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하나님의 해산의 수고는 인간이 측량할 수 없어
하나님의 해산의 수고는 인간이 측량할 수 없어1967년 하나님의 전국 순회집회는 광주 집회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를 누비시면서 이때까지 들어보지 못하였던 구원의 말씀을 쏟아내시고 예배를 마친 후에는 쉴 틈도 없이 수많은 사람에게 안찰로 은혜를 부어주시는 고된 일정이었다.
동행한 수행기자의 생생한 현장 취재를 따라 다시 한번 1967년 하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연재했던 ‘전국 순회전도 집회를 따라’ 기획기사는 이번 주로 그 대미를 장식하게 되었다.
당시의 수행기자는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의 은혜를 대항하는 기성교회 세력의 악랄한 반대와 모략과 그러나 끝내 하나님의 은혜의 철장 앞에 꺾어지는 악의 세력, 그리고 땀을 비오듯 흘리시며 한 생명이라도 더 건지시려고 애쓰시는 하나님의 초인적인 노고를 기록하고 있다. 고속도로도 없고 급행다운 급행열차도 없었던 당시의 열악한 조건 속에서 전국을 누비시며 대항해 오는 세력을 꺾으시고 은혜를 부어주신 하나님의 고생은 인간으로서는 다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수행기자는 쓰고 있다. 기자는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의 해산의 수고가 어떠한가는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것”이라며 마지막 수행기를 적었다.
“육신을 입으신 고로 하나님의 피로함이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한번 집회에 가는 길이란 가깝지가 않다. 보통 군산, 이리, 목포, 여수 등지는 왕복 천 수백리의 자동차길-쉬지 않고 달려 열다섯 시간 이상씩이다. 그것도 아스팔트도 아닌 돌짝길, 높은 산과 가파른 골짜기… 하나님께서는 오직 한 생명이라도 더 건지시려는 뜨거운 심정을 품고 달려간다.
부산집회는 이틀을 계속하여 항공편으로 네번이나 왕복하셨다. 덕소 새벽제단을 비울 수 없는 연고였다.”
부산에는 1월 23일에 이어 2차로 3월 6일과 7일 이틀 연속 집회를 하시게 된다. 이때 비행기로 덕소신앙촌과 부산을 오가시며 집회를 열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이다.
당시 부산집회에 관하여 수행기 8편에서는 “약 한 달 전에 하나님께서 한 번 집회를 간단히 가졌는데도 부산시의 기성교계가 들럭이며 교인들이 크게 동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십년 믿어서 죄는 다 해결된 줄 알았는데 죄가 그대로 드러나며 또한 씻어지는 것을 그들은 똑똑히 본 것이었다. 구원의 길을 찾아야겠는데 어찌할꼬 하며 우왕좌왕하는 것이었다.
무슨 제직이라 중직이라 하며 그 줄에 매어 못 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엄한 말씀이 있으셨다. ‘기성교인은 상대 안 하려하였는데 그 중에도 구원을 위해 애 쓰는 사람을 건지려고 특별히 경고하는 바이니 어서 속히 돌아오라.’”
광주에서의 집회에 대해서는 몇 차례 기록이 있으나 목포나 군산, 이리, 여수에서의 특별한 수행기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당시 그곳에도 가셔서 은혜를 베푸셨는데 그 오가시는 길이 무척 고단한 여정이었던 듯하다.
