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종교 탐구 <3> 종교적 의식(儀式)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세계 종교 탐구 <3>
발행일 발행호수 2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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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1> 폼페이 전차 2021년 2월. 고고학자들이 고대 로마의 도시 폼페이에서 철, 청동, 주석으로 만들어진 4륜 마차를 발굴했다. 고고학자에 따르면 이 마차는 “지역 사회를 위한 축제 때 퍼레이드처럼 행렬하는 것으로 사용했을 것”이라며 고대 로마의 독특한 의식용 마차라고 했다. (출처: https://www.indiatoday.in/world/story/exceptional-discovery-archeologists-find-2-000-year-old-chariot-intact-near-pompeii-1773857-2021-02-28)

최근 이탈리아 고대 도시 폼페이에서 전차가 원형 그대로 발굴되어 언론의 관심을 받은 일이 있었다. 철제 부속품과 청동 장식으로 이뤄진 전차는 측면에 남녀가 성적으로 결합하는 모습이 부조로 새겨져 있어 특정한 의식에 사용된 전차였으리라는 추정을 낳게 했다. <자료1>

폼페이는 서기 79년 화산의 대폭발로 1700년 동안 화산재에 뒤덮여 있다가 현대에서야 발굴되었기 때문에 고대 로마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타임캡슐로 불리는데, 도시 곳곳에 남녀의 노골적인 성행위가 회화나 조각으로 표현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미스터리 저택’이라고 불리는 폼페이의 저택에는 화려한 예배당이 있으며 그 벽면에 그려진 정교한 그림은 사람들이 “바쿠스의 비의(秘儀)”라는 종교 의식을 치르는 모습을 보여 준다. <자료2>

<자료2> ‘미스터리 저택’이라고 불리는 폼페이 저택에는 예배당이 있으며 그 벽면에 정교한 프레스코화가 있다. 바쿠스를 숭배하는 종교 의식을 묘사하고 있다. (출처: https://www.chegg.com/flashcards/exam-2-77df642c-2502-4d5a-b3f6-1d186b23eabe/deck)

바쿠스는 술의 신으로서 당시 로마에서 광범위하게 숭배받았는데 그 숭배 의식에서 술에 만취한 참가자들이 난잡한 집단 성교를 벌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폼페이 벽화의 마지막 부분에도 종교적 의식이 절정에 이르러 남성의 상징을 받아들이는 여성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처럼 남녀의 성적인 행위가 종교적인 의식이 되는 것은 고대 로마 시대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며 인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 시대부터 시작되어 로마 이후까지도 계속되어 온 종교 의식의 하나였다.

이번 『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여러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종교 의식이 어떤 것이 있으며 그 기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알아본다.

<자료3> ‘최초의 슬픔에 잠긴 성모’의 기록이 있는 점토판 수메르에서 발굴된 이 점토판은 세 부분으로 내용을 나눌 수 있다. 첫 번째(1~13행)는 닌후르사그의 아들이 사라져 아들을 찾기 시작한 내용. 두 번째(14~25행)는 아들을 찾을 수 없어 한탄하는 내용, 세 번째(26~31행)는 아들이 저승에 있음을 알게 되자 비통해 우는 닌후르사그를 기록했다. 이를 두고 미국인 수메르 학자 새뮤얼 노아 크레이머는 닌후르사그에게 ‘최초의 슬픔에 잠긴 성모’라는 별칭을 붙여 주었다.(출처: S.N. Kramer, “BM 98396: A SUMERIAN PROTOTYPE OF THE MATER-DOLOROSA”, Eretz-Israel: Archaeological, Historical and Geographical Studies, 1982, pp. 141*-146*)

인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 문명은 ‘신들의 고향’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이는 수메르에서 숭배를 받았던 신들이 이후에 나타난 다른 종교에서도 여전히 숭배를 받았으며 신을 숭배하는 종교적인 의식도 수메르에 뿌리를 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수메르에서 시작된 의식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물에 몸을 담그는 행위로 새롭게 태어난다고 믿는 세례식이다. 세례식은 수메르의 ‘물의 신’인 엔키의 신전에서 거행된 의식이었으며, 이를 이어받은 종교는 태양신을 숭배하는 미트라교와 로마 가톨릭교회 등이 있었다.

