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묻다] 죄를 말하지 않는 종교, 무엇을 구원하는가?
최근 미국을 겨냥한 교황 레오 14세의 발언이 도마 위에 올랐다. 그는 “미국이 이주민을 쓰레기 취급한다”, “트럼프가 전혀 두렵지 않다”, “한 줌의 폭군이 세상을 짓밟는다”는 표현까지 사용하며 미국 행정부를 정면 비판했다. 미국 측이 불법 이주민 범죄 억제와 이란 핵무기 저지를 위한 불가피한 정책이라고 반박했음에도, 교황은 한층 더 과격한 어조로 맞서고 있다. 이 때문에 교황이 종교 지도자의 선을 넘어 정치에 과도하게 개입하고 있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그런데 국제 정치에는 날을 세우던 교황의 언어가 갑자기 흐려지는 때가 있다. 바로 ‘죄’의 문제 앞에 섰을 때다. 지난 4월 교황의 순방지였던 카메룬 바멘다 성당에서의 일화는 그의 모순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날 성당에는 카메룬 전통 부족의 추장이 참석해 교황에게 “가톨릭이 일부다처제를 수용해 줄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그러자 참석한 신자들은 즉각 야유로 대응하며 거부 의사를 드러냈다. 가톨릭교리서 2387항에는 일부다처제가 도덕률에 어긋나는 금기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긴장감이 고조되고 교리적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하는 상황에서 신자들의 기대와 달리 교황은 침묵으로 답변했다.
동성애 문제에서도 비슷한 논란이 이어졌다. 가톨릭은 동성애를 죄악으로 치부하며, 가톨릭교리서 2357항은 ‘동성 간 성행위는 자연법에 어긋나며, 어떤 경우에도 승인될 수 없다’고 규정한다. 그럼에도 교황은 아프리카 순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귀국 비행기 안에서 “동성 결합에 대한 공식적 축복은 인정하지 않지만, 가톨릭에서는 모두가 환영받는다”는 애매한 답변을 내놓았다. 나아가 “성(性)적인 문제가 교회의 중심에 놓여서는 안 된다”고 덧붙이며 논란의 핵심을 비껴갔다.
종교가 죄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는 단순히 도덕적 기준이 약해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종교가 제시해야 할 구원의 방향감각 자체가 무너졌다는 뜻이다. 본래 종교에서 죄란 단순한 실수나 사회 규범 위반이 아닌 인간의 영혼을 타락시켜 결국 신과 단절시키는 영적인 문제다. 그렇기에 종교는 죄를 가장 먼저 분별해야 했고, 가장 엄격하게 경고해야 했다. 종교 지도자라면 죄의 기준 앞에서 누구보다 분명한 언어로 말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런데 오늘날 교황의 태도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정치적 이슈에는 직설적인 언어를 쏟아내면서도, 정작 죄의 문제 앞에서는 판단을 유보하거나 명확한 답변을 피한다. 오랫동안 죄라고 규정되었던 원칙조차 교황의 모호한 행동으로 혼란에 빠지고 있다. 그러나 종교가 인간의 욕망과 시대적 정서를 거스르지 않은 채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언어만을 반복하는 것은 영적 포퓰리즘이다. 의사가 암 환자에게 “당신은 괜찮다”고 말하며 진단을 회피하는 것이 친절이 아니라 직무 유기인 것처럼, 종교가 죄를 죄라 말하지 않은 채 환영과 포용만 반복하는 것은 인간의 영혼이 죄에 잠식되도록 방치하는 것이다.
시대의 정서와 욕망에 순응하는 종교는 인간을 변화시키는 힘을 잃고 인간을 안심시켜 오히려 더 큰 해악을 가져온다. 오늘날 가톨릭교회가 전 세계적으로 사제들의 성범죄 문제에 직면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수만 명의 사제들이 성범죄를 저지르고도 실질적 처벌 없이 사목 현장으로 복귀하거나 활동을 이어갔고, 그 결과 동일한 범죄가 교회 안에서 구조적으로 반복되어 왔다는 사실까지 드러났다. 이는 죄에 대한 감각 자체가 조직 내부에 존재하지 않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죄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영혼의 파멸로 이끌면서도, 정작 스스로는 구원을 향해간다고 확신하게 만드는 상태, 바로 그것이 종교가 만들어낸 가장 치명적인 기만이 아닐까? 그렇다면 죄를 말하지 않는 종교는 무엇을 구원한다는 것인가.
다음 기사가 없습니다.
[진리를 묻다] 종교는 인간이 만든 심리적 장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