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권능의 집회마다 기성교회의 방해 공작 치열

발행일 발행호수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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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1967년 하나님의 전국 순회 집회는 대도시만을 찾아다니신 것이 아니다. 1967년 2월 20일자 신앙신보의 “시관급에 순회 계속 -‘길은 하나밖에 없다’”란 제하의 기사에 보면 “하나님은 부산, 전주, 청주 등 도관급 집회에 이어 시관급에도 계속 순회, 권능의 집회를 인도”하신 것이 나타나 있다. “소사, 원주에 이어 천안, 공주, 부평, 안동 등지에서 집회를 연이어 개최하셨다. 집회마다 하나님의 권능이 크게 나타나 은혜에 굶주렸던 허다한 기성교인들이 생명의 줄을 잡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기성교계의 조직적이고도 억척스런 집회 방해는 방법도 가지가지여서 하나님의 집회에 참예하여 은혜를 받고 참길을 깨달은 사람에게 하루에도 일고여덟번씩 찾아가 통곡을 하며 전향을 말렸다는 기사도 있고 골목을 지키며 못가게 말리는가 하면 난데 없이 윷놀이를 벌여 집회 참석을 방해한 곳도 있다고 한다. 1967년 3월 20일자 기사이다.

“하나님의 역사로 성신을 알고 구원의 길을 깨달은 양떼들이 참 목자에게로 전향, 대거 입교해 오자 크게 당황한 기성교회 목사들은 하나님의 집회 시와 때를 맞추어 일제히 그들대로 부흥회를 열고 교인의 집회참여를 간접 방해했다. 이러한 때에는 가위 초교파적 단결이 이루어져 전주에는 부산에서 15명의 목사들이 응원차 달려오기도 했다.”

축복을 받고 성신의 은혜를 분별하여 참 길로
돌아오면 그렇게도 기뻐하셨던 하나님

1967년 3월 20일자 “혼돈하는 기성교계”란 제하의 기사에는 갖가지 기성교계의 방해공작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 이어지는 기사를 보면 “이렇게 해도 별무성과하자 골목마다 지켜서서 하나님의 집회장으로 나오는 교인들을 감시하고 만류하는 직접방해 전술로 나왔다. 그것도 실패하면 은혜 받고 돌아간 교인집에 새벽부터 찾아가 통곡을 하며 전향을 말린다는 것이다.

안동 같은 곳에서는 윷놀이 등 오락방법까지 총동원하는 입체작전을 펴기까지 했다. 그러나 은혜를 사모하던 교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은혜의 집회에 참석했고 참여한 사람들은 그들의 허위상을 발견했고 성신의 켠을 택하는 고로 아무리 울고 불고 매달려도 냉정히 끊는다는 것이다.”

당시 수행기자의 순회집회 수행기를 통해 당시 집회상을 들여다본다. 집회는 2월 10일 천안에서이다. “세 시간이상 설교 하신 후 안찰하심. ‘분명히 선을 긋고 받으세요’ 씻어주는 하나님께서 구하건만 깨닫지 못하고 인정의 줄에 매인 사람들이 불쌍하다. ‘지옥을 가면 대신 가주는 사람 있습니까? 자신이 갑니다’ 안타까워 하시는 하나님. ‘기성교회 수십년을 믿어 죄 없는 줄 알았는데…” 어렸을 때 지은 죄까지 한 오라기도 사함받지 못하고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보고 거짓것에 속히웠음을 안타까워하는 기성교인들도 있었다.” 어디나 집회를 하시면 세 시간 가량의 설교와 덕소 신앙촌에 돌아가실 시간만 남기고 안찰로써 축복을 베푸셨다.

천안 전도관은 1966년 12월에 대지 480평에 건평 70평으로 당시로는 최신 2층 제단을 신축하고 모든 마무리 공사를 마친 것이 하나님께서 집회 오시기 전날인 2월 9일이었다. 4월 3일 신앙신보에는 “천안 전도관 부흥 기대 커”란 제하의 기사에서 “2월 10일 하나님 인도 하의 ‘특별 전도 집회’를 열었는데 이를 계기로 감리교인 이승우(여.36)씨를 비롯한 많은 기성교인들이 진리를 터득, 전향 입교해왔다 한다.”

이어지는 하나님의 순회집회 장소는 공주였다. “일개 소읍이지만 대학만 넷이나 된다는 수준 높은 교육도시. 제단에 가득한 사람들이 우리 형제는 거의 없고 전부 기성교회의 기둥 장로, 집사, 권사들이다. 인텔리들답게 주의 말씀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도 확실하고.

