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집회

대전 집회 첫날부터 인파는 홍수를 이루고
발행일 발행호수 2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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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이 달에 찾아갈 역사의 현장은 대전집회 자리이다. KTX가 개통된 이후 대전까지는 채 1시간도 걸리지 않게 되었다. 대전역은 1905년 1월 1일 경부선 개통과 동시에 영업을 개시하여 지금은 하루에 상, 하행 합쳐 92회, 주말이면 100회나 열차가 정차하는 역으로 발전했다.

1956년 4월 23일부터 28일까지 열렸던 대전집회에 관해서 많은 기록이 남아 있는 편은 아니다. 집회가 열렸던 장소도 막연히 대전역 광장으로만 알려져 왔다. 그러나 역 광장이라는 곳이 열차를 이용하는 이용객들이 끊임없이 이동하는 곳인데 그곳에다 천막을 치고 몇날 며칠 집회를 한다는 것은 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 때는 전쟁으로 다 폭격을 맞아 대전역도 하꼬방 같은 판자집 같았고 주변에 건물이라고는 없었어요.”라는 박병화 승사(78, 대전교회)의 말을 듣고, 사람들이 다니던 곳 말고 주변에 꽤 넓은 곳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또 “역 바로 앞이 아니라 좀 뒤쪽이었던 것 같은데 우리는 계룡산 아래 신도안에 살다가 대전에 집회가 있다고 찾아간 것이니까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지.” 당시에 집회에 참석했다는 이희순 권사(70, 대전교회)는 집회가 열렸던 장소가 역 바로 앞은 아니었다는 정도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시내에 붙은 벽보를 보고 대전집회에 참석했다는 박병화 승사를 만나기 전에 대전일보사를 찾았다. 신문 역사가 50년 넘는 옛날 신문에서 그 옛날 신문광고나 기사가 있을까 싶어서 찾아갔는데 과연 대전일보에서 하나님의 집회를 알리는 광고를 찾을 수가 있었다. 1956년 4월 20일부터 23일까지 매일 광고가 실렸는데 2면 짜리 신문에 4일간 계속 실린 7㎝×10㎝ 광고에는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의 대전 시민 신앙 부흥대회’ 장소 충남 대전 철도 운동장이라고 분명히 쓰여 있었다.

1956년 신앙신보에는 4월 20일자 광고에 ‘대전시’라고만 되어있다. 주간이던 신앙신보의 광고보다 일간지인 대전일보의 광고에 더 신뢰를 실어본다.

박병화 승사는 대전역 뒤쪽에서 집회가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지금 대전역 동광장이 되는 역 뒤쪽에는 넓은 주차장이 정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박승사가 집회가 열렸던 곳이 이쯤일 것이라고 안내했던 곳은 개인의 사유지라는 안내 문구가 붙어있었고 텃밭 가꾸듯 이런 저런 채소들을 키우고 있는 곳이었다.

‘아 세월이 무상하구나 하나님께서 집회를 열어 많은 은혜를 베푸셨던 곳에 이제는 이런 채소들만 자라는 텃밭이 되어있다니…’하면서 감상에 젖어 이런 저런 사진들을 찍었다. 텃밭과 대전역이라는 글씨가 함께 들어가게.

역사의 현장을 사진에 담고 서울에 올라가는 기차를 타러 다시 대전역으로 차를 몰고 가면서 대전교회 유덕자관장이 말했다. “서경자(67, 대전교회)권사님은 이쪽 천주교회 근처라고 하는데 여긴 아니지…”

대전역에서 다시 뒤쪽 광장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철로 위로 육교처럼 길을 만들어 통행하게 되어있다. 아까 사진을 찍었던 장소는 잘 보이지 않았다. 역에서 보면 그 곳은 주차장 지나 그 뒤쪽에 있었다.

광장에 조성된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할아버지들에게 “혹시 대전 철도 운동장을 아시는지?”물어보았다. 그 동네에서 계속 살았다는 한 할아버지가 “저기 보이는데 저 건물 뒤쪽에 가면 주차장으로 쓰는 데가 있는데 옛날에 거기를 그라운드, 철도 운동장이라고 그랬지.”하고 이야기를 해준다. 대전 철도 운동장이란 곳이 있었던 것이다. 그냥 막연히 대전역 어느 귀퉁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철도 운동장이라고 부르던 곳이 분명히 있었다. 할아버지가 일러준 대로 찾아가니 주차장이 있었다. 그리고 뒤쪽으로 아까 지나간 천주교회가 있었다. “애걔, 겨우 요만한 데서 집회를 하셨다구?” 테니스 코트 3개 정도가 있고 나머지 공간에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크기가 너무 작아서 실망한 마음으로 그 근처에 있던 한국 철도공사 대전지역 경리부란 현판이 있는 곳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철도 공무원을 퇴직하고 계약직으로 일을 한다는 이세진(63)씨에게 철도 운동장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주차장 자리가 옛날부터 철도 운동장 자리가 맞고 그곳에 서있는 아파트 자리도 다 운동장이었다고 했다. ‘그러면 그렇지. 그렇게 작은 곳에서 집회를 하실리가 있었겠는가’ 이야기를 듣고 다시 찾아가서 철도공사 직원들이 산다는 아파트 두 동이 서있는 곳까지 생각해보니 꽤 넓은 곳이었다.

50년 전 그곳에서 군산집회(1956. 4.16~4.21)를 마치시고 이틀 뒤 곧장 대전에서 집회를 열으셨던 것이다. “집회 첫날인 23일 밤부터 호서지방 일대와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여든 군중은 문자 그대로 사람의 홍수를 이루었는데, 인원은 첫날 밤에만 만 5천, 철야 기도자가 4천 5백명, 새 기도자가 5천여 명, 24일 저녁에는 2만여 명, 누계는 무려 17만 4천여 명에 달했다.”고 당시 집회를 보도한 신앙신보(1956.5.2)는 전하고 있다.
송혜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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