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길가메시 점토판은 성경보다 1700년 먼저 기록된 것이었고, 따라서 성경의 노아 홍수 이야기는 길가메시 서사시의 홍수 이야기를 차용해 쓰여진 것이었다. 성경이 다른 인간의 기록보다 뒤처졌을 뿐 아니라 그 내용을 가져다 썼다는 사실은 성경을 유일한 신의 계시로 믿고 있던 기독교 국가들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성경의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아니라 성경이 누려왔던 헛된 위상을 깨뜨리는 증거였던 것이다.
앞서 소개한 지우수드라 홍수 이야기와 아트라하시스 서사시는 모두 성경보다 먼저 기록된 것이었다. 두 이야기는 각각 서기전 2600년대와 1600년대 점토판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서기전 400년대에 쓰인 성경보다 2200년~1200년 앞선 것이다.
성경보다 앞선 기록이 성경과 똑같은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이제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 은폐의 이유가 되고 있는 것인가. 길가메시에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만천하에 공개했던 손길이 지금은 지우수드라나 아트라하시스, 그리고 또 다른 점토판에 어두운 암막을 드리우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뒤늦은 은닉으로는 대대적으로 공개해 버린 사실을 돌이킬 수 없으니 진실 게임의 승자는 이미 정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메소포타미아 연구의 보고(寶庫) 영국 국립 박물관
영국 국립 박물관(The British Museum)은 영국의 런던 블룸즈베리에 위치해 있는 국립 공공박물관이다. 과거 영국이 제국주의 시대부터 전 세계 모든 대륙에서 수집한 유물들을 소장 및 전시하고 있으며 소장품이 800만여 점에 달한다.
전시관은 이집트·수단, 그리스·로마, 중동, 아시아 전시관을 비롯해 영국과 유럽의 선사시대 및 아프리카·오세아니아·아메리카 전시관까지 모든 대륙을 총망라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중에서 중동 전시관은 33만여 점에 달하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는 유물의 발굴 지역인 이라크를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양이다. 특히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도시 님루드와 니네베의 왕궁 벽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던 부조를 통째로 떼어 와서 전시관의 복도를 장식해 놓았다.
영국 국립 박물관에 처음 중동 전시관이 설치되었을 때는 한 개인의 수집품을 전시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영국의 고고학자인 헨리 레이어드가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굴한 유물을 모두 이 박물관으로 가져오면서 소장품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특히 영국의 발굴팀은 점토판을 보관한 왕립 도서관(아슈르바니팔 도서관)을 발굴했는데, 이는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문명과 생활이 생생히 기록되어 이 지역 연구에 둘도 없이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이 방대한 양의 점토판을 모두 영국으로 반출하면서 영국은 메소포타미아 연구의 보고로서 명성을 차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