“목포, 여수 집회에는 새벽부터 출발하여 광주공항 도착, 다시 자동차편으로 두 시간 반에 목포 도착, 설교말씀 네 시간에 계속하여 세 시간 안찰하시니 밤이었다. 이어 밤길을 달려 광주 도착, 일박 후 새벽부터 너댓시간 달려 여수 도착, 일곱시간 계속 설교와 안찰, 곧 출발하여 밤새도록 쉬지 않고 달려 서울 도착하니 저녁 일곱시부터 이튿날 아침 열시였다. 서울에는 다시 열한시부터 영등포 집회가 기다리고 있다.…”
읽어 나가기만 해도 숨이 차다. 광주에서 목포까지 두 시간 걸린다는 길도 이제는 한 시간으로 단축되었고, 장장 15시간을 달려야 했던 여수에서 서울까지의 여정도 지금은 5시간 30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장소를 이동하시는 데만도 이렇게 많은 시간이 소요되니 당신의 고단함은 뒤로 하고 오직 은혜를 부어주시고자 달려가셨던 것이다.
목포집회에 수행했던 당시 수행기자는 유달산 자락 앞에 있던 교회 모습과 당시 안찰하시던 하나님의 모습을 똑똑히 떠 올렸다. “유난히 처녀들 중에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방언은 악신을 받은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시고 음란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방언의 신이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라고 당시를 기억했다.
“집회마다 네 시간 설교도 보통 강연이 아닌 영적 결전장이다. 전도관을 이단으로 알고 독초를 먹은 기성교인들이 수천명 모여 독 오른 눈으로 원수시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영을 까고 부수자니 하나님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외치고 그 음성은 우레소리 같이 높아진다.
설교를 마치시면 와이셔츠, 양복은 땀으로 젖고 넥타이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진다. 곧이어 세 시간 안찰… 사 오백명이 새생명의 부음을 받는다. 그러나 그들의 온갖 흉악한 죄악은 하나님을 통하여 씻어져야 하는 것이니 그 고통은 인간으로서는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얼굴 모습이 창백하게 변하고 굵은 물방울같이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을 볼 수 있을 뿐.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누르고 안타깝게 하는 깊은 근심이 또 많으니 곧 많은 (소사, 덕소신앙촌) 식구를 이끌고 나가는데 그들의 영과 육을 위하는 일이다. 밤늦게 귀가해서 다시 온밤을 꼬박 뜬눈으로 새워 축복하시는 밤이 비일비재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몸을 찢어 생명을 다 주어도 양떼들이 꿋꿋이 서서 달리면 기뻐하고 더욱 기뻐하리라 증거하시는 것이었다.”
1967년 전국의 순회집회를 수행하며 적은 수행기는 끝이 나지만 하나님의 집회는 계속 되었다. 1967년 당시 신앙신보를 보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전국 각지의 집회 소식이 계속 보도되고 있다.
1967년 5월 1일자 신앙신보에는 전주에서의 3차 집회 소식과 집회 광경 사진이 소개되었고, 4월 18일에는 서울 갈현동제단에서 집회를 가졌다고 전한다.
5월 1일에는 동두천 제단에서 집회를 하시고 5월 7일 2중앙 개관집회를 인도하신다. 이날 이후 하나님께서는 주일이면 각 제단을 순회하시며 예배를 인도하시게 되는데 당시의 보도를 보면 소사 오만제단에서 10시 30분, 마포 이만제단 12시, 2중앙 1시 30분, 덕소는 4시에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는 주일 예배를 드리게 된다.
6월 15일 부산집회, 17일 양평전도관 전도 집회, 20일 광주집회와 체육대회, 22일 대구집회, 23일 강화전도관 집회, 7월 6일 의정부전도관 개관집회, 10일 인천집회, 14일에는 경기도 광주에서 광주 오포 농민학교와 광주 전도관 시온중학교가 통합하는 광주중학 낙성식과 함께 광주전도관 전도집회가 열렸다. 다음날인 15일에는 충북 영동의 영동전도관에서 집회를 하셨다.
8월 6일에는 이만제단에서 산하 20여개 제단이 분리되어 숭인동에 3중앙이 개관된다. 그리고 주일예배 광고가 신문에 실리게 된다. 이만제단의 발전적 분할로 이만제단(1중앙) 12시, 2중앙 2시, 3중앙 1시에 주일예배를 드린다고 안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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