기원전 1세기경부터 로마에 번성했던 미트라교는 세례 받은 신도가 흰옷을 입고 다른 신도와 함께 예배당을 향해 걸어가는 의식을 행했는데 이는 로마교회도 마찬가지였다. 두 종교 모두 수메르에서 기원한 세례식을 따랐지만 서기 2세기 무렵 활동한 로마 가톨릭교회 철학자 유스티누스는 사악한 미트라교의 악마가 로마교회를 모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후 380년에 로마 가톨릭교회가 국교로 공인되면서 미트라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들은 악마의 종교라는 이유로 철저하게 파괴당하고 탄압받았기 때문에 로마교회만이 세례식을 거행하는 유일한 종교로 남게 되었다.

세례식 외에도 수메르의 종교적 전통이 수천 년의 시간을 넘어 로마교회와 연관되는 것은 신의 어머니라는 ‘성모’에 대한 개념이 있었다.

영국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수메르 점토판(No.98396)에는 신들의 어머니인 닌후르사그가 젊은 아들을 저승에 보내고 비탄에 잠긴 모습이 기록돼 있는데, <자료3> 이를 두고 미국인 수메르 학자 새뮤얼 노아 크레이머(1897~1990)는 닌후르사그에게 ‘최초의 성모’라는 별칭을 붙여 주었다. <자료4> 로마교회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죽은 아들 예수를 끌어안고 비통해하는 모습을 숭배하며 이를 ‘피에타’라는 조각으로 표현하기도 했는데 <자료5> 이러한 종교적 전통이 아들을 잃은 수메르의 여신에게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자료4> 왼쪽은 최초의 성모 아이를 안고 있는 닌후르사그 (출처: https://www.mesopotamiangods.com/ninhursag/), <자료5>오른쪽은 피에타.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1475~1564)의 작품. 예수의 시체를 안고 비통해 하는 성모 마리아를 표현했다. (출처:위키피디아)

수메르에서 시작된 신의 어머니라는 개념은 비단 로마교회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로마교회보다 먼저 시작된 바쿠스의 종교적 의식을 보면 바쿠스 신의 어머니인 세멜레를 숭배하는 종교적인 제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로마교회가 유일한 종교로 공인된 후부터는 세멜레의 기념 행사는 완전히 금지되었고, 오로지 예수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를 위한 종교적 제의만이 남아 현재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자료6> 아트라하시스 인간 창조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된 수메르 점토판 (출처: 영국 국립박물관, BM 78943)

또 수메르 점토판 중의 하나인 “아트라하시스”에는 인간 창조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여기서 성경 창세기와 유사한 대목을 찾을 수 있다. <자료6> 아트라하시스에 등장하는 ‘죄지은 신의 피와 진흙을 이용해 인간을 빚었다.’는 이야기는 성경 창세기에서 흙으로 인간의 형상을 빚고 생령을 불어 넣었다는 이야기의 뿌리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죄지은 신의 피’로 인간을 빚었다는 개념은 기독교 교리에 깊은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기독교의 속죄론과 연결된다. 기독교에서 인간이 죄를 씻기 위해 피를 흘려야 한다는 속죄론은 인간이 창조될 때에 ‘죄지은 신의 피’로 빚어졌다는 수메르의 창세기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성경 구약에서는 염소의 피를 제단에 뿌려 죄를 사함 받는다는 제의를 기록하고 있으며 신약에서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인간의 죄를 사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모두 수메르의 창세기에서부터 연결되는 속죄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수메르 종교가 여러 종교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광범위한 지역에 영향을 미쳤던 것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여신에 대한 종교적 제의였다.

다신교인 수메르에서 하늘의 여왕으로 숭배받는 이난나 여신은 가장 중요한 신 중의 하나였으며, 수메르인들은 이난나 여신이 성적인 에너지를 발산함으로써 이 세상에 풍요를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따라서 해마다 새해가 되면 도시 한가운데 위치한 거대한 지구라트에서 이난나 여신을 숭배하는 의식이 펼쳐졌는데 이는 다름 아닌 이난나 여신과 그 남편인 두무지 왕의 성적인 결합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자료7>

이러한 결합을 ‘신성한 결혼’이라 명명하고 그 의미를 쐐기 문자로 기록한 점토판이 발굴되면서 성적인 행위를 종교적인 의식으로 보았던 수메르인들의 생각을 자세히 알 수 있다. ‘신성한 결혼’을 행하는 날이 오면 지구라트 꼭대기에는 이난나와 두무지를 위한 신방이 마련되고, 이난나 역할을 맡은 여 사제와 두무지 역할을 맡은 도시의 통치자가 군중의 눈앞에서 성적인 결합을 보여 주며 한 해의 풍요와 다산을 기원했다.

