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묻다] 비현실의 세계를 만들어 낸 것은 누구인가?

“인공지능을 절제된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우리를 비현실적인 세계에 빠뜨려 덧없고, 겉모습뿐이고, 기만적인 것들이 진정한 가치를 대신하게 될 수도 있다.” 교황 레오 14세가 지난 7월 브라질 기독교 축제에 보낸 영상 편지의 내용이다. 그는 취임 이후 AI가 인간을 지배하고 현실 인식을 훼손할 수 있다며 거듭 경고해 왔다. 혁신적인 기술로 인간의 지식과 정보 접근성을 확장하고 있는 AI를 교황은 왜 이토록 경계하는 것일까. 올해 1월, 초기 기독교 역사를 연구해 온 성서비평 연구자 줄리언 도일은 AI를 활용해 성경의 부활 서술과 역사 기록을 대조한 끝에 ‘예수는 십자가에서 부활하지 않았다’는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이 결과가 주목받은 이유는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주창한 믿음 신학의 출발점도 예수의 부활에 있으며, 고린도전서 15장 17절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지 못했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다”는 구절은 예수의 부활이 기독교 구원론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뒷받침한다. 그런데 AI가 부활의 진위를 정면으로 문제 삼은 것이다. 물론 AI가 최초로 부활의 진위를 밝혀낸 것은 아니다. 과거에도 많은 학자들이 예수가 부활하는 장면을 기록한 동시대의 객관적인 1차 사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심지어 예수를 처형한 것으로 전해지는 빌라도의 동시대 공식 문서 가운데서도 예수의 재판과 처형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을 계속해서 지적해왔다. 달라진 것은 과거 일부 연구자와 전문가에게 집중돼 있던 사료와 비판적 논의에 대중이 훨씬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누구나 방대한 지식과 데이터를 토대로 질문하고 비교할 수 있게 되면서, 오랫동안 ‘믿음’의 영역에 머물렀던 부활의 실증적 근거 역시 검증의 대상이 된 것이다. 결국 역사가 증명하는 것은 사람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었다는 사실이지, 부활 자체가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부활을 믿으라고 끊임없이 요구하며 의문을 품는 행위 자체를 죄악시해왔다. 수천 년간 반복된 종교적 주입은 부활에 대한 합리적 의심마저 터부시하게 만들었다. 진실을 의심하는 순간 자신의 신앙과 종교적 정체성까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독교를 지탱해 온 ‘맹목적 믿음’의 사회적·심리적 위력이다. 여기서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simulacre)’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시뮬라크르는 단순한 가짜나 복제품이 아니다. 일반적인 복제품에는 그것이 모방하는 원본이 존재하지만, 시뮬라크르는 반복된 이미지와 기호가 원본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실재의 자리를 차지하는 현상이다. 허상이 실재를 모방하는 것을 넘어 실재를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신조차 시뮬라크르였을 뿐이다”라고 말하며, 이어 “이것이 바로 예수회의 방식이었다. 그들은 신의 사실상 소멸과 세속적이고 극적인 방식의 의식 조작 위에 자신들의 전략을 세웠다”고 덧붙였다. 신 자체가 아니라 신을 나타내는 상징과 의례가 오히려 실재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 종교적 구조에 강력한 문제의식을 제기한 것이다. 예수의 부활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원래라면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이 먼저 증명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신앙과 교리가 세워져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 순서가 뒤집혀 있다. 부활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신학, 부활을 기념하는 의례와 행사, 거대한 십자가들이 ‘예수가 부활했다’는 인식을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1988년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에서 중세의 위조품으로 판정된 뒤에도 계속해서 신앙적 의미를 부여받고 있는 토리노 수의는 기독교 시뮬라크르의 전형이다. 이처럼 오랫동안 믿음의 영역에 놓여 있던 종교적 주장도 이제는 더 이상 검증과 무관한 영역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 교황은 AI가 인간을 비현실적인 세계에 빠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오히려 AI는 방대한 데이터와 분석 능력으로 진실 바깥에 있던 종교적 주장들을 다시 검증의 영역으로 끌어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이제 발전된 과학 기술을 통해 수천 년 동안 기독교가 진리라고 가르쳐온 것들에 다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렇다면 종교 역시 자신들이 구축해 온 세계를 돌아봐야 할 것이다. 신의 실재를 입증하지 못하면서도 그 이름으로 행사해 온 권위는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수천 년간 인류를 비현실의 세계에 가둔 채, 덧없고 겉모습뿐이며 기만적인 것들을 진리로 믿게 만든 것은 과연 누구인가.

