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핍박의 고장에 은혜의 집회…하나님이 기뻐하심
천부교 50년 역사에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에 대해 백을 흑이라고 하는 식의 모략은 그침이 없었다. 1960년대에는 기성교회 목사들이 “박장로가 죽었다”는 식으로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당시의 신앙신보 보도로 확인되었다. 신앙신보 1967년 2월 6일자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한때는 죽었다고 모략 선전하던 기성교회 목사들이 요즘 순회 집회 하시는 것을 보고 ‘다른 박장로가 나타났다’고 또 떠들고 있다고 한다. 그 자체가 모략이니만큼 그 속셈을 알만도 하지만 ‘정말 그런가’ 하고 그말을 곧이곧대로 알아듣고 나발을 부는 평교인들이 불쌍할 뿐이다.
거짓과 모략은 어느 땐가는 꼭 그 진실이 밝혀지기 마련이어서 그 모략이 거짓임이 판명될 때는 오히려 더 큰 진실의 수확을 얻게 되는 것이다. 요즘 기성교인들이 수없이 전향해오고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서울에서만도 정월 한 달에 수많은 사람이 전향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보면 기성교회의 모략은 오히려 전도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전국적으로 각지를 순회 하시면서 집회를 열고 계신다. 진실한 믿음을 갈망하는 자라면 이 기회에 참과 거짓을 분간하고 깨달아 죄를 벗고 구원의 자리에 이르러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1월 23일의 부산집회와 24일의 춘천집회 이후 1월 26일 전주에서 집회를 여시게 된다. 집회가 열리는 곳마다 기성교인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는데 그 중에는 자기 교회 목사가 하는 비방에 제 눈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전주는 1956년 노송동에 처음 세워지는 전주 전도관 개관집회 당시에 집회를 방해하는 기성교회의 조직적인 폭력 난동이 일어나는 등 성신의 역사에 대해 핍박이 가장 극심했던 곳이다. 당시 500여 명의 괴청년들과 성경학교 학생들이 고모 목사의 지시로 집회장에 난입하여 집회장에 모인 사람과 단상을 향해 돌을 던지고, 단상의 마이크 대를 집어 들어 하나님께 위해를 가하려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시 부상을 입은 사람들에게 안찰을 베푸시어 몇 주씩 치료를 요하던 중환자들이 그 자리에서 툭툭 털고 일어나 가는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기도 했었다.
그런 핍박의 전주 땅에 전도관이 크게 세워지고 1967년 1월 26일 하나님을 모시고 집회를 열게 되었는데 4천여 명에 이르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기성교인들과 불신자들이 제단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수행 기자는 전주 집회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지금까지 집회 중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신 집회였다. 천막집회시에 하나님에게 야유와 핍박을 극성으로 퍼부었던 이 땅에 이제 4천여 기성교인과 불신자들이 제단을 메우고 있었다. 자동차편으로 장장 6시간을 달려 한시쯤 전주에 도착하신 하나님께서는 곧 단에 올라 은혜의 말씀을 외치시기 시작했다.” 지방 순회 집회시 보통 세 시간에서 세 시간 반에 걸친 설교를 하시고 시간이 허락되는 한 안찰을 하셨다.
“한 생명이라도 더 건지려는 애타는 심정으로 불을 뿜는 듯 장장 세시간 반에 걸쳐 구원의 근본을 논하셨다. 하나님의 온몸은 땀에 젖었고 물을 9병이나 마시면서 힘을 다해 외치신다.”
전주에서도 설교 후 숨을 돌릴 새도 없이 곧이어 안찰을 하셨다. 안찰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수백 명이었으나 당시에 덕소신앙촌에 돌아가실 시간 때문에 원하는 사람들에게 안찰을 모두 해주실 수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기성교회 전도사 한 사람이 큰 은혜를 받았다.
“기성교회에서 단을 지키던 전도사 한 사람이 회개하고 은혜를 체험했다. 통행금지 시간 때문에 다 마치지 못하고 6시 반쯤 출발하여 좁은 지방도로를 시속 80마일로 달려 겨우 통금 전에 신앙촌에 돌아오실 수 있었다.”