수메르인들은 이 의식을 통해 이난나 여신의 성적인 에너지를 숭배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의식을 마치고 여신의 능력에 사로잡힌 군중은 춤과 집단적인 성행위를 통해 광란의 상태에 빠져들었다. 이난나 여신은 수메르 이후에 등장한 다른 종교에서도 이슈타르, 아세라, 아프로디테 등의 이름으로 변신을 꾀하며 계속해서 숭배를 받았다.

성적인 에너지를 숭배하는 수메르의 종교 의식은 그리스와 로마, 이집트와 인도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기원전 7세기경 유대교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자료7> 왼쪽은 이난나와 두무지의 결혼을 묘사한 조각품. 루브르 박물관 메소포타미아관 소장 (출처: 위키피디아), <자료8> 오른쪽은 흑미사. Marquis de Sade(1740~1814)의 1797년 판화 작품. 성적인 에너지를 숭배하는 수메르의 종교 의식과 여러 면에서 유사성을 보이는 기독교의 흑미사. 사제가 들고 있는 원형의 밀떡은 가톨릭 미사에서 사용되는 성체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유대인 나흄이 기록한 바에 의하면, 유대교의 제례일에 제단 위에 설치된 무대에서 남녀가 성행위를 실연해 보이는 것으로 종교적인 제례의 서막을 열었다는 것이다. 이때 여자가 아름답게 치장한다는 점, 무대에 여자가 먼저 등장해 교태를 부리고 이후 남자가 등장한다는 점,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성행위를 실연한다는 점 등 수메르에서 이루어졌던 ‘신성한 결혼’ 의식과 여러 면에서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 같은 종교 의식은 유대교를 거쳐 기독교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오스트리아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가브리엘레 조르고(1961~)는 기독교에서 전통적으로 행해진 ‘흑미사’가 ‘남녀가 성교를 통해 절정에 오르는 것이며 이것이 곧 신과 하나 되는 의식’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자료8> 가브리엘레 조르고는 흑미사가 종교적 색채에 문란한 성행위가 결합된 것으로 기독교의 어두운 면이라고 했는데, 이 종교 의식이 수메르에서부터 시작되어 수천 년 전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종교나 신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 연원을 찾아보면 여러 종교를 거쳐 수메르 시대까지 이어지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다음 번『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일반에게 잘 알려진 ‘아담과 이브, 최초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와 ‘길가메쉬 서사시’라고 알려진 대홍수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알아본다.


미트라 교란?

황소를 죽이는 미트라 미트라교 숭배의 특징적인 아이콘은 ‘황소를 죽이는 미트라’이다. 이 장면은 토럭터니(tauroctony)라고 불린다. 미트라교는 황소를 제물로 바치는 것으로 신이 창조를 시작한다고 믿고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 미트라교와 로마 가톨릭 교회

미트라교는 태양신 미트라스(Mithras)를 믿는 종교로, 로마 가톨릭교회가 발생하기 전에 로마 제국 내에서 널리 유행한 종교다. 미트라 숭배는 BC 3세기경에 페르시아에서 성행하였는데, 페르시아가 발전함에 따라 그리스로 건너가게 되었으며, 그리스에서 로마로 전파되었다.

초기 가톨릭교회와 경쟁 종교였던 미트라교는 가톨릭교회가 로마에서 공인된 이후 점차 쇠퇴하였다. 많은 미트라교의 신전과 조각들이 가톨릭에 의해 파괴되었는데, 가까스로 파괴를 피한 미트라교의 건조물 등 종교적 유적이 현재 유럽에 남아 있다.

380년 로마에서 가톨릭이 국교로 지정된 후, 가톨릭의 종교 의례를 책정하고 정비히게 되었는데, 이때 가톨릭과 유사했던 다른 종교의 의례는 철저히 금지하고 탄압하여 결과적으로 가톨릭의 의례만이 남게 만들었다.

■ 미트라교의 주요 교리와 종교 의례

  1. 미트라의 탄생일 12월 25일이다.
  2. 미트라는 12 제자가 있었다.
  3. 미트라는 무덤에 묻혔으며, 3일 후에 다시 부활했다.
  4. 미트라교의 안식일은 일요일이다.
  5. 미트라교는 세례를 한다.
  6. 성수가 있다.
  7. 성찬식이 있다.

