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게 노예 무역과 잔인한 폭력을 교사(敎唆)하다 … 반인류 범죄의 뿌리를 찾아서

다시 쓰는세계사 <8>
발행일 발행호수 2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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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1> 1612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발표한 가톨릭 금지령 제1조

■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톨릭 금지령을 내리다

지금부터 400여 년 전인 1612년, 일본의 쇼군(しょうぐん, 将軍)으로 명실상부한 지배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가톨릭 금지령’을 발표했다. 당시 일본에 가톨릭이 광범위하게 퍼져 신도가 60만 명에 이르는 상황에서 전격적으로 가톨릭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톨릭을 금지한 첫 번째 이유는 가톨릭이 순교자를 찬미하는 행태에 대한 강한 반발 내지 혐오 때문이었다. ‘가톨릭 금지령’ 제1조는 ‘가톨릭은 죽음을 두려워 않는다. 몸을 베고 피를 내어 죽는 것을 구원으로 여긴다.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사람을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자료1,2>

그전까지 일본인은 가톨릭 신도를 뜻하는 ‘크리스천’을 吉利支丹(기리시탄)이라고 표기했는데, 이에야스가 발표한 가톨릭 금지령에는 한자를 바꾸어 切支丹(기리시탄)이라고 했다. 한자대로 보면, 몸을 베어(切) 붉은(丹) 피를 내는 것으로 유지(支)되는 사람이 가톨릭 신도라는 뜻이다.

<자료2> 가톨릭 금지령이 내려진 후, 기리시탄(切支丹)을 신고하라는 내용의 나무 팻말이 전국 각지에 세워졌다.
(사진 출처: http://himahima1.cocolog-nifty.com/in/2017/07/post-f600.html).

■ 순교자들의 죽음은 가톨릭 신앙의 핵심

<자료3> “순교자들의 피는 가톨릭 신도의 씨앗”이라고 천명한 가톨릭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사진 출처: Wikimedia Commons)

이런 표현은 그때까지 1500년 넘게 이어진 가톨릭의 본질을 꿰뚫는 것이었다. 가톨릭의 기초를 세운 교부 테르툴리아누스(155년경~ 240년경)가 “순교자들의 피는 가톨릭 신도의 씨앗(sanguis martyrum semen christianorum)”이라고 천명할 정도로, 죽음으로 흘린 피를 숭배하고 찬양하는 것이 가톨릭 신앙의 중요한 토대이기 때문이다.
<자료3>

가톨릭 금지령과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발표한 ‘가톨릭 선교사 추방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가톨릭 선교사는 의가 없고 선을 파괴한다. 순교자를 보면 기뻐하며 달려가 절을 한다. 이것을 종교의 본질이라 여기는데 사법(邪法 = 사교)이 아니고 무엇인가.’(伴天連追放之文 … 残義損善、見有刑人、載欣載奔、自拝自礼、以是爲宗之本懐、非邪法何哉)

■ 일본 민중이 바라본 ‘기리시탄(鬼利支丹)’

일본 정부가 죽음을 지향하는 가톨릭의 본질을 사악한 종교라고 했다면, 일본 민중은 가톨릭의 행태를 보고 귀신의 종교라고 여겼다. 일례로 1614년 가톨릭 선교사와 신도들이 나가사키에서 행진을 벌였는데, 이 행진은 십자가 형틀에 묶인 예수상을 선두에 세우고 그 뒤를 따르면서 각자 자신의 가슴을 돌로 쳐서 피를 흘리거나 갈라진 대나무로 등을 때리는 등 각양각색의 자해를 보여 주었다. 이 섬뜩한 행진의 의미는 순교를 그만두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일본 민중은 희한한 단체가 가톨릭 선교사의 명령대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순교라는 이름으로 죽음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고 귀신의 행렬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위를 두고 ‘鬼利支丹(기리시탄) 행렬’이라고 했는데 한자대로 보면 ‘귀신(鬼)을 이용해(利) 붉은(丹) 피를 내는 것으로 유지(支)되는 사람들의 행렬’이라는 뜻이었다. 일본 민중은 가톨릭 신도들의 순교 행진을 백귀야행(百鬼夜行)처럼 보았고, 죽음을 지향하고 찬양하는 행위에 불쾌감을 느꼈다.(야먀모토 시치에이, 『일본인이란 무엇인가』, 페이퍼로드, 2014)