시온춘추

[진리를 묻다] 믿음의 종교, 이제 와서 행함을 말하는가

믿음은 예나 지금이나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특히 기독교는 바울의 믿음 신학,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 위에 세워졌으며, 오늘날까지도 믿음을 구원의 핵심 조건으로 삼고 있다.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행함을 강조하는 성경 ‘야고보서’를 가리켜 “지푸라기 서신(An epistle of straw)” 이라 불렀다는 사실은 기독교가 ‘행함’보다 ‘믿음’을 우위에 두어온 역사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2025년 10월, 교황 레오 14세는 자신의 첫 번째 권고문에서 야고보서를 인용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 누군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행함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도 행함이 없으면 그 자체로 죽은 것입니다.” 교황의 일침은 신자들의 나태를 질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기독교가 수천 년간 가르쳐온 기존의 구원관과 모순되는 발언이다. 행함이 구원에 그토록 중요하다면 바울은 왜 행위보다 믿음을 앞세웠는가. 그리고 기독교는 왜 2천 년 가까이 믿음을 구원의 핵심으로 가르쳐왔는가. 질문은 결국 하나의 근본적인 의문으로 귀결된다. 초월적 존재를 입증하지 못한 종교가 그 증명의 빈자리를 ‘믿음’으로 메워 온 것은 아니었는가. 믿음은 증명되지 않은 대상을 유지하는 데 매우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별도의 검증 없이도 사람들의 인식에 실제처럼 각인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 역시 예수의 부활을 모든 사람이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 증명의 문제라기보다 믿음의 문제로 전환했고, 이러한 구조 속에서 그들에게 초월적 실재는 검증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으로 고착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신비와 경외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졌던 현상들이 이제는 역사적 검증과 과학적 입증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람들이 더 이상 ‘믿으라’는 말에 만족하지 않고 증거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문제는 개별적 기적 하나의 진위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 부활의 증거라던 토리노 수의부터 메주고리예의 성모 발현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주장해 온 초월적 실재의 허구성이 드러나면서, 믿음을 요구해 온 종교의 권위와 정당성 자체가 의심받게 되었다. 믿음의 대상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믿음을 동력으로 존립해 온 종교 역시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종교가 ‘행함’을 꺼내 든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믿음’이 종교적 대상과 교리에 대한 신뢰를 요구하는 개념이라면, ‘행함’은 신자 개개인의 노력과 실천의 영역에 속한다. 따라서 구원의 문제를 믿음에서 행함으로 옮기는 순간, 그 책임의 무게 역시 종교에서 개인에게로 이동하게 된다. 영적으로 메마르고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가 초월적 존재의 부재나 교단의 부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충분히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논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결국 종교가 스스로 입증해야 할 초월적 권능과 그 부재로 인한 실패의 책임을 신도들에게 떠넘겨 비난의 화살을 피하려는 교묘한 책임 전가로밖에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와서 행함을 강조한다고 해서 종교가 직면한 본질적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구원으로 향하는 행위가 되려면, 구원으로 이끌어줄 초월적 존재의 입증이 먼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실재를 보여주지 못해 ‘믿음’이라는 언어로 연명해 온 종교가 무슨 수로 행함의 동력을 제공한단 말인가. 더구나 수천 년간 믿음에 잠식되어 온 사람들에게 갑자기 행할 것을 요구한다고 해서 그들의 마비된 실천 감각이 하루아침에 되살아날 리도 만무하다. 결국 종교가 뒤늦게 꺼내든 ‘행함’은 쇄신이 아니다. 이는 그들이 줄 수 있는 구원이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음을 자백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에게서 ‘행함’을 빼앗고 ‘믿음’만을 강요했던 것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한, 종교는 인간의 도덕적 자율성과 실천 의지를 마비시킴으로써 구원의 가능성마저 철저히 가로막아 온 세력이라는 결론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독자의 편지