목사가 앓아누워 있는 바람에 자유롭게 집회에 참석할 기회를 얻은 어느 주동 장로가 가로되 ‘안찰을 받아보고 죄가 드러나면 믿겠습니다.’ 받아보니 죄악이 그대로 지적되는 동시에 소멸되는 증거가 확실한지라 참길을 찾기로 성신 앞에 맹세하다. 기성교회 장로, 집사, 권사들이 가장 알차게 돌아온 집회였다. 주의 종이 기뻐하고, 하늘의 별빛도 한결 빛났다.” 감상적인 소감으로 수행기를 맺고 있는데 당시 공주 전도관에 다녔던 교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공주전도관에서 운영하던 공주중학교에 다녔다는 남궁연옥 집사(55. 대전교회)는 “학생들이 두 줄로 서서 안내를 했어요. 안내를 마치고 저희 학생들은 2층에서 예배를 드렸던 기억이 나네요.”
임경묵 권사(67. 서대전교회)는 정확하게 “125평 건물”이라고 기억한다. 공주군내 4군데를 개척하며 전도사로 활동했다는 임 권사는 “1967년이면 공주군 우성면 도천리 전도관 전도사로 공주에서 있던 하나님의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당시에 공주 유지급들 많이 와서 축복을 받았어요. 저는 집회때 밖에서 안내를 봤었는데 그때 하나님의 집회가 있고 나서 공주군에서 모자 전도사로 유명했던 기성교회 전도사가 전도관으로 넘어왔어요. 그래서 공주군내가 발칵 뒤집혔었죠. 그 아들 전도사 이름이 한영길 전도사였습니다.”

신앙신보에서 누차에 걸쳐 기성교회의 집회 방해를 보도했는데 저렇게 교회의 전도사가 전도관으로 넘어올 정도면 기성교계가 안달이 나도 나겠고, 뒤집힐 만도 했었겠다.

박준길 권사(80. 마포교회)도 “1963년 10월에 하나님을 모시고 개관집회를 하고 하나님께서 그 이후에 딱 한 번 오셨는데 그게 1967년입니다. 그 집회에 공주의 기관장급, 유지급들이 와서 안찰을 받았습니다. 당시에 공주 전도관 평소 예배 드리는 교인도 많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신 집회에 사람이 많이 왔었다는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공주사대, 교대 학생들이 많이 나왔어요. 대학생들이 많았어요.”

교인들을 잃은 기성교회에서는 전향한 교인들을 찾아가
울고불고 통곡을 하기도 하고 별의 별 방법을 다 동원해
그러나 은혜의 맛을 알고 참 길을 찾은 사람들은
그들의 만류를 냉정히 끊고 추호도 요동함이 없어

집회 후의 반응이 신앙신보 4월 17일자에 실려있다. “참 빛으로 돌아오는 공주/ 400여 기성교인 일거 전향/ 거짓 목자에 속은 것 분해/ 큰일 난 기성교회 연일 부흥회 속수무책” 제하의 기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금년들어 전국적으로 순회하며 여호와의 경고를 하는 가운데 기성교회에 구원이 없음을 깨달은 무수한 기성교인들이 진리를 찾아 전도관으로 전향해 오고 있음은 기보한 바와 같거니와 최근 알려진 바에 의하면 교육도시 공주서만 4백여 기성교인들이 전향해 왔다고 한다.

공주는 하나님께서 한 번 가셔서 설교하셨던 곳이다. 주일날이면 공주 전읍에서 전도관으로 모여오는 인파때문에 일대 성시를 이룬 듯하다는 것인데 이들은 하나님을 통하여 죄씻음과 성신 받음과 구원 얻음을 깨닫고 그네들이 지금까지 구원 얻은듯이 속히워 왔음을 가슴쳐 통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박장로가 죽었다고까지 거짓을 일삼던 교회 교역자들은 그들이 말한 일만가지 모략중상이 거짓임이 폭로되자 당황, 하나님께서 다녀가신 날부터 오늘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연합부흥회를 열고 교인의 전향을 막으려 하나 헛수고에 그치고 있다한다.”

부평집회에 대해서는 “밤 열시까지 외치고 열한시반 넘어 귀촌”했다는 간단한 수행기를 남겼고, 갑자기 윷놀이 등의 오락수단을 동원하여 집회를 방해한 안동집회를 위해서는 비행기로 대구에 도착하셔서 다시 “좁고 험한 길을 세시간 달려 안동에 도착. 지금까지의 집회 중 가장 힘든 집회였다고 하나님께서 술회. 삼백 오십명을 안찰. 그러나 일꾼 될만한 수가 많지 않아 하나님께서 섭섭해 하시다”는 수행기를 남겼다.

하룻만에 지방을 다녀오는 일이 쉽지만은 아닌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선 새벽부터 출발해 서너시간을 이동하고 때론 6시간 넘게 차로 달려 집회 장소에 도착하시면 숨 돌릴 틈도 없이 예배를 인도하시고 세 시간 넘는 설교와 세 시간 가량의 안찰을 하셨다. 잠시도 쉬실 틈이 없이 은혜 베푸시기에 바쁘셨던 하나님.
충청도의 천안, 공주에 이어 경상도 안동에서 집회를 하시고 전북 군산과 전남 영산포에서 집회를 인도하신다. 군산에 가시기 위해서는 “새벽 6시 출발. 6시간을 달려 12시 경에 도착 집회를 마치고나니 때아닌 폭설이 나려 험한 고개를 넘은 행로에 지장을 주다. 그러나 천안을 지나니 가신 듯 눈이 그쳐 12시까지 신앙촌에 돌아오실 수가 있었다”고 수행기는 적고 있다.

영산포에서는 “본관 전도사가 출영하는 바람에 우리 식구들이 제단을 많이 메우고 새로 나온 기성교인과 불신자들은 제단이 좁아 들어가지 못하여 많은 사람이 돌아오지 못하였다. 앞으로 각 제단에서는 이런 점에 유의하여 장내 정리에 소홀함이 없어야 하겠다”는 수행기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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