전주집회를 마치고 이틀 뒤인 28일에는 마산에서 집회를 하시게 된다. 비행기로 부산에 가셔서 그곳에서 다시 차를 갈아타고 두 시간을 달려 마산에 도착하셨다. 일기가 안 좋았던 듯 수행기자는 “눈보라와 농무로 기상조건은 나빴으나 비행기는 정시 이륙하였다. 대구는 농무로 착륙불가라 하였으나 부산에는 안착하다. 다시 자동차로 두 시간을 달려 마산에 도착해 6시간 동안 설교와 안찰을 하신 후 악천후를 뚫고 비행기로 돌아 오셨다”하고 적고 있다.
마산은 초창기 천막집회 당시 마산 시내 기성교회 목사들과 기성교인들 거의 대부분이 하나님의 집회에 와서 은혜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다. 수행기 8편에 보면 “마산은 목사들이 눈물을 흘려가며 받은 은혜를 증거 하던 곳이다. 그러나 그 목자들이 입을 돌이켜 하나님을 이단이라고 증거 하였으며 양떼들에게 독초를 먹이고 말았던 것이다. 수십 년 독초를 먹어 하나님을 원수시하고 나왔어도 그 권능아래 깨어져 참 목자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니 기성교회 목사들은 더욱 반발하지 않을 수 없다.
마산서는 하나님의 집회에 참석하면 교회에서 제명해버린다고 시퍼런 위협을 했다한다. 기성교회에서 약이 오를 대로 오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약이 올라도 하나님의 권능 앞에는 어떻게 하는 도리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1월 30일에는 청주전도관에서 2월 1일에는 전라도 광주에서 이어 경기도 소사 전도관과 강원도 원주전도관에서 계속하여 집회를 인도하신다.
1967년 2월 13일자 신앙신보에 의하면 “소사제단에는 많은 불신자와 기성교인들이 운집하여 진리의 말씀을 경청하고 깨우침을 받았으며 원주에서도 기성교인 주동들이 나와 은혜를 받고 성신의 역사를 체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56년 6월 11일부터 16일까지 전주시 노송동에서 전주전도관 개관집회가 개최될 예정이었다.
전주의 기성교회들은 하나님의 집회를 앞두고 총 단결하여 조직적인 집회방해를 기획하게 된다. 전주의 공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이 서울까지 전해지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6월 12일 기차를 타고 전주로 내려가신다. 기차간에서 전주에 시무한다는 이모 목사는 여러 사람 앞에서 고성으로 힐난하며 하나님께 대드는 일이 일어났다. 당시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태도로 적당한 자리에서 토론할 것을 권면하셨다고 전해지는데 전주에 도착도 하시기 전에 전초전이 시작된 것이었다.
1956년 6월 12일 밤 기성교회에서는 당시 전주 성경학교 학생 등 500여 명으로 폭력배를 조직하였고 현장 총 지휘에는 고성모 목사, 김지세 목사 등이 임하도록 하였다. 이를 위해 성경학교는 휴교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며칠 전부터 연합 ‘부흥집회’를 열고 박장로 집회를 초토화 시키겠다며 결의를 다졌다. 500여 명의 폭도 가운데 청년의 우두머리는 당시 전북기독학생연합회 부회장이던 정 모로 그는 나중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개하며 당시의 일을 고백하였다.
이들 500여 명의 청년들은 집회장에서 고성모 목사가 ‘저것 집어치워라’고 지팡이를 휘두르며 고함을 치는 것을 신호로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하나님의 단상으로 돌진하면서 준비해 온 돌을 던지며 연약한 부녀자들에게 마구잡이로 폭력을 행사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돌과 주먹질, 발길질에 머리가 터져 피를 흘리는 가운데 일부 청년들은 단상으로 뛰어올라 하나님께 위해를 가하려고 덤볐다. 그 중에 한 명이 마이크 대를 잡아 하나님을 향해 휘둘렀다. 위기일발의 찰라 마이크 대는 두 동강으로 부러지며 마이크는 하나님 뒤편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그날의 고함소리와 소란한 광경은 고스란히 현장의 녹음기에 기록되어 그날의 핍박이 어떠했는지를 생생하게 증언했던 것이다.
전주집회 방해 난동사건은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이 가로막을 수 없으며 성신의 역사는 기성교회가 방해하고 핍박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욱 불붙듯 일어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