종교의 진정한 역할

계속되는 성직자 성범죄와 비리 종교의 역할을 다시 한번 생각해 요즘 신앙신보에 계속해서 실리고 있는 기획기사 ‘오를란디 사건’과 ‘프레나 신부 사건’을 보면서 가톨릭 성직자들의 성범죄와 각종 비리를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맑힌다는 종교가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많은 범죄를 일으켜 세상을 혼탁하게 하고 있습니다. 기획기사를 통해 종교의 진정한 가치와 역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박철규 관장 / 광양교회

시온논단

신앙신보 창간 70년을 맞이하며

2025년 2월 7일, 신앙신보가 진실의 전파자로서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지 70년을 맞이했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의 말씀과 체험담, 그리고 교단의 소식을 전하는 데 집중해 온 신앙신보는 앞으로도 더 많은 이들에게 참된 진리를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특히, 신앙신보를 통해 참된 길을 찾고 천부교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보람과 책임감을 더욱 크게 느끼고 있습니다. 천부교 초창기에는 많은 기성교회 목회자들이 하나님께 직접 안찰을 받고 은혜를 체험했으나, 이후에는 터무니없는 이유를 들어 천부교를 중상모략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또한, 기성 교단과 일부 언론은 천부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조장하며 사실과 다른 내용을 퍼뜨려 왔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시간이 지나며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의 역사와 신앙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한때 박수를 치며 예배드리는 천부교의 예배 방식을 비난하던 기성교회도 지금은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최고로 가치있는 생명물에 대해서 불신과 비난을 이어왔지만, 신앙촌의 생명물은 여전히 썩을 것을 썩지 않게 하며, 시신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권능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신앙신보는 앞으로도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를 널리 알리는 사명을 다하며 진리를 전하는 역할을 충실히 이어 나가겠습니다. 그동안 끊임없는 사랑으로 신앙신보를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참된 신앙의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편집자 주

[진리를 묻다] 신이 부여했다는 권위, 무엇으로 증명되는가?

최근 아일랜드의 한 고위 성직자가 사제들의 자살 문제가 심각하다며, 이를 교회의 최우선 과제로 다루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사제들이 목회적 부담, 고독함, 우울과 불안 등 정신적 문제를 겪고 있다며 “사제들은 초인적인 존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그들을 “보살핌이 필요한 인간”으로 보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물론 인간이라면 누구나 절망과 우울을 겪을 수 있다. 문제는 사제의 인간적 연약함이 아니라, 가톨릭교회가 수천 […]

[진리를 묻다 ]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신의 뜻, 진리라 할 수 있는가

종교는 오랫동안 자신들의 가르침이 ‘신의 뜻’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에 사람들은 그들이 제시하는 것이 시대를 초월한 절대적 진리라 믿었고, 그 믿음이 오랫동안 종교의 권위를 떠받쳐왔다. 그런데 만약 신의 이름으로 내려진 판단이 잘못된 것으로 밝혀진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최근 교황 레오 14세는 과거 가톨릭교회가 노예제를 허용하고 정당화했던 사실을 인정하며 사과의 뜻을 밝혔다. 노예제를 허용하는 교황 칙서가 발표된 […]

[진리를 묻다] 죄를 말하지 않는 종교, 무엇을 구원하는가?

최근 미국을 겨냥한 교황 레오 14세의 발언이 도마 위에 올랐다. 그는 “미국이 이주민을 쓰레기 취급한다”, “트럼프가 전혀 두렵지 않다”, “한 줌의 폭군이 세상을 짓밟는다”는 표현까지 사용하며 미국 행정부를 정면 비판했다. 미국 측이 불법 이주민 범죄 억제와 이란 핵무기 저지를 위한 불가피한 정책이라고 반박했음에도, 교황은 한층 더 과격한 어조로 맞서고 있다. 이 때문에 교황이 종교 지도자의 […]

[진리를 묻다] 종교는 인간이 만든 심리적 장치인가?