■ 노예 무역에 대한 일본인의 반감

<자료4> 노예 무역을 공인해 준 로마 가톨릭 교황 니콜라오 5세(사진 출처: wikipedia)

이 같은 순교에 대한 혐오감 못지않게 일본인에게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가톨릭의 행태가 또 있었는데 바로 노예 무역이었다. 당시 일본에도 노예는 있었지만 사람을 납치하거나 인신매매해서 대량으로 운송하는 소위 ‘노예 무역’은 없었다. 그러나 가톨릭 세계에서는 1455년 로마 가톨릭 교황 니콜라오 5세가 교서(로마누스 폰티펙스)를 통해 노예 매매를 공인해 주었기 때문에,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이 일본과 교역하며 일본인을 노예로 매매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행위였다.<자료4>

<자료5> 오무라 유코의 동상 일본의 지식인이었던 오무라 유코는 노예 무역에 직접 개입하는 가톨릭 선교사들을 보고 “이 종교를 허용한다면 일본은 머지않아 타락하고 말 것이다.”라고 했다.(사진 출처: wikipedia)

포르투갈 선박의 일본 입항과 거래는 반드시 가톨릭 예수회의 승인 아래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예수회가 일본과의 무역을 독점하도록 포르투갈 국왕의 허가를 받아 냈기 때문이었다. 가톨릭 예수회의 승인 아래 노예 매매가 이루어지자 노예 매매에 대한 일본인의 반감은 그대로 가톨릭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다.

16세기 일본 정부의 문서 비서관 격이었던 오무라 유코(?~1596)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자료5> “포르투갈 상인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일본인 수백 명을 사들여 수족을 쇠사슬로 묶어 배 밑바닥에 처넣었고, 일본인은 지옥 같은 학대를 받았다.
<자료6> 가톨릭 선교사들은 많은 보물을 산처럼 쌓고 종교 번창의 계략을 세웠다. 그것을 본 일본인들이 그대로 배워서 아이를 팔고 아내를 판다. 이 종교를 허용한다면 일본은 머지않아 타락하고 말 것이다.”(야먀모토 시치에이, 『일본인이란 무엇인가』, 페이퍼로드, 2014)

■ 노예 무역에 앞장선 기리시탄 다이묘들

일본의 지식인이었던 오무라 유코는 노예의 참상에 충격을 받았지만, 포르투갈 상인과 가톨릭 선교사들은 노예를 학대하는 것에 익숙했다. 그들에게 노예 무역은 비인간적인 행태가 아니라 천문학적인 이익을 보장하는 유망한 사업일 뿐이었다.

일본의 노예 무역은 날이 갈수록 번창했다. 일본의 지배 계층이 총과 화약이라는 최첨단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노예 매매에 앞장섰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영지를 다스리는 다이묘(だいみょう, 大名)들이었고, 그중에서도 특히 가톨릭을 믿는 기리시탄 다이묘들이었다. 일본은 노예 무역 초기의 거부감과 지식인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기리시탄 다이묘를 필두로 하여 노예 무역 우등생으로 발돋움했다.

