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광주집회

프로펠라 소리에 귀가 먹먹한 DC-3 구형 모델로 광주에
발행일 발행호수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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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1967년 1월 당시 부흥협회에서는 하나님의 전국 순회 일정을 발표한다.
당시 본지에서는 기자 한 사람을 특파하여 하나님의 집회를 수행 취재했다.
신앙신보에 연재된 기자의 수행기를 중심으로 당시 하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기로 한다.
그에 앞서 하나님께서는 1966년 12월 13일 광주에서 집회를 하시게 되어 비행기로 광주를 찾으셨다.
다행히 광주공항은 1966년 7월에 준공을 보아 하나님의 비행기 여정이 가능했다.
광주에서는 네 차례의 전도집회를 가지셨다.

1967년 전국 순회에 앞서 시작한 1966년 12월의 광주집회. 하나님께서는 김포비행장에서 광주행 비행기를 이용하셨는데 당시에는 제트기가 없고 프로펠라 비행기뿐이었다. 수행기자에 의하면 광주행은 1일 1회 뿐이었는데 그것도 제 시간에 뜨는 것이 아니라 날씨에 따라 시간이 들쑥날쑥 해 하나님께서는 허름한 공항 청사에서 기다리실 때가 많았다. DC-3 형 프로펠라기는 서 있을 때는 앞머리가 번쩍 들린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비행기가 뜨면 프로펠라 소리가 얼마나 큰 지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비행기가 광주비행장에 내리니 광주교회 장시춘 관장을 비롯해 교역자들이 하나님을 영접했다. 광주교회로 가는 택시에 동승한 장 관장은 하나님의 집회를 알리는 포스터가 나붙자 광주에는 일대 ‘난리’가 났다고 말씀을 드렸다.

“박장로가 온다하니, 기성교인들이 하는 말, ‘아니 박장로는 죽었다더니 대리인이 오는거냐?’ 하더라는 것이었다. 또한 집회를 한다고 벽보를 붙여놓았더니 하룻밤새 다 뜯어버리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별안간 각 교회에서는 부흥회를 한다하며 교인들이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야단이라는 것이다.”

광주교회에 도착하니 단상 바로 아래에서부터 현관까지 송곳 하나 꽂을 자리가 없이 사람들이 꽉 차있는데 이색적인 것은 새벽부터 앞자리를 지킨 몇 사람의 외국인 선교사들과 목사들의 모습이었다. 당시의 광경을 신앙신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2년 반 만에 얼굴을 대면하는 하나님 앞에 교인들은 꿈엔들 잊을 수 없는 그 얼굴이 아니던가. 장내는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의 도가니로 화하였다. 하나님께서도 흐르는 눈물을 걷잡지 못하여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이어 찬송가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이 시작되었고, 여러 해 동안 메말랐던 굳은 심령은 마침내 녹아지고 피어나서 단비와 같은 은혜를 받았다.

하나님의 설교 말씀이 터져 나오자 자리에 앉아있던 목사들 중에는 견디다 못해 자리를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었다.”

`꿈엔들 잊을 수 없는 그 얼굴이 아니던가
장내는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의 도가니로 화해`

1시간 45분간의 예배시간이 지나고 하나님께서 떠나실 시간이 되자 광주교회는 안타까운 설레임이 밀물같이 번졌다. “온몸에 땀이 비오듯하는 하나님께서 떠나실 시간이 되었다. 너무나 짧았던 시간이요, 순간이었다. 망연히 어쩔 줄 모르게 서있던 교인들이 차가 움직이자 차마 안타까와 차를 붙잡고 놓지 못한다. 어떤 학생이 차창 안으로 손을 넣으매 하나님께서 손을 잡아 주시며 ‘오, 또 오마’하고 눈물을 지으셨다”라고 신앙신보는 광주교회를 떠나시는 광경을 적었다. 가까이서 수행하던 기자는 광주비행장 비행기 안에서 본 하나님의 모습을 이렇게 적었다.