‘바쿠스의 비밀 의식’이란?

■ 바쿠스의 비의(秘儀)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와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난 술의 신으로, 로마식 명칭은 ‘바쿠스’이다. 고대 로마에는 ‘바카날리아(Bacchanalia)’라는 바쿠스의 비밀 의식이 있었다. 바카날리아는 ‘바쿠스 축제’라는 뜻인데, 이는 바쿠스를 기리는 의식으로서 와인 연회를 벌이고 춤을 추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에서 열리던 바카날리아는 이탈리아 남부에 전파된 뒤 캄파니아를 거쳐 로마에서도 성행하였다. 처음에는 여자들만 참석하여 비밀리에 열렸으나 나중에는 남자들도 참석이 허용되었으며, 한 달에 5차례나 열릴 정도로 성행했다.

그런데 종교적 제의를 빙자하여 방탕하고 난잡한 축제로 변질되자, 로마 당국은 기원전 186년에 바쿠스 축제를 위법으로 판정하여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후에도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계속해서 축제가 열렸고, 특히 1세기 무렵에 크게 유행하였는데, 폼페이 유적에서 발견된 돌널이나 벽화 등에서 당시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 어떤 의식을 했길래 금지까지 된 것일까?

숭배 의식의 일환이었던 비밀 야간 집회는 가히 광란의 축제라 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바쿠스 신에게 헌주한 후에 포도주 연회를 벌이는데, 축제가 절정에 이르러서는 술에 취해 시끄럽게 떠들어대며 산기슭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었고, 제물로 바쳐진 짐승, 또는 어린아이를 산 채로 뜯어 먹고 그 피를 마셨다고 한다. 이는 바쿠스 신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상징적 행위로서, 일종의 신과의 합일이라는 뜻이었다.

뿐만 아니라 축제에 참가한 다른 사람들과의 난잡한 성행위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러한 난잡한 성행위는 남녀노소가 구분이 안 된 일체의 집단 성행위로서, 심리적으로 불안한 개인이 혼돈의 덩어리로 하나가 되어, 심리적인 공포를 없애고자 하는 원초적 의식이었다. 이러한 광란의 제전에는 술이 주는 취기가 반드시 필요했다.

■ 그 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바카날리아는 현재 사라졌지만 포도주를 마시며 신의 살과 피를 먹는 의식, 난잡한 집단 성행위 등 바쿠스의 종교 의식들은 후대에 생겨난 종교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폼페이’는 어떤 도시?

▲ 폼페이 도시의 전경 하나의 도시가 온전히 보존된 상태로 발굴되었다. 뒤쪽에 베수비오 화산이 보인다. (출처: shutterstock)

첫 번째 사진은 폼페이의 원형 극장, 두 번재 사진은 베수비오 화산의 현재 모습, 세 번째 사진은 포럼(고대 로마 광장)

폼페이는 고대 로마의 도시로 농업과 상업의 중심지이자 로마 귀족들의 휴양지였다. 그러나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멸망해버리는 엄청난 재앙이 발생한다. 약 2천여 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고 로마의 화려한 문화를 자랑하던 광장과 대규모의 호화스러운 건물과 극장, 상가, 그리고 당시의 최고의 설비를 자랑하던 목욕탕이 화산재에 묻히고 말았다. 폼페이는 고도로 번영했지만, 잔인하고 음란한 문화를 즐겼기에 폼페이의 최후는 ‘타락한 도시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고도 불린다.

폼페이가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1592년, 폼페이 위를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는 수로 공사 과정에서 건물과 회화 작품들이 발견되면서 부터다. 그러나 본격적인 발굴은 되지 않다가 1748년부터 광장, 목욕탕, 원형 극장, 약국 등의 유적이 발견되기 시작하였으며, 현재는 도시의 약 4/5가 모습을 드러낸 상태이다.

◀ 웅크리고 있는 사람 화석 (출처: shutterstock)

폼페이의 사람 화석은 마치 거푸집처럼 남은 화산재 속 빈 공간에 석고를 부어 만든 일종의 석고상이라고 할 수 있다. 화산재에 뒤덮혀 차단되어 있었던 폼페이는 보존 상태가 아주 좋았는데, 사람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던 것을 이상하게 여기던 발굴 책임자 주세페 피오렐리가 흙더미 사이사이에서, 주로 건물마다 발견되는 빈 공간에 의문을 가지고 거기에 석고를 부어보자 사람의 형상이 드러났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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