일본의 자료를 보면 “기리시탄 다이묘들이 전쟁에 필요한 화약을 수입하기 위해 자기 영지의 일본 여자들을 짐승처럼 묶어 팔아 치웠다. … 유럽은 가는 곳마다 일본 여성이 눈에 띄었고, 일본인 노예가 유럽 전역을 통틀어 50만 명이라고 한다. 또 포르투갈 가톨릭 선교사들이 일본의 젊은 처녀들을 인도와 아프리카로 팔아 치웠다.”(도쿠도미 소호, 『근세일본국민사』)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의 다이묘들은 왜 노예를 팔면서까지 총과 화약을 수입했을까. 당시 일본은 총과 화약을 자체 생산할 수 있었으나 대규모 전쟁을 위해서는 그보다 훨씬 많은 무기가 필요했고, 노예 매매로 대량 무기를 확보했던 것이다. 무기를 손에 쥔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 바로 임진왜란이었다. 일본은 이미 노예 무역을 통해 일확천금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전쟁터에서 조선 사람을 납치해 노예로 팔아넘기기 시작했다.

<자료6> 노예선에 끌려 가는 흑인 노예들 포르투갈 선박에 실려 간 일본인 노예들도 이들처럼 지옥 같은 학대를 받았다.(사진 출처 :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 )

■ 조선 사람을 유린한 노예 사냥

조선인 노예의 규모는 정확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 조선인 노예 가격이 형편없는 헐값이었던 것을 보면 조선인 노예 숫자가 어마어마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프리카 노예 가격이 170스쿠도(scudo·포르투갈 옛 화폐단위), 페루 노예가 400스쿠도인 것에 반해 조선인 노예는 2.4스쿠도에 불과했다.(카를레티, 『동방여행기』)

조선에서 노예 매매와 납치를 목격한 일본 종군 승려 게이넨(慶念)은 이렇게 적었다. “노예상들은 조선인을 새끼로 목을 묶은 후 여럿을 줄줄이 옭아매 몰고 가는데, 잘 걸어가지 못하면 뒤에서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 … 부모는 자식을 찾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울부짖는 그 광경은 ‘지옥도’에서도 그려져 있지 않은 비참한 것이었다. 오늘도 조선 사람의 아이를 빼앗아 끌고 가는 것을 보았다. 한 병사는 손을 모아 애원하는 조선인 부모를 그 자리에서 칼로 베어 버리고 아이는 끌고 갔다.”

1990년대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의 가미가토 겐이치 교수는 “일본 상인들은 포르투갈인이 아프리카에서 노예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행위를 배워 조선인 포로를 노예로 매매했다.”고 밝힌 바 있다.

노예 무역을 일본에 가르친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에서 노예 사냥으로 악명 높았고, 그 반인류적 범죄가 아프리카를 넘어 아시아로,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까지 전파된 셈이었다. 그로부터 140여 년 전, 노예 무역을 허가한 가톨릭 교황의 교서가 전지구적인 악영향을 미친 것은 역사적 사실로 특기할 만하다.

<자료7> 일본, 조선, 명나라의 지도가 그려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황금 부채. 히데요시는 명나라와 조선 정복에 대한 야망을 황금부채에 그려 넣고 간직했다.

■ 조선에서 저지른 또 다른 만행, ‘코 베기’

노예 사냥과 더불어 일본이 조선에서 저지른 만행이 있는데, 바로 ‘코 베기’였다. 일본에서 전쟁을 지휘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에게 “조선인의 목 대신 코를 베서 보내라. 병졸 한 명에 코 한 되씩 소금에 절여 보내라.”
(강항, 『간양록(看羊錄)』, 1656)는 명령서를 내렸고, 히데요시가 잘린 코를 전공으로 기록하고 감사장을 보내 주었기 때문에 일본군은 조선인의 코를 자르는 데 혈안이 되었다.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도 이와 똑같은 만행을 저질렀다. 1502년, 그리스도 기사단의 일원으로 독실한 가톨릭 신도였던 바스코 다 가마도 이슬람 세력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 적군 800명의 코를 잘라 버렸던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바스코 다 가마는 ‘코 베기’ 외에도 공통점이 많았다. 바스코 다 가마는 가톨릭 전파의 기치를 높이 올리고 인도를 정복하기 위해 항해에 나선 바다의 십자군이었고, 마찬가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중국(명나라)을 정복해 가톨릭 국가를 만들겠다고 천명하며 임진왜란을 일으킨 인물이었다.<자료7> 바스코 다 가마가 무자비한 폭력과 살육을 자행해 그의 함선이 정박하는 해안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던 것처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코 베기 명령을 내린 후 조선의 들판은 코가 잘린 시체로 뒤덮였다.