“기상에 올라가신 하나님께서는 프로펠라 폭음이 울리고 문이 닫혀질 때까지 오랫동안 배웅 나온 교역자들에게 손을 흔드셨다. ‘추운데 어서 들어가라.’ 그러나 비행기 밑에서는 아무도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미끄러져 나가자 얼른 창문을 통해 사랑하시는 자들을 향해 또 손을 흔드시건만 지상에서는 보지 못한다.”

그런데 여러 지방 중에 특히 광주를 먼저 선택하신 이유를 당시 사설(1966.12.12.신앙신보)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특히 광주를 택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일념에서 전도의 결실을 가장 많이 맺었기 때문이다. 단 4개월 만에 천사백 명을 인도하였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하나님께서 신앙촌 건설에 여념이 없어 그간 지방 전도에 시간을 내지 못하였더니 거짓 목자들이 하나님께서 와병하였다느니 사망하였다느니 하는 낭설을 유포시키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천인공노할 모략이요 중상이라 할 것이다. 거기 현혹되었던 기성교인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깨닫는 바 있을 것이다. 거짓 목자들의 허위성이 만천하에 폭로되고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라며 그 의의를 설명하고 있다.

계속 되는 전국 순회 일정 중에 광주에서 3월 3일 제2차 집회가 열렸다. 집회에 앞서 교회를 2층으로 증축을 하게 되었는데, 교회를 허무는 것을 보고 주민들이 몰려와 ‘전도관이 없어지는 것이냐’고 묻더라는 것이다. 사람들을 다 담지 못해 더 크게 짓는다 하니 놀라더라는 것. 앞으로 몇 달 내에 더 크게 늘린다고 하자 그 사람들이 농담 아니냐고 반문 하길래 당시의 광주교회 관장 왈 “무슨 농담으로 이 추운 엄동설한에 집을 벼락같이 헐고 다시 짓겠소. 아무리 크게 지어도 모자라니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고 무엇이겠소”라고 답변했다.

`처음엔 원수같이 대하던 기성교인도
마지막에는 깨어져 열심히 호응`

2차 집회 때도 항공편 사정이 좋지 않아 2시간 가량 연착하여 도착하셨다. 교회 앞부분도 확장하고 2층까지 증축한 교회에 아침부터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해 450여 평 교회를 꽉 메웠는데 그 중 과반수가 기성교인이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원수시 하던 기성교인들도 마지막에는 깨어져 열심히 호응한다. 하나님 하시는 일인고로 3,40년 인정의 줄에 매었던 기성교인들이 두 시간 권능의 말씀으로 꺾어져 돌아온다. 광주에서는 사람이 너무 많아 하나님께서 하룻밤 묵으시고 천백 여 명을 안찰하셨다.”

당시 집회에는 하나님께서 비행기로 혹은 승용차로 도착하시면 자리에 앉아 쉬실 틈도 없이 아침부터 인근 지방에서까지 몰려온 교인들과 기성교인들을 위해 곧장 설교를 시작하시어 보통 3시간 가량 설교 하시고 안찰에 대한 설명을 하시고 다시 3시간 가량 안찰 하시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한다. 안찰을 마치시고 곧장 떠나실 때도 많았다고 하는데 당시 밤 12시에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라 12시까지 덕소 신앙촌에 돌아와 다음날 덕소교인들을 위한 새벽예배를 인도하시기 위해 강행군을 하셨던 것이다.

4월 13일 광주에서 3번째 전도 집회를 인도하셨는데 5천 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왔다고 한다. 또한 이날 안찰을 받기 원하는 수는 천 육백 명이 넘었으나 시간상 580여 명밖에 받지 못하였다고 했다.

6월 20일에는 4차 광주 전도 집회를 하게 된다. 집회에 앞서 광주 인근 교회 8개 팀이 참석하는 교인 친선 종합 체육대회를 개최하였는데 광주, 여수, 목포, 순천, 장성, 강진, 영산포, 송정리 교회가 참석을 했다. 3천명을 수용하는 광주 실내체육관에선 주로 구기 종목을 가졌고, 일반 시민들의 관심 속에 마라톤도 개최되었다.

체육대회가 끝나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밤 9시부터 11시까지 기성교인 및 불신자도 다수 참석한 가운데 집회를 인도하셨다. 다음날에는 새 식구들에게 안찰하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새 생명을 부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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