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불법방영사건(11)박마리아, 김경래 그리고 탁명환⑥

탁명환의 '종교감별사' 평가는 과장된 것
발행일 발행호수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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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탁명환의 ‘종교감별사’ 평가는 과장된 것. 파출소장이라도 ‘감별’ 가능해

임홍천의 고백은 계속되었다.

`탁명환이 프라자 빌딩 앞에 차를 세우더니 젊은 사람(탁명환의 아들 탁지원)은 차에서 내려버리고 탁명환만 혼자 탄 차가 공중전화 앞에서 차를 세우고 나서 탁명환이 전화를 걸고는 차로 돌아와 차를 서서히 출발시켜 5m가량을 가니 파마머리를 하고 약 30대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조수석에 타는 것이 보였습니다.
여자를 태운 차가 조금 더 가더니 몇 군데 골목을 돌은 후 위로 철길이 높게 지나가는 철도변 차량이 많이 주차 되어있는 주택가에서 차를 세우더니 둘이 내려 길 건너편에 있는 4층 건물 2층에 있는 중국집으로 들어가 1시간 30분 정도 있다가 나왔습니다. 차를 다시 타고 고수부지 뚝방 길 외진 곳으로 가더니 차를 세워놓고 뚝 밑에 어두운 곳으로 둘이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둘이 껴안고 키스 하기를 10분 정도 하다가 그 옆쪽의 평행봉 운동기구가 있는 곳으로 운동을 하러 나온 젊은 남자가 그곳으로 접근하니 그곳에서 나와 차로 돌아가 차를 출발시켜 골목길을 굽이굽이 돌면서 한적한 곳에 주차를 시켜놓고 이야기를 하다가 차를 출발 시키기를 세 번 정도 하더니 탔던 위치쯤에서 여자는 내리고 탁명환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탁명환과 여자가 일부러 으슥한 곳으로 내려간 것이 보였다는데 밤에 20m가량 떨어진 곳에서 포옹을 하는지 키스를 하는지를 정확하게 볼 수 있었습니까?`

`지나가는 차량 불빛도 있고 하여 무엇을 하는 지는 알 수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탁명환이 여자를 껴안는 것을 보고 어떻게 생각하였나요?`

`탁명환이 젊은 여자와 껴안는 것을 제가 보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탁명환을 제거하여야겠다는 나의 생각에 확신을 주기 위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의자는 탁명환을 제거하려면 피의자의 손으로 제거할 수 있도록 하여달라고 소원기도까지 하였다고 하는데 기도응답을 받았나요?`

`뚜렷하게 응답을 받지는 못하였으나 저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제가 쉽게 탁명환의 사무실을 찾을 수 있었고 미행을 하는 도중에 여자와의 불륜 장면을 보게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탁명환 살해를 결심한 임홍천은 드디어 계획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탁명환은 어떠한 곳에 갈 때에도 경찰의 신변보호 요청을 하였으며 무슨 기관원 또는 거물이나 되는 양 자기가 사는 집과 관할 파출소를 연결하는 통신시설까지 설치해 놓는 등 자신의 안전에 만전을 기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탁명환의 제거를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던 특수부대 출신의 임홍천에게 그런 것은 모두 무용지물에 불과하였다.

탁명환 살해 사건이 나자 수사팀장을 맡았던 송경엽 당시 형사반장은 처음에 동료 형사들이 탁명환이 근거 없는 중상모략을 일삼았던 천부교측을 의심하더라고 하였다. 그러나 송 형사는 그러한 선입견을 배제하고 철저한 현장 조사를 실시한 끝에 마침내 범행도구를 포장했던 달력 조각을 찾아내 임홍천을 검거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탁명환은 그의 일생을 마감하였고 임홍천의 살해 동기도 모두 밝혀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처음에 제기하였던 질문으로 되돌아가 보자. 탁명환, 그는 과연 어떠한 사람이었던가?

그의 평가에 관하여 탁명환을 ‘종교 감별사’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일부 언론과 세평이 있는가 하면 그를 ‘종교계에 기생하여 피를 빠는 기생충’이라고 극단적으로 평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탁명환 비판론자를 대표하여 김덕환 씨의 견해를 듣고 민족학자 조흥윤(趙興胤) 교수의 기성종교와 신흥종교 갈등론에 입각하여 탁명환을 비판해 보고, 가장 객관적 입장에 있는 사법부의 견해는 어떠한지 알아보기로 한다.