사람들은 왜 종교를 믿는가. 『2023년 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에 따르면, 가톨릭·개신교·불교를 막론하고 종교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가장 큰 이유를 묻는 설문에 ‘구원’ 보다는 ‘마음의 평안’이라는 응답이 압도적이었다. 이 통계는 초월적 진리나 사후세계보다, 현재의 불안을 완화하고 심리적 안정을 확보하는 기능이 종교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종교가 오랫동안 주장해 온 것은 신의 실재, 기적, 구원이었지만, 실제로 사람들에게 […]

[진리를 묻다] 허상이 실체를 집어삼키다

‘신비’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현대 과학으로도 밝혀내지 못한 우주의 기원이나, 상식을 뛰어넘는 놀라운 기적 앞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신비를 떠올린다. 이처럼 신비란 인간의 지혜나 힘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 말 그대로 불가해(不可解)한 영역을 가리킨다. ‘신비(神祕)’라는 글자에 ‘신의 비밀’이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만 봐도, 신비가 초월의 영역을 가리킨다는 점은 분명해진다. 그런데 최근 교황 레오 14세가 ‘신비’를 […]

[진리를 묻다] 그들이 말하는 믿음과 영성은 기만인가, 사기인가?

진리를 묻다 - 영성이란 무엇인가? <3>

오래전부터 인간은 두려움과 고통, 그리고 죽음이라는 근원적 한계 앞에서 초월적 존재를 찾기 시작했다. 그 간절한 갈망에 응답이라도 하듯 종교는 신의 존재를 말하며 구원을 약속했고, 수천 년 동안 기적과 신비, 초월적 신의 개입을 주장하며 인간 사회 위에 군림해 왔다. 그러나 근대 이후 인간의 지식이 발전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자연현상과 질병, 인간의 심리와 사회 구조까지 […]

[진리를 묻다] 신의 작동을 포기한 집단을 종교라 부를 수 있는가?

진리를 묻다 - 영성이란 무엇인가? <2>

사람들이 종교를 떠나고 있다는 통계는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새삼스러운 것은 그 속도와 성격이다. 불과 수십 년 사이, 종교 없음은 주변적 선택에서 사회적 다수의 위치로 이동했다. 미국 코넬대학교 공동연구진은 최근의 종교 이탈이 단순한 세속주의의 확산이 아닌 신앙이라는 틀 자체와의 결별 선언에 가깝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 사원, 회당 안에서 신을 찾지 않고 […]

[진리를 묻다] 영성은 신의 임재(臨在)를 뜻하는가? 아니면 신의 부재(不在)를 견디기 위해 고안된 언어인가?

진리를 묻다 - 영성이란 무엇인가? <1>

오늘날 종교 담론에서 가장 자주 호출되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영성(spirituality)’이다. 매년 영성과 관련된 새로운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종교 지도자들은 종파를 가리지 않고 하나같이 영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자신의 영성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비롯되었다며, 영성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다. 도대체 이들이 말하는 영성은 무엇일까? 영성(靈性, spirituality)은 그 어원에 영혼(靈, spirit)을 뜻하는 단어가 포함되어 […]

AI시대의 국가전략

AI(인공지능)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두뇌’를 의미하는데, 이것이 로봇과 결합해 인간을 대신할 존재가 될 날이 곧 올 것이다. 과거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인간과 똑같은 로봇이 현실화하려면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지만,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 최근의 과학기술 발전으로 속속 증명되고 있다. 18세기 이후 인류 역사에서 선진국으로 부상된 국가들은 각 산업혁명의 시기를 선도해 왔다. […]

미국의 보호무역과 한국의 대응

미국이 자국의 자동차 산업 보호를 위해 한국 자동차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면 미국과 한국, 그리고 세계 경제에 보탬이 될까? 중국 견제 등의 정치적 이유는 제외하고 경제적 측면만 살펴보자. 미국이 한국의 자동차 수입을 제한하는 조치에는 관세(tariff)와 쿼터(quota), 자발적 쿼터(VER:Voluntary Export Restraints)가 있다. VER는 한국이 스스로 수출량을 제한하는 조치다. 물론 세 경우 모두 교역량은 줄고 미국 내 자동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