<자료8> 1933년 조선총독부에서 출간한 보통학교국사권2에 실린 그림으로, 조선인 코와 귀를 잘라 소금에 절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에에게 보냈다고 설명하고 있다. (사진 출처: 월간 독립기념관, 오마이뉴스)

■ 기리시탄 다이묘, 가장 잔혹한 전공을 올리다

1597년 전라도 남원성 전투에서 조선인 4,000명을 모조리 학살한 일본군은 앞다퉈 승전 보고서를 작성하고 조선인의 코를 소금에 절여 일본에 보냈다.<자료8,9,10,11> 당시 이 전투에 참전한 병사 오우가우지 히데모도의 기록(朝鮮物語)에 의하면 일본군 22개 부대가 총 3,726개의 코를 잘랐는데, 그중에서 기리시탄 다이묘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가 879개의 코를 잘라 가장 잔혹하고도 혁혁한 성과를 올렸다.

항상 몸에 십자가를 지니고 다녔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사후에 그 시체를 가톨릭이 인계하고 전 세계 예수회 교회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미사가 열렸으며, 교황청은 그를 성인의 반열에 올려 놓고 있다.(도리즈 료지, 『재검증 고니시 유키나가』, / 조중화, 『다시쓰는 임진왜란사』, 학민사, 1996.)

히데요시가 부하 장수에게 보낸 코 감사장. 장수가 잘라서 보낸 조선인 코의 개수와 함께 장수의 노고를 치하하는 내용이었다. (사진출처:http://www.yisunshinusa.com/pictures/munheon/)

■ 일본군 정신에 새겨진 정복 야욕

일본군은 살아 있든 죽었든 상관없이 조선 사람만 보면 코를 베었으므로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나고 수십 년이 지난 후까지 조선 거리에 코 없는 사람이 많았다.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갑작스러운 사망과 함께 끝이 났지만 그들 정신에 새겨진 정복 야욕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정복의 망령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300년 뒤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으로 대두되었다. 정한론자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추종하고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으로 달성하지 못했던
‘조선 정복의 위업’을 완성하자고 주장했다. 결국 그들의 야욕대로 조선의 국권을 침탈당한 역사를 돌이켜 보면, 코를 베는 행위처럼 야만적인 폭력을 배운 것보다 정복과 침탈의 정신을 학습한 것이 더욱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자료10> 정유재란 당시 조선인의 코를 베는 일본군. (KBS 드라마 “징비록” 중 캡쳐)

■ 인류에 대한 범죄, 그 뿌리는…

현재 로마 가톨릭 교황 프란치스코가 ‘인신매매는 인류에 대한 범죄’라며 근절할 것을 전 세계에 호소하고 나섰다. 다른 국가들이 범죄를 뿌리 뽑는 선한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한 것이다.

그러나 그 집단이 전파한 반인류 범죄는 이미 뿌리를 깊게 내린 지 오래다. 헐값에 인신매매 당한 조선인들은 십자가 깃발을 높이 세운 포르투갈 선박에 끌려가 짐승만도 못한 노예가 되었고, 독실한 기리시탄 다이묘의 칼에 코가 잘린 조선인들은 생지옥 같은 전쟁의 참상을 뼈에 새겼다. 그러나 반인류 범죄보다 더욱 섬뜩한 것은 자신의 죄와 악을 모르는 그 집단의 지적 장애일지도 모른다. 극악한 전범(戰犯)을 성인의 반열에 올리고 악의 뿌리가 타인에게 선한 행동을 촉구한다면 그것은 자기분열적인 망상일까, 아니면 치밀하게 계산된 위선일까.

<자료11> 남원성전투 4천 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한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3,700개가 넘는 코를 베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승전 보고를 올렸다. (사진출처:전북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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