김덕환 씨는 그의 탁명환 비판서에서 탁명환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

`첫째, 그는 이권을 좇는 직업 종교인이었다. 신흥종교문제 연구소를 창립했을 초창기에는 종교연구에 대한 사명감이 있었다. 그러나 학문적인 종교연구 자체에서 이탈해 사건중심으로 나가면서 매스컴의 조명을 받게 되자 그는 곧 사명감을 망각하고 현실에 눈을 돌리더니 직업적인 종교 비평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둘째, 직업 종교인으로 전락한 그의 종교 비판과 각종 발표는 신뢰성을 상실하였다. 통일교에 대한 사과성명에서 보듯이 직업 종교인은 호구지책을 위해 일하는 것이며 양심의 영역인 종교에 관한 비판은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셋째, 그는 자신이 운영하던 월간 『현대종교』를 개인감정으로 인신공격을 하고 비방 모략을 하는 수단으로 악용하다가 수많은 법정 고소사건의 회오리에 쌓이고 말았다. 그는 마치 중세 기독교 전성시대에 교권주의자들이 자기 비위에 거슬리면 이단이라는 누명을 씌워서 교계에서 매장시켰듯이 한국 교계에서 이 같은 상습적인 인권유린이나 종교적인 인권 모독행위를 자행하였다. 그가 운영하였던 사설 종교문제연구소는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입혔다.

옛말에 의사가 칼을 들면 사람을 수술해서 살리고 강도가 칼을 들면 강도짓을 해서 사람을 죽인다는 말이 있는데 탁명환의 경우 종교 연구라는 칼을 아무데나 휘두르지 않았나 생각된다. 종교연구는 순수한 학문적 연구가 주목적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자비하게 칼을 들어 사람들을 난도질 했던 것이다.`

여기서 기성종교와 신흥종교의 갈등에 대한 연구로 한양대 조흥윤 교수의 연구가 주목을 끌고 있다. 조 교수는 한 세미나에서 행한 그의 연구 발제문에서, `신흥종교 전체를 사이비 또는 유사종교로 몰아서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조 교수에 따르면 기성종교의 붕괴현상에서 비롯되는 신흥종교는 민중과 사회에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하는 긍정적 기능을 가지는 반면, 기성 종교와 사회로부터 비판 억압되고 편견과 선입견의 대상이 되므로 신흥종교에 대한 일방적 매도는 종교간의 갈등을 심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조 교수가 지적한 대로 기성종교의 안목에 의해 신흥종교를 매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인데 탁명환이 바로 그러한 오류를 범하였던 것이다. 그는 처음에는 옥석을 구분하지 못하다가 나중에는 의도적으로, 기성종교의 대안으로 떠오르는 건전하고 참신한 신흥종교의 새로운 가치관을 무시하고 신흥종교의 부정적인 면만 대중에게 홍보하고 말았다.

탁명환이 ‘종교 감별사’라는 세간의 평가도 왜곡되고 과장된 것이었다. 그가 감별했다는 사교들은 누구든지 파출소에 가서 신고만 하면 즉시 판별이 될 만한 것들로서 구태여 그의 손을 빌려 ‘감별’할 필요가 없었다. 파출소장이라도 즉시 범죄집단이라고 ‘감별’할 수 있고 그 피해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잡교와 사교들을 마치 자신만이 ‘감별’할 수 있다고 자랑했던 탁명환, 그는 그 과정에서 조흥윤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신흥종교를 무조건 매도하는 역사적 과오를 범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탁명환은 심각한 도덕적 결격 사유로 종교 비평가의 자격을 이미 스스로 상실하고 있었다. 만일 그가 정치가나 사회운동가였다면 그의 여성 편력은 세간의 관용속에 가리워 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인의 가면을 쓰고 호색을 하면서 타 종교를 비평하였다는 것은 마치 그가 ‘감별’했던 백백교주나 용화교주가 나타나 윤리(倫理)를 강의하는 형국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임홍천이 탁명환의 제거를 자신의 소명으로 알고 실행에 옮긴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고 그와 긴 대화를 나누었던 송경엽 전 형사반장은 말하였다.

재판부도 MBC의 명예훼손 방영에 대한 천부교의 손해배상 소송에서 그를 가리켜 `탁명환의 저술 내용은 천부교에 대하여 비판적이고 편향적인 입장에서 이루어 진 것으로 여겨지며, 달리 편향되지 않은 입장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인정할 자료가 없다`라고 평가하여 천부교에 대한 그의 편향성을 지적하고 그의 저서나 말은 진실하다고 믿을 수 없다, 즉 판결의 기초로 삼을 수 